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느 순간에 늙은이가 되는 거지?"

[몸의 일기 ⑥] 몸이 지배하는 시간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기. 타인의 은밀한 기록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기분은 상상만 해도 짜릿합니다. 그래서 기회만 온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여기 자신의 일기를 통째로 공개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일기에는 열두 살 때부터 여든일곱 살까지 그 남자의 내밀한 기록으로 빼곡합니다.

그 남자의 첫 몽정(13세), 첫 섹스(23세), 첫사랑(26세), 첫아기(28세). 그의 첫 외과 수술, 즉 코 막힘과 코골이의 원인이 되는 코 안의 용종 제거 수술(27세), 오른팔 안쪽에 생긴 첫 검버섯(44세), 노안에 난생 처음 쓰게 된 안경(45세), 처음으로 본 손자(53세),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처음으로 망각한 일(62세).

이뿐만이 아닙니다. 49세 때 갑자기 찾아온 이명과 친구 되기, 60세가 넘어서면서 평생을 갈 것 같았던 아내와의 욕망이 사그라진 현상.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 손자의 동성애를 접한 70대 할아버지의 당혹스러움, 오랜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손자의 때 이른 죽음. 그리고 시간 앞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육체.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기.

그렇습니다. 이 남자의 일기는 보통의 일기와 다릅니다. 우리가 그간 엿보았던 대부분의 일기는 내면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죠. 그런데 이 일기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몸'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그 몸의 일기를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죠. 그 남자의 몸에는 사랑, 갈등, 관계, 과학, 역사 등 세상의 온갖 것들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 남자의 몸의 일기를 엿보면서 한 남자의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온갖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덤이고요. 이 특별한 일기를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가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펴냈습니다. 페나크가 누구냐고요?

페나크는 '말로센 시리즈',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 <소설처럼>, <학교의 슬픔> 같은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페나크가 일기 형식을 빌려서 '소설인 든 소설 아닌 소설처럼'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몸의 일기>입니다.

<프레시안>과 문학과지성사는 이 <몸의 일기>를 먼저 읽은 여덟 명의 독후감을 매주 화요일, 금요일 두 차례씩 연재합니다. 20대의 젊은 작가, 40대의 의사, 60대 70대의 노(老)작가까지 다채로운 빛깔의 독후감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여섯 번째 독후감의 주인공은 50대 후반의 김종갑 몸문화연구소 소장(건국대학교 교수)입니다.

"도대체 어느 순간에 늙은이가 되는 거지?"

▲ <몸의 일기>(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몸의 일기>에서 화자 '나'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이 자문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대체 언제 노년기로 들어가는 거지? 어느 순간에 늙은이가 되는 거지?" (262쪽)

그의 나이 고작 40대 중반이었다. 이후로 그의 일기는 노안과 기억력 감퇴, 불면증, 무거운 몸, 만성 피로 등 노년기의 증상을 탄식하는 문장들로 가득 채워진다.

세상에 노년기만큼 개인차가 큰 것이 있을까. 이 일기의 주인공은 노년기를 지나치게 빨리 맞이했다. 40대 중반이라니! 80이 넘어서도 젊은이처럼 정정한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미국의 문명사가 자크 바르죙은 98세까지 활발한 문필 활동을 하다가 106살에 숨을 거뒀으며, 독일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01살까지도 학문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60~70대를 가리켜 신(新)중년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50대 후반인 나에게 노년이라는 말은 매우 생소하다. 노년에 관한 연구를 한 적은 있지만 그것을 나의 개인적 문제로 생각한 적은 없다. 노년이란 무엇일까? 휘트먼이 '나의 노래'에서 "풀잎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상형문자"라고 대답했듯이 나에게도 노년은 알 수 없는 상형문자이다. 아니면 나와 무관한 저 먼 나라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생각은 피할 수가 없다.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했던 <몸의 일기>의 주인공과 달리 나는 진실을 우회하며 회피하는 것이 아닐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자기기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패자가 된다는 듯이.

내 생각에 50대는 어중간한 나이다.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나이, 그래서 박쥐처럼 이중적 정체성이 가능하다. 나처럼 젊은 쪽으로 기울 수도, 아니면 일기의 주인공처럼 늙은 쪽으로 기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나이에 대한 내 생각을 주장하긴 했지만, 과연 생각이 중요할까? 과연 내 몸이 생각만큼 젊을까? 생각의 논리학과 몸의 생리학은 동일하지 않다.

40대 후반에 불청객처럼 노안이 찾아왔다. 갑자기 책의 글씨가 흐려지는 것이었다. 농담이겠거니 생각하며 눈을 부비고 다시 봤다. 여전히 희뿌연 글씨—나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보고 있었다. 환자가 환부를 의식하고 있듯이 그러한 내 눈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때 나이가 든다는 것이 몸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해야 할 몸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다리로 걷고 그냥 타이핑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하고, 잠자리에서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허리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깨달음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벼운 정신이 아니라 탈도 많고 망가지기 쉬운 물질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그러한 몸의 변화와 더불어서 왔다. 지금까지 정신에 가려서 배경에 있던 몸이 정신을 밀치고 전경(前景)으로 나서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몸이 점차 주제화되기 시작한다. 30대에 나는 몸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나의 의지와 명령에 충실한 하인처럼 복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하인이었던 몸이 점차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책을 봐야 하는데 보여주지 않고, 달려야 하는데 달려주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데 묵묵부답이다. 이제 나는 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몸에게 나의 의식을 내주는 시간도 증가하게 된다. 몇 해 전에 점심을 같이하던 동료 중 하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한마디 툭 던졌다. '우리가 양로원에 있어요? 아픈 몸 이야기만 하게.' 언제부터인가 몸이 우리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몸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젊음이란 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러한 자유에 걸리는 제동이다. 생각과 의지가 물질화되는 것이다. <몸의 일기>의 주인공은 50대의 어느 날 자기의 생각이 그와 같이 물질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 주위를 압도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치던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돌연 말문이 막혔다! 발밑의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멋지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적절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둑맞은 주인처럼 분노를 느끼며 기억을 추궁"해야 했다.(290쪽) 그는 정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뇌라는 컴퓨터, 그것도 노후한 컴퓨터로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이 나의 의식을 점유할 때마다 나는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노년이라는 말은 나에게 너무나 생소하기만 하다. 달까지의 거리를 자로 잴 수 없듯이 내가 노년에 이르는 그 먼 거리를 생각으로 잴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물리적·생리적인 나이와 정신적·심리적·정서적 나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젊음이라면 나는 과거 젊었던 시절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젊음을 즐기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 당시 심리적·정서적인 불안정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사사건건 가로막았다. 몸은 마음을 갉아먹고 마음은 마음대로 몸을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망가지기 쉬운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내 몸을 잘 관리하며 마음과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할 수 있는 역량'으로 결집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이가 가져다주는 자연의 축복일까? 아니다. 그것은 결핍을 역량으로 승화하는 삶의 기술, 아니 삶의 예술이다.

(50대 후반의 남성인 김종갑 소장은 건국대학교에서 영문과 교수로 문학 비평과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주된 관심은 몸을 화두로 하는 문화철학에 있으며 2007년 몸문화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생각, 의식의 소음>(은행나무 펴냄),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건국대학교출판부 펴냄),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나남출판 펴냄) 등이 있다.)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는…

▲ 다니엘 페나크. ⓒCatherine Hélie/Editions Gallimard
본명은 다니엘 페나키오니. 1944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열등생이었으나, 그 시기에 독서에 남다른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니스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26여 년간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말로센 시리즈'와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에서 보여준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넘치는 표현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밖에 강압적인 독서 교육을 비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우치는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펴냄), 열등생이었던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학교의 슬픔>(문학동네 펴냄) 등의 에세이와 소설, 시나리오를 발표했으며, 한 남자가 10대부터 80대까지 몸에 관해 쓴 일기 형식의 소설 <몸의 일기>는 2012년에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1995년부터 교직에서 물러나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교실을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미스터리 비평상(1988년), 리브르앵테르 상(1990년), 르노도 상(2007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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