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미국 의존, ‘스톡홀름 증후군’?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통국가' 일본의 향배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확장 움직임이 많은 한국인을 걱정시키고 있다. 일본의 침략에 역사적 피해의식을 가진 한국인에게 일본의 평화헌법은 하나의 위안이었다. 근 70년 동안 현대일본의 존재양식을 규정해 온 이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요즈음의 변화가 걱정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당성의 기준으로 원론적인 반대만 하고 있기에는 현실의 무게가 너무 크다. 일본 항복 70주년 시점에서 일본의 군사화 추세가 품는 의미를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현실적 대응 방향을 궁리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평화헌법 제정 경위부터 살펴볼 생각이 든다.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 제12-13장(447-522쪽)이 좋은 참고가 된다.

다우어는 일본 헌법이 실제적으로 1946년 2월 초순의 1주일 동안 맥아더의 지침에 따라 점령군사령부(GHQ) 민정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일본인이 스스로 작성한 것처럼 선전했지만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3월 6일 새 헌법 내용이 공표된 직후의 언론 상황을 다우어는 이렇게 그렸다.

GHQ가 헌법을 낳은 아버지란 것을 언론이 거론치 않도록 하는 임무는 GHQ 내의 민간 검열부에 할당되었다. "SCAP(연합국최고사령부)이 헌법을 기초한 데 대한 비판"은 검열관이 검열 지침으로 삼은, 이른 바 키 로그의 한 분야로 정식으로 자리 잡았고, SCAP의 관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일체 금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들은 초안의 '이상한 일본어'나 '재미있는 표현'에 주의가 기울어지도록 노력했다. 대담하게도 일본어판 헌법의 "번역이 별로 좋지 않다"고 적은 구절에는 검열관의 파란 줄이 그어졌다. 그러나 업무의 과부하에 시달리던 검열관들이 모든 구절을 점검할 수는 없었고, 대체로 헌법안을 지지하는 언론들도 사설 안에 조롱조의 말을 넣으려 했다. 예컨대 <아사히 신문>은 정부안을 "어딘지 모르게 맞지 않는 빌려 입은 양복"이라고 적었다. <지지 신보>는 부엌에서 풍겨 오는 냄새에 일본 음식을 떠올리다가 막상 식탁 위에 양식이 놓였을 때의 느낌 같다는 식으로 헌법안에 대한 첫인상을 적었다. 젓가락을 치우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야 했다. (위 책 500쪽)

2월 4일 민정국의 초안 작성 작업이 시작될 때의 상황과 이때 주어진 맥아더의 지침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민정국 사상 가장 유별난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민정국의 기밀회의록에 남겨진 바에 따르면 2월 4일에 휘트니는 참모들을 소집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다음 주에 민정국은 제헌 의회가 될 것이다. 맥아더 장군께서 일본인을 위한 새 헌법 작성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민정국에 부여하셨다." 새 헌법은 맥아더가 핵심 사항으로 간주한 세 가지 원칙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했다. 휘트니가 회의에 들고 간 간략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 천황은 국가의 수장이다. 왕위는 세습된다. 천황의 의무와 권력은 헌법이 규정하는 한도 내에서 행사될 것이며 거기에 규정된 인민의 기본 의지에 조응해야 한다.

2. 국가 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폐지된다. 분쟁 해결, 심지어는 안전 보장을 위해서도 전쟁은 일본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해야 한다. 일본은 스스로의 방위와 보호를 위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좀 더 숭고한 이상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일본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육군, 해군, 공군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형태의 교전권도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3. 일본의 봉건제는 중단될 것이다. 황족을 제외한 그 어떤 이도 지금 현재 귀족인 자를 제외하면 앞으로는 귀족이 될 수 없다. 지금부터 귀족은 국민으로서나 시민으로서나 어떤 식으로든 특권을 누릴 수 없다. 영국식 예산 제도를 채용한다. (위 책 466-467쪽)

맥아더의 3개 지침 중 제2항이 '평화헌법'의 방향을 규정한 것이다. 제2항에 표현된 극단적 기준은 초안 작성위원회에서 다소 완화되었다고 한다.

초안 작성 위원회도 탈군사화에 대한 맥아더 명령의 격한 어조를 (심지어는 의도까지도) 약간 톤을 낮추어 표현했다. 이런 수정 작업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느끼도 있던 케이데스(대령, 법률가)는 "설령 자위에 필요하다 할지라도... 국가의 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부정한다는 맥아더의 단호한 태도는 지나치게 단정적이라 보았다. 어떤 국가든지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내부의 혼란에 대해서도 헌병, 경찰, 국경 수비대 등의 기구를 통해 주권을 지킬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그는 전쟁 부정 조항의 첫 문단을 다음과 같이 단순한 형태로 수정했다. "국가의 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철폐된다. 분쟁 해결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거나 그 사용으로써 위협하는 것은 영원토록 이를 폐기한다." 교전 상태의 존재를 부인하고 육해공군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조항의 두 번째 문장에 관해서는 맥아더의 지시가 그대로 관철되었다. 케이데스는 의도적으로 "자위를 위해" 어느 정도 재무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으며, 그럼으로써 보수파 부활의 씨를 뿌린 셈이 되었다. (위 책 476-478쪽)

이런 경위를 거쳐 1946년 11월 공포된 헌법 제 9조는 이런 내용이 되었다.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펴냄)

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을 맺을 때 패전국의 군사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먼 옛날부터의 관행이었다. 일본의 비(非)군사화도 같은 맥락의 조건이었거니와, 제국주의시대가 끝나 가던 당시에는 전쟁 방기를 통한 평화의 이념이 널리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 조약, 즉 '전쟁 방기에 관한 일반 조약'의 정신을 되살려 실현하려는 희망이 일본 평화헌법의 배경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이념이라 하더라도 승자의 강요에 따르는 것이라면 반감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1951년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1952년 4월 28일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던 날 <아사히신문>에는 7년 가까운 점령기가 일본인을 "무책임하고 굴종적이고 조급한 심성으로 만들고...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 "Occupation of Japan")

모든 일본인의 심성과 시각이 다 그렇게 비뚤어지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경향이 폭넓게 일어났으리라는 것은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전쟁 상대였던 여러 나라 중 미국 한 나라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사실도 일본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을 미국이 독점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유별난 일이었다.

1945년 2월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열린 얄타회담에서도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여러 연합국의 분할점령 대상이 될 전망이었다. 일본 항복을 목전에 두고 7월 17일에서 8월 2일까지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도 일본 점령의 구체적 방침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8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연합군최고사령관(SCAP)에 임명하고 일본 본토를 연합군최고사령부 관할로 정함으로써 미국의 독점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소련은 홋카이도 점령을 원했다. 소련이 일본을 포기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막 개발된 원자폭탄을 비롯한 미국의 군사적 우위에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포츠담회담 개막 전날인 7월 16일 원자폭탄 실험 성공에서 8월 15일 일본의 항복까지 한 달 동안의 사태 진행에서 드러난 미국의 일본 장악 의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얄타회담 때까지도 연합국 진영에서 소련의 역할이 압도적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동부전선의 소련군 병력은 서부전선 연합군의 세 배가 넘었다. 서부전선에서 라인 강을 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소련군은 베를린 동쪽 1백km 거리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병력 희생을 감당하기 힘들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을 굴복시킨 후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에도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탈린은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아시아 전역에도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5월 8일 독일 항복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8월 8일에 대 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 진격하게 되는 것이다.(극동 시간으로는 8월 9일)

얄타회담 5개월 후 포츠담회담이 열릴 때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독일 항복 후 소련의 동구권 공산화 정책이 서방국의 반감을 자극, 파시스트와의 전쟁에 묻혀 있던 반공의식을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때맞춰 완성된 원자폭탄이 미국의 반소 정책을 부채질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목적이 일본의 굴복보다 소련에 대한 과시에 있었다는 관점이 있는데, 나는 이를 지지한다.

포츠담회담 중에 포츠담선언이 나왔지만, 회담 주체와 선언 주체는 서로 달랐다. 회담은 독일과 유럽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미-영-소 정상이 모인 것이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은 미-영-중 정상의 이름으로 나온 것이었다. 소련이 선언에 빠진 것이 아직 일본과 교전 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고 대개 이해하지만, 예정된 선전포고를 목전에 둔 시점의 이 선언에서 꼭 빠져야 할 이유라고 보기 힘들다.

포츠담선언의 말미에 일본이 항복 여부를 거부할 경우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를 당할 것이라고 위협한 대목이 원자폭탄 사용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8월 6일까지 이 요구에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는데, 이 침묵을 거부의 의미를 띤 '묵살'로 해석해서 히로시마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을 소화할 겨를도 없이 사흘 후 나가사키에 또 폭탄을 떨어뜨렸다. 일본은 나가사키 투하 다음날인 8월 10일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용 의사를 연합국에 전달했다.

적대감이 극도에 달해 있던 세계대전 말기가 아니었다면 원자폭탄처럼 극악한 무기의 실전 사용 기회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폭발실험의 첫 성공 3주일 후 실제 투하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은 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최대한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포츠담선언 자체도 원자폭탄 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행위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평화헌법 자체는 인류의 평화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근 70년이 지나도록 이 이념은 확산되지 못한 채로 일본에만 묶여 있다. 그렇다면 퇴색해 버린 이념 측면보다 미국이 일본을 통제하는 기제로서의 측면에 더 큰 의미가 남아있는 셈이다. 어찌 보면 일본은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미군 점령 하에서 국가체제를 새로 세운 이래 미국의 인질로 70년 세월을 지내 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재(再)군사화가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을 '보통지역'으로 만드는 의미도 거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세계적 냉전이 끝나고도 냉전 식 긴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특수 상황을 구성하는 하나의 큰 요소가 미국에 대한 일본의 안보 의존이다. 재군사화 자체는 반갑지 않은 일이라도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본다면, 그를 통해 일-미 관계의 기반 조정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진행 중인 일본의 재군사화는 미-일 동맹의 강화를 위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속된 말로 변소 가기 전과 다녀온 후의 마음은 다른 것 아닌가. 재군사화를 뒷받침하는 일본의 민심은 보통국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성취를 위해 지금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 미국의 승인과 지지다. 그 성취가 일단 이뤄져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 상태를 벗어난 뒤의 일본의 선택이 지금과 똑같은 것이 되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서유기>에 긴고주(緊箍咒)란 것이 나온다. 손오공의 머리에 '긴고'란 테가 씌워져 있는데,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현장법사가 긴고주란 주문을 외워 엄청 괴롭힐 수 있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다. 평화헌법은 일본이 미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긴고' 노릇을 해온 셈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변화에서 일본의 더 큰 역할을 미국이 바라기 때문에 '긴고'를 벗겨주는 셈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흥미롭기도 하다. 미국은 과거에 목전의 이득을 위해 특정 세력을 키워줬다가 뒤통수 맞은 일이 거듭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그런 이력 때문에 '보통국가 일본'의 향배가 흥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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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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