단일, 통합, 바른… 그냥 단어만 들어서는 이들이 무슨 교과서를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 설명하기 편리한 '국정교과서'라는 개념을 그대로 쓰지 않고, 다른 단어로 끊임없이 대체하는 것일까.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공공연한 '토킹 포인트'
"새로운 방식이나 보기 드문 방식으로 사용되는 말이 있을 때 그것은 어떤 정보가 부적절하게 삭제당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언론학자 빌코바치는 자신의 저서 <빌 코바치의 텍스트 읽기 혁명>(김원옥 옮김, 다산초당 펴냄)에서 '토킹 포인트(Talking Point)'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토킹 포인트는 정치권을 포함한 누군가가 특정한 프레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국정 역사교과서 논란에서 새롭게 선택된 말은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교과서를 학계가 아닌 정부가 주도해 만든다는 '국정교과서'라는 정보 값을 부적절하게 삭제한다.
혼선을 거듭하던 정부의 국정교과서 관련 토킹 포인트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로 정해졌다. 정부가 선택한 교과서만이 '올바른 교과서'라는 선언이다. 이로써 '올바른 역사교과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 '올바른 사회적 질서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됐다. 이는 건전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국정' 또는 '검·인정'일 경우 토론이 가능하지만,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은 토론과 합의의 영역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또 다른 토킹 포인트였던 '비정상의 정상화'도 같은 맥락이다. '정상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됐다. 앞으로 정부·여당 관계자들은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할 것이다.
새누리당 역시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중앙일보>는 12일 자 기사 '국정 역사교과서 이름은 '바른교과서' 거론'에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토킹 포인트가 정해지기까지의 과정이 나온다.
"새누리당은 교과서 발행방식의 하나로 법정용어인 '국정'이 교과서 이름으로 쓰일 경우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해 적당한 교과서 명칭을 마련키로 했다. '통합교과서'의 의미를 담되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바른교과서' 등이 후보로 거론됐다."
단어는 인식을 구성한다. 새로운 단어가 하나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단어를 중심으로 사유하기 시작한다. 정치인과 유력 인사들은 단어를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정해진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보수 성향의 인터넷커뮤니티 '일간베스트' 등에서는 200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는 총기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라고 한 말에 근거해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세월호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등으로 왜곡되고 있다. 여기서 '폭동'은 그 단어가 반복적으로 유통되면서 악의적인 가치 판단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은 지워진다.
발언권 강한 정치인이 휘두르는 칼,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언론
토킹 포인트는 원래 미국 정치권에서 주로 사용됐다. 공화당에서는 하나의 토킹 포인트가 정해지면 그것을 다른 단어로 대체하지 않고, 모든 의원들이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하나의 사안을 설명한다. 이는 기업의 언론 대응 전략에서도 자주 쓰이는데, 결과적으로 핵심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단어를 인식하는 선에서부터 막히는 셈이다.
정치권은 자신의 강한 발언권을 이용해 여론을 전환시키려 한다. 당장 정부가 주도해 만드는 국정 역사교과서의 명칭이 '올바른 역사교과서'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그대로 기사화했다.
△ [속보] 새누리 "국정 대신 '올바른' 역사 교과서로 부르자" (<조선일보> 10월 12일 자)
△ 새누리당 "국정교과서 명칭, '올바른 역사교과서'로 부르자" (<국민일보> 10월 12일 자)
△ 여 "국정교과서, 국민 알기 쉽게 '올바른 역사교과서'로 명명" (<아시아경제> 10월 12일 자)
△ 내년부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올바른 역사교과서' 명명 (<국제신문>10월 12일 자)
△ 김정훈 "'국정' 대신 '올바른 역사교과서' 명명" (KBS 뉴스, 10월 12일 자)
주어나 단어의 배치가 약간 다를 뿐 사실상 같은 기사다. 정치인의 발언을 그대로 가져와 옮겨 적어 기사화하거나, 다른 매체가 쓴 기사를 그대로 베낀 기사가 난무하는 한국의 현재 언론 지형에서 토킹 포인트를 사용한 단어의 조작은 매체를 통해 확대재생산된다. 정치권이 주도면밀하거나 비밀리에 토킹 포인트를 만들지 않아도, 이미 많은 언론이 정치인의 발언이나 특정한 대상을 표현하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언론이 정치권에서 만들어내는 토킹 포인트에 일조하는 셈이다.
설령 언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정부가 명칭을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공식화하면, '국정교과서'는 비공식적 단어로 폐기된다. 앞으로 이어지는 국정교과서 관련 보도에서 좋은 언론과 그렇지 않은 언론이 드러날 것이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토킹 포인트가 기준이 될 수는 있다. 본연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언론이라면 이를 보다 정확한 단어로 대체해 사용하고,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것이다. 그들은 언론의 보도를 읽고, 보고 들으면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보다 정확한 정보에는 보다 정확한 단어가 필요하다.
인식을 새롭게 구성할 단어를 만들거나 혹은 그 의도를 분석해내거나
조지 오웰은 자신의 책 <1984>에서 '빅브라더'라는 거대 권력이 만든 새로운 언어 '신어'를 창조한다. 신어(新語)는 구어(舊語)에 대응하는 새로운 체제의 언어다. 특징은 풍부한 언어의 뿌리를 잘라내고 가장 기본적인 단어만 남기는 것이다. 빅브라더는 이를 통해 사상적 통일이 가능하다고 봤다. 빅브라더의 세상에서 모든 '탁월하다', '훌륭하다'와 같은 '좋음'을 뜻하는 다양한 단어들은 '좋다(Good)'는 기본적인 단어로만 쓰인다. '강제 노동 수용소' 또한 '쾌락 수용소'라는 신어로 명명된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토킹 포인트는 빅브라더의 신어와 같다. 그동안 정치적 언어는 끊임없이 신어로 둔갑했다. IMF 외환위기 당시 '대량해고'는 '구조조정'으로 바뀌었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 중 '일반해고 요건 완화'는 '쉬운 해고'와 '공정 해고' 등 노동계와 정부가 각각 다른 토킹 포인트를 쓰고 있다.
△ 임기내 밀어붙이는 '박근혜 교과서'…'시민 불복종' 불붙는다 (<한겨레> 10월 11일 자)
△ 박근혜식 속도전…국정 교과서, 'MB 4대강' 꼴 난다 (<한겨레> 10월 12일 자)
토킹 포인트는 언론이 정부를 비판할 때도 사용된다. <한겨레>는 정부의 국정교과서에 '박근혜교과서', '보수편향교과서', '수준미달교과서', '졸속교과서', '밀실·오류교과서' 등으로 이름 붙여 사용한다. 이중 '박근혜교과서'는 SNS를 통해 국정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의식 왜곡과 반민주주의 행태를 꼬집는 말이다. 신문은 또 '통합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주장에 '보수편향교과서'나 '밀실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며, 기존 정치권의 토킹 포인트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 [팩트체크] 역사 교과서 국정화 말·말·말…누구 말이 맞나 (JTBC <뉴스룸> 9월 10일 자)
한편, JTBC는 '오류 없는 교과서'라는 여당의 주장을 파헤쳤다. 정부는 '기존 검·인정 교과서에 오류가 많기 때문에 국정으로 바꿔서 오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해왔다. JTBC <뉴스룸>에서는 현재 초등학교 사회과 국정 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를 직접 비교했다. 그 결과, 오류 건수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정부·여당의 결정적인 논리를 무력화한 것이다.
정치인의 토킹 포인트가 집권과 통합을 위한 전략이라면, 정확한 단어를 통해 사안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것은 언론의 대응 전략일 것이다. 첫째, 새롭게 지정된 단어에 대응할 정확한 대치어를 사용해 둘째, 단어 사용의 의도를 수용자에게 투명하게 밝혀 집권층의 토킹포인트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토킹 포인트라는 요청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1984>에 따르면, 구어를 회복하거나 신어의 원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언론은 정치권이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정치권의 언어를 수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토킹 포인트를 해부하는 작업을 지속해야 한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정치실험공동체 '정치발전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으로, 소위 '정치 후진국'이라 평가받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 혐오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정치와 시민의 삶을 가깝게 할 수 있는 정치기사란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좋은 정치 기사'를 판별하는 팀 나름의 기준을 만들기 위해 지난 석 달 간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정치 보도가 △반정치주의를 부추기지는 않는지, △정치적 갈등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그리지는 않는지, △의회 민주주의의 역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진 않는지, △정치권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편견을 강화하지는 않는지 등 문제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지난 세 달 간의 세미나를 통해 얻은 문제의식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는 기회를 가져 보려 합니다. 총 10회에 걸친 '정치 기사 뒤집어 보기' 연재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정치와 시민의 삶을 가깝게 만드는 정치 기사가 많아지길 기대하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정치발전소 홈페이지 http://politicalpowerplan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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