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생인 내가 학교에 들어간 1956년이면 해방 후 11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때 어른들은 해방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었다. 해방당시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감격으로 해방을 맞았고, 사진과 같은 광경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펼쳐졌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런데 이 사진은 해방 순간을 찍은 것이 아니다. 이튿날 아침 서대문형무소에서 정치범이 석방될 때의 사진이었다. 당시 36세의 신문기자였던 영문학자 조용만은 8월 15일 당일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이 큰길로 뛰쳐나오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좋아라고 법석일 줄 알았는데, 그냥 그전대로 무표정하기만 했다. 오랫동안 줄곧 겁만 먹고 일본 경찰에 옴쭉달싹 못하고 눌려 지내온 때문일까. 일본이 항복했다고 해도, 우리가 일본 통치에서 해방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일본 경찰이 아직도 버티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겁났을는지도 몰랐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9쪽에서 재인용)
사리에 맞는 회고다. 일본 통치당국은 만약 패전할 경우 조선인들도 참혹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줄기차게 선전해 왔다. 조선 독립을 연합국이 약속했다는 카이로선언은 완강한 언론 통제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희미하게 전해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의 패전에 민족 독립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 과정에서 어떤 혼란과 고통을 겪어야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걱정이 줄고 기쁨이 늘어났다. 인식의 변화가 외진 시골보다 서울에서 더 빨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에서는 8월 15일 해가 지기 전에 죄수의 석방이 시작되고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요원들이 도처에 배치되는 것을 보며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반가운 변화의 소문은 철도를 따라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매달린 이유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함석헌은 말했다. 박헌영은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고 했다. 50여 년 후 친일 혐의를 추궁받던 어느 시인은 "일본이 패망할 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했다고 변명했다. 일본의 패망은 국내에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당국이 아무리 보도를 통제해도 불리한 전황을 몽땅 감출 수는 없었다. 연합국 방송을 단파라디오로 듣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몰라도,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진 지식층 사람들은 일본의 패색을 모르고 있을 수 없었다. 그 패망이 언제 어떤 식으로 닥쳐올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이다.
함석헌과 박헌영의 발언은 일본 패망에 대비한 준비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탄식한 것이다. 일본의 통제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민족사회를 이끌고 갈 역량을 갖춘 지도부가 만들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통치당국은 협력을 거부하는 조선 지도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전쟁 막바지에 탄압이 더욱 극심해서 잠재적 지도자들이 거의 모두 전향하거나 옥중에 있는 채로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막상 항복 상황에 이르자 조선인사회 지도부의 존재를 아쉬워하게 됐다. 조선에 있던 백여만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는 조선사회의 질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독부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준을 밀어주기로 한다. 치안을 비롯한 총독부의 일부 기능을 건준에 양도하는 대신 건준은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협력한다는 거래였다.
송진우가 먼저 이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기 때문에 여운형을 청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중에 송진우 주변에서 나왔다. 정황으로 보아 현실성 없는 주장이다. 김성수와 송진우 등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은 식민통치에 협력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인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처럼 최근까지 옥고를 치른 투철한 민족주의자라야 일본인에 대한 폭력의 절제를 호소해도 인민의 의심을 살 염려가 없었다.
그런데 총독부 측은 건준의 역할을 바라면서도 흔쾌히 밀어주지 않았다. 며칠 지나 건준의 치안활동이 궤도에 오르려 하자 경찰력을 다시 동원해 치안권을 빼앗았다. 본국이 항복을 했으니 누군가에게 칼자루를 넘겨주고 처분을 바라야 하는 입장이었고, 여운형과 안재홍 같은 합리적 민족주의자가 적합한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길은 없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식민통치를 그대로 물려받은 미군정
눈치를 볼 대상은 진주할 미군이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소련(러시아)과 계속 갈등을 겪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으면서도 가장 두려워한 연합국이 소련이었다. 미국의 8월 6일과 9일 원자폭탄 투하도, 일본의 재빠른 항복도 8월 8일 대 일본 공격을 시작한 소련의 입장 강화를 막는 데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진행이었다.
일본의 항복 결과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군사적-경제적 거점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일본은 분할점령을 면하고 천황제를 지킬 수 있었다.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 수락의 뜻을 밝힌 것은 8월 10일이었다. 8월 14일 합의까지 어떤 흥정이 오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윈-윈의 결과를 위해 치열한 물밑교섭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빤한 일이다.
오키나와에 있던 미 육군 24군단이 남조선 점령군으로 정해진 것은 8월 20일의 일이었다. 24군단과 조선총독부 사이의 직접 교신이 8월 22일부터 시작되었다. 9월 8일 24군단이 인천에 입항할 때까지 교신 내용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24군단 진주 후에 벌어진 일을 보면 얼마간의 짐작이 가능하다.
미군정은 일본인과 협력하여 조선 지배를 넘겨받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총독부 이하 모든 기관의 일본인 간부를 그대로 쓰다가 차츰 미군 장교로 부서장을 임명했지만 일본인 전임자가 고문 자격으로 업무를 계속했다. 몇 달 후에야 일본인을 내보내고 조선인을 쓰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전에 중간급 간부로 일하던 친일파였다. 일부는 미국유학생 출신과 기독교인 등 친미파의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데는 상대를 존중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경우가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경우가 있다. 국가 간의 관계는 개인의 경우보다 '국익'을 더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겉으로는 조선에 '해방군'으로 온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점령군'의 속셈을 가진 것이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오는 소련군에 비해 태평양 건너, 자본주의가 적합하지 않은 지역을 점령하러 오는 미군은 불리한 조건에 있었고, 그만큼 억압적 점령정책을 필요로 했다. 미군의 조선 점령정책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이어받았다. 그래서 일체의 조선인 자치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총독부와 경찰을 통한 억압적 통치체제를 그대로 지켰던 것이다.
총독부와 미군정 합작의 '위조지폐' 사건
조선총독부에서는 미군정의 이런 방침을 24군단 도착 전에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군은 8월 하순 이북 지역을 점령하면서 일본인 관리들의 권한을 바로 조선인 인민위원회에 넘겨주었다. 미군도 비슷한 조치를 취할 것이 예상되었다면 이남의 일본인 관리들이 건준에 적극 협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복 선언 며칠 후부터 건준을 무시했다.
일본인만이 아니라 친일파 집단도 건준을 외면했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송진우를 참여시키기 위해 애를 썼는데, 송진우는 김성수의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 세력은 본질적으로 친일-지주 세력이면서 '민족자본'을 표방해 왔다. 온건한 친일파라 할 수 있는 이 세력을 건준에 포용함으로써 건국사업의 기반을 넓히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그룹은 건준 참여를 거부하고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만들었다. 김병로, 원세훈 등 명망 높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때 한민당에 참여한 것은 한민당을 민족주의 노선으로 이끌어가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1년 후 한민당을 장악하고 있던 동아일보 그룹이 좌우합작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자 민족주의자들이 떠나고 한민당은 지주당(地主黨)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1946년 10월 한 달 동안 한민당 중앙위원 150명 중 80명이 탈당했다.
한편 우익에게 외면받은 건준은 좌익 천지가 되었다. 박헌영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해서 건준을 장악하자 부위원장 안재홍은 사퇴하고 여운형 위원장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군 진주 직전에 일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창당 준비 중이던 한민당은 준비위원회 명의로 인민공화국을 거칠게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좌우대립을 지향하는 노선을 예고했다.
친일파 집단과 일본인들 사이에 당시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집단과 미군정, 3자 사이에 상당한 교감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던 일 한 가지가 짐작을 도와준다. 1945년 8-9월간의 엄청난 화폐 증발(增發)이다.
일본 항복 직전 조선은행권 통화량은 약 50억 원이었다. 그런데 9월 26일까지 6주일 동안 약 35억 원을 더 찍었다. 원래 조선은행권은 일본에서 인쇄해 들여왔는데, 이때는 서울의 몇 곳 민간 인쇄소까지 징발해 고액권을 마구 찍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서둘러 찍는 바람에 인쇄 품질도 나빠서 당시 상인들은 '붉은 돈'이라 부르며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정이 이 돈에 화폐의 효력을 인정하고 교환을 보장해주었다. (이때 징발된 인쇄소의 하나가 '정판사'로 이름을 바꿨고, 남아있던 지폐 원판 때문에 1946년 5월 '공산당 위폐사건'의 빌미가 된다. 천여만 원의 위폐를 인쇄-유통시켰다는 검찰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거니와,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총독부-미군정의 소행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몇 주일 동안 시장을 통해 유통된 분량이 몇 푼이나 되었겠는가. 조선은행권은 일본에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 대부분이 친일파 집단의 수중에 있었을 것이다. 박흥식은 조선비행기회사 투자에 대한 보상으로 500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친일파 사업가들이 이승만 귀국 후 2000만 원을 헌납한 일, 김구 귀국 후 700만 원을 헌납한 일이 밝혀져 있다. '붉은 돈'의 행방 중 모습이 나타난 빙산의 일각이다.
일본제국의 붕괴로 인한 산업과 경제의 파탄 속에서 통화량의 40%를 특정세력이 현금으로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가 살아날 수 없는 치명적 조건이었다. 그리고 한민당 등 극우세력이 룸펜화된 군중을 동원하고 테러조직을 키우는 데 이 돈이 쓰였으니 정치를 죽이는 무기이기도 했다. 퇴각하는 일본인과 진주하는 미군 사이의 협력과 양해로 이뤄진 이런 조치가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게 만든 중요한 조건의 하나였다.
(이 글은 <방송대신문> 1815~1817호에 3회에 걸쳐 싣는 것을 약간 수정해서 신문사와 필자의 양해로 전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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