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강정, '저항'의 협동조합

[모심과 살림] 미니팜·강정평화상단 협동조합

"니 밥 뭐 싸갖고 왔노? 아이고~ 김밥 한 줄로 싸울 힘이 나겠나!?"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투쟁이 언론에 거듭 알려졌던 2012년 7월, 109번 공사 예정지에서 들은 말이다. 친구들과 지역에 둥지를 틀어볼 요량으로 두어 달에 한 번씩 밀양을 방문하던 참이었지만, 밀양 할매와 할배들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밀양에 가면 잡어로 끓인 어탕에 국수를 말아 들이키고, 밀양을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희희낙락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어르신들은 송전탑 문제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밀양 어르신들의 외로운 외침이 알려졌다. 송전탑 반대를 시작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2012년 1월 16일 고(故) 이치우 어르신이 송전탑 반대를 부르짖으며, 제 몸을 불태웠다. 그때야 밀양 송전탑 문제가 전국에 알려졌다. 송전탑과 핵발전소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뿌리 깊은 사회적 문제가 있다는 것도 그때 인지하게 됐다.

ⓒ프레시안(최형락)

이후 밀양에 들를 때면 방문지가 달라졌다. 송전탑 투쟁이 일어나는 산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언론인도 법조인도 아니기에 아무런 도움도 못됐지만, 그저 어르신들이 있는 곳에 가서 들은바, 겪은바를 끼적였다. 그러던 중 109번 공사 예정지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윙~ 두두두두"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다. 어르신들은 늘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공사장으로 뛰어가는 걸음은 불안했다. 헬기가 전날 굴착기를 실어 산으로 옮겨 놨기 때문이다. 굴착기는 굉음을 내며 땅을 고르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망설임 없이 굴착기로 뛰어들었고, 공사는 잠시 멈췄다. 공사장 인부들에 맞서 고성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한 용역업체 직원은 카메라를 들고 주민들을 채증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필자와 친구들도 카메라로 찍으며 부모에게 일러바치겠다고 협박(?)도 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두 진영은 잠시 휴전했다. 어르신들은 "우리는 도시락 싸왔는데, 너거(너희)는 뭐 먹을 거라도 있나?"라며 인부들의 식사를 물었다. 김밥 한 줄로 버틴다는 말에 "우야겠노"라고 걱정했다. 알고 보니, 어르신들은 인부들과 싸우면서도 자식뻘 되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적도 많았단다.

욕설과 고성이 오가던 현장에서 갑자기 '밥 타령'을 했다. 사실 30대 초반인 필자는 싸움의 대상자를 걱정한 경험이 없다. 어릴 때부터 옆 친구조차 경쟁자라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었고, 누군가를 밀쳐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잠시나마 '연대'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 뒤를 이은 집회에서도 늘 아군과 적을 나누는 익숙함을 더할 뿐이었다.

그런데 밀양 송전탑 투쟁 현장에서는 싸울 때 싸우더라도 상대편을 걱정했다. 이러한 점이 의아했지만, 밀양 할매와 할배들의 '보듬는 마음'에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송전탑 반대 투쟁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한 건 아닐까.

하지만 밀양 어르신들의 '품어주는 마음'은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배신당했다. 2014년 6월 행정대집행은 이를 확인시켜준 참혹한 사건이었다. 어르신들은 공권력에 농락당했지만, 밀양을 지지해주는 연대자들과 계속 함께하고자 재정비했다. 송전탑이 들어선 다른 지역을 둘러보는 것뿐 아니라, 부당한 권력으로 신음하고 있는 평택(쌍용차)·팽목항(세월호)·구미(스타케미컬) 등으로 달려갔다.

더불어 '미니팜 협동조합'을 만들어 밀양 주민과 연대자들을 이어주는 직거래 망을 열었다. 밀양뿐 아니라, 제주해군기지 반대 현장인 강정마을에서도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강정마을 투쟁이 진행될 때 한라봉, 귤, 표고버섯 등을 특판으로 판매하는 유통망을 확대키로 한 것이다.

밀양과 강정마을에서 만들어진 협동조합의 공통점은 '투쟁의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투쟁을 지지해준 연대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기보다 더욱 지속가능한 방식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도 닮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저항에서 시작된 협동조합의 역사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된 지 약 3년가량이 지났다. 지난 3년간 협동조합기본법에 의한 일반협동조합의 수는 크게 증가했다. 2012년 52개에서 시작한 협동조합은 2015년에는 6713개(사회적협동조합은 278개)로, 무려 130배 증가했다(기획재정부, 2015년 4월 기준).

협동조합의 증가는 끝없는 저성장과 일자리 부족의 반동으로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다. 또한 한때의 유행일 수도 있다. 애드보커시(Advocacy)를 주로 하는 비영리단체(NPO)로 활동하고 있던 조직조차 사업화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음에도 협동조합화를 할지 고민할 정도니, 유행이라는 지적도 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존의 먹거리, 육아와 같은 고전적인 주제와 달리 문화, 예술, 환경, 학문 등 영역을 막론한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존 생활·경제에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밀양과 강정마을의 사례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주로 '사회 문제 해결'과 함께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접목돼 조합이 만들어지는데, 두 지역의 협동조합은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 설립됐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기업가 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을 강조하는 사회적기업이나 해외 사례를 부지런히 탐색하는 사회적경제 영역의 여러 조직과 분위기도 다르다. 두 지역은 탈핵운동과 평화운동을 함께한, 그리고 앞으로도 연대할 이들과의 연결고리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즉, '저항'과 '협동조합'이 조화를 이루며 운영되고 있다.

저항과 협동조합이라는 조합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협동조합은 조선인이 만든 물건을 구매해 사용하는 것을 독려하는 소비조합이었다. 최근에 협동조합 붐이 불면서 영국 로치데일(Rochdale Equitable Pioneers Society)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일찍이 1922년에 이미 조선에는 로치데일의 조합 경영 방식 등이 소개돼 실제로 이를 적용하는 조합도 있었다. 1932년 6월 <동아일보>에서 집계한 조선의 협동조합 숫자가 290개였을 만큼 지역 곳곳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이 당시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었다. 1923년 후반 물산장려운동이 침체한 후, 민족주의계열은 기존의 자본축적과 공업발전을 목표로 한 경제운동을 수정하며 대중의 자주경제 수립을 지향하는 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역시 물산장려운동과 같이 자본가층의 재생산조건 개선이라는 성질을 내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6, 경제운동> 169쪽). 또한 1920년대 초기에는 소비조합의 개념과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소비조합운동을 통해 경제난에 대응하고 경제회복을 독려하는 데 역할을 한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어 여러 조직에서 농촌·농민문제 해결을 위한 협동조합에 주목했다.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가 1926년에 결성되었고, 1925년에는 조선농민사(이후 천도교계열로 편입)가 농민공생조합으로 발전해 가장 많은 협동조합을 지역에 만들었다. 또한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현재 YMCA)가 농촌사업을 위해 신용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 세 조직은 농촌의 피폐함을 극복하고 부의 생산, 분배의 영역에 있어 조합을 활용해 사회운동을 펼치려 했다. "조선인의 경제적 향상 도모(협동조합운동사 함상훈)", "경제운동에 주력하여 농민대중의 생활을 안정시킬 것(농민공생조합)", "살기를 위하여 마음을 합하고 물질을 합하여 일하는 것(조선기독교청년회 홍병선)"과 같이 협동조합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 외에도 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는 덴마크식 농촌협동조합을 배우기 위해 덴마크를 직접 방문하는 등 민족 독립과 경제운동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이상촌 건설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협동조합운동은 1934년 이후 쇠퇴했다. 협동조합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지만, 일제의 민간협동조합 탄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일제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조합을 폐쇄해 관제협동조합으로 대체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서 탄생한 협동조합


1934년 이후 세계 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협동조합의 역사도 희미해지는데, 다시 그 모습을 보이는 시기는 1960년이다. 부산에서는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서울에서는 장대익 신부가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 지역에서는 1972년 남한강 재해대책위원회가 구성돼 농촌 협동조합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한살림운동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도 몇몇 협동조합은 부당한 권력과 저항했다. 노동자 교육과 운동을 지원하던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는 1969년 50명의 조합원이 모여 출자금 14000원으로 신용조합을 만들었다. 이후 1972년 신용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정식인가를 받았고, 조합원 수가 1000여 명이 되는 등 확대해갔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일부는 함께 땅을 구입해 주택조합을 시도하기도 했고, 1979년에는 생필품 공동구매조합도 시도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독재정부의 감시와 탄압으로 1976년에 조합이 해산되었다. 그럼에도 일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연대를 지속하기 위해 지역기금 형태로 조합을 꾸리고 있다. 이에 신용이 없어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금고 역할을 하며 지역에 생협·의료생협이 탄생하는 데 출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에 위치한 '논골신협'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서울 금호, 경기 행당·하왕 지역은 1987년 도시빈민운동을 시작으로 지역주민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93년에 시작된 지역 개발 사업으로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철거민 주거권 운동이 벌어졌다. 논골신협은 1994년 '주민협동공동체실현을 위한 금호·행당·하왕 지역기획단'에서 만든 분과 중 경제협동분과가 발전돼 만들어졌다. 지역 주민들은 주거권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1000원, 2000원 등 소액출자를 했고 이후 1997년 정식인가를 받은 신용협동조합이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설립된 신용협동조합이기에 지금까지도 생협, 성동주민회, 논골두레장학회, 평화의 집 등 지역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조합 활동을 꾸리고 있다.

이 밖에 도시빈민운동의 과정에서 탄생한 난곡 희망 의료협동조합(1976년),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부산 및 주요 도시의 양서협동조합(1977년) 등도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불합리하게 소외당하는 이들의 권리를 위해 만들어진 협동조합이다.

다시 저항의 역사가 시작되다


이후 협동조합과 저항이 연결되는 사례는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협동조합 자체가 양적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뿐더러, 1997년 IMF 사태 이후 신용협동조합의 활동도 위축됐다. 대신 협동조합 정체성과 거리가 있는 농협, 수협 등이 성장했다. 사회적경제에 관심이 일면서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 등이 항간에 관심을 끌었지만, 지금처럼 협동조합이 확대되지는 않았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협동조합은 2012년에서 3년간 무려 130배가 증가했다. 이는 2007년에 50개였던 인증 사회적기업이 2015년에 1453개로 29배 증가한 사회적기업과 비교되는 수치이다(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2015년 6월 기준).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협동조합'운동'이 확대될 수 있을지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협동조합의 7원칙인 △민주적 의사결정, △자율과 독립, △협동조합 간의 협동,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등이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익숙해진 현재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먹고살기조차 버거운 한국 현실에서 타자에 대한 공감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협동조합의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나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 제도가 작동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밀양과 강정마을에서 만든 협동조합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의 조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그 첫 번째, 해군기지 건설 반대와 강정평화상단협동조합


푸른 바다, 뽀얀 파도 그리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구럼비 바위는 그 아름다움보다 투쟁 현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1년 절경을 자랑하던 제주올레 7코스와 근처 강정마을은 해군기지 건설로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 구럼비 바위와 어울려 살던 생명들, 마을의 평화가 국가권력과 거대 자본에 의해 파괴될 것이 예상됐다.

결국 강정의 평화는 깨졌고, 공권력이 투입됐다. 공사가 강행되자 전국 각지에서 활동가, 청년, 시민들이 강정마을로 달려왔다. 외부세력으로 매도되기도 하고, 지은 죄 하나 없이 몸뚱이를 강제로 들린 채 연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1년 후, 결국 공사가 강행되었다.

비록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송전탑이 의기양양하게 지역에 들어섰지만 이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김선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언론은 이제 강정마을을 잊고 싶어 한다. 대책도 없는데 떠올리면 불편하기만 하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강정마을은 저기, 저렇게, 있다! 현재진행형의 고통으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 잊고 싶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렇다. 전국에서 강정마을을 책마을로 만들기 위해 '십만대권 프로젝트'도 진행됐고, 시민들이 '통물도서관'도 만들었다. 또한 강정마을의 평화책방에서는 평화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차와 쉴 곳을 마련해주고, 평화공방에서는 공예품도 접할 수 있다.

강정마을에서는 투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그중 하나가 지역 특산물을 상시적, 특판으로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곳을 '강정평화상단'이라고 이름 붙이고 제주도의 귤, 젓갈, 표고버섯, 소금 등을 판매했다. 이 외에도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위한 모금활동을 진행했는데, 기부금법에 위반된다는 벽에 부딪혔다. 이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다 평화상단을 협동조합으로 설립하여 마을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는 것에 의견이 모였다.

강정마을 주민과 활동가 30명은 2013년 8월 언론도 관심을 거둔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강정평화상단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조합원 30명에 1인당 출자금은 10만 원으로 시작했다. 이들은 "후원을 통한 방식이 아닌 마을주민들과 지킴이들이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협동노동을 통해 생명평화마을을 만들어가는 발판을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창립 의의를 밝혔다. 협동조합의 수익은 강정마을을 위해 전액 사용된다.

▲ '강정평화상단 협동조합' 페이스북 갈무리.


두 번째,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투쟁과 미니팜 협동조합-밀양의 친구들


해군기지가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로 밀양에는 송전탑이 꽂혔다. 할매들이 기를 쓰고 투쟁했지만,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으로 경찰이 대거 투입됐고 현장은 무너졌다. 할매들은 "한전(한국전력)놈들은 이기겠는데 공권력은 못 이기겠습디더"라며 그때의 악몽을 말했다.상동면에 사는 87세 김말해 할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한전과 경찰에 맞섰지만, 집 대문을 나서면 765kv 송전탑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담배 한 대를 피워보며 쓰라림을 가라앉히려 하지만 "보고 있으니까 속이 울렁거려서 못 살아. 아이고 문디, 못 살겠다 카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밀양을 살다> 36쪽). 할매는 6.25전쟁, 대동아전쟁 "오만" 전쟁 다 겪어봐도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라고 한다.

밀양에서는 투쟁에 참여하느라 본업인 농사가 뒷전인 된 할매와 할배를 도울 수 있도록, 그리고 연대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대학생 및 청년들의 여름 농활을 밀양에서 하자며 홍보했고, 밀양 곳곳에서 청년들이 먹고 자며 농사일을 거들었다. 또 '밀양 1평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1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로 출자금을 내면, 밀양 땅 1평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받을 수 있는 '꾸러미' 프로젝트다. 이뿐 아니라 '빈집 프로젝트'도 진행해 밀양 어르신들의 집과 땅을 빌려주기도 했다.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공사는 강행됐다. 송전탑 반대 투쟁에 관한 뉴스도 감춘 지 오래다.

하지만 전국의 연대자들은 이곳을 잊지 않고 후원을 이어갔다. 현장에 가지 못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후원금을 보내고 지지를 표했다. "죽을 때까지 저거(송전탑) 안 뽑히면 눈 못 감습니더. 죽어서 영혼이라도 저 철탑을 뽑아서 엿 바꿔 먹을 낍니더"라며 지역에서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밀양에서는 연대자들의 후원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밀양에서도 농사(농산물)를 통한 전국 연대자들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밀양 할매와 연대자가 투쟁 중에 틈틈이 경작한 '인증은 없지만 무농약' 감자가 판매됐다. 또한 감 농사가 풍년이라는 이유로, 한 박스에 5000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특별판매를 진행했다. 감 주문을 맡은 김우창 활동가는 문자가 10초에 하나씩 올 만큼 주문이 쇄도했고 수백 통의 주문 전화를 받았다. 연대자들은 "이렇게 싸게 팔아도 되는 거냐?"는 질문과 함께 꼭 "힘내세요!"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밀양 사람들은 "연대자로부터 밀양이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2014년 7월 '미니팜 협동조합-밀양의 친구들'을 창립했다. 이는 송전탑 반대 싸움을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연대의 장인 것이다. 미니팜 협동조합은 밀양 송전탑 투쟁에 참여한 할매와 할배가 기른 농산물을 판매하고, '밀양장터'도 지속적으로 연다. 그리고 밀양과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곳을 찾아 일손을 도울 수 있도록 연결한다. 주민을 중심으로 78명의 조합원, 지지자 20여 명 가입하며 첫 시작을 열었다.

▲ '미니팜 협동조합-밀양의 친구들' 홈페이지 갈무리.

모두의 협동으로 만드는 역사


밀양과 강정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방'의 사례다. 밀양 송전탑 대책위에 참여하고 있는 이계삼 사무국장은 "선하고 약한 것들은 늘 이렇게 아름다운데 언제나 패배하기만 한다"라고 했다. 거듭된 추방에 대해 철학자 고병권은 "생명의 영역, 삶의 영역이 그만큼 권력의 중요한 통제 대상이자 자본의 중요 상품 형식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에 "다른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 권력과 자본에 대한 중요한 저항"이라고 지적한다.

두 지역에서 만들어진 협동조합은 "다른 형식을 창안"하고 있다. 이들의 조합은 일방적인 후원을 넘어선다. 농수산물 직거래를 통해 연대자와 지역 주민을 연결한 윤리적 소비일 뿐 아니라,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의지이자 실천이다. 이는 탈핵을, 평화와 생명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지역에서 손을 뻗은 것이다. 할매-할배-청년-주민의 손을 잡아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데서 다시 저항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특출한 리더(십)를 강조한다. 기업을 바라보는 측면은 특히 그렇다. 언론에서는 빌 게이츠, 스티븐 잡스에 이어 최근에는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을 뛰어난 경영자로 부각한다. 사회적기업도 의미와 역할을 강조하는 만큼 사회적기업가라는 소수의 리더를 강조한다. 그런데 협동조합은 조금 양상이 다르다. 협동조합 역사를 뒤져보아도 조합의 선구자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말처럼, 협동조합은 보통 사람들이 만드는 역사이다.

특히 협동조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특별히 그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 물건을 사러 온 어느 이름 없는 조합원까지도 모두 협동조합을 위해 나름대로의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로치데일 공정선구자 협동조합 역사와 사람들> 10쪽). '최초의 협동조합'이라 일컫는 로치데일도 특별한 영웅이 아닌 함께 고민한 이들이 만든 새로운 세상이다. 즉, 변화는 "특정한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서 산업화시기에 걸친 협동조합 저항의 역사는 다시 변주되고 있다.

강정마을과 밀양의 목소리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제주해군기지 공사는 불법적으로 강행되고 벌금폭탄과 집행유예선고는 계속 떨어지지만 강정주민과 지킴이들은 마을을 끝까지 지키고자 합니다. 힘겹고 지난한 투쟁이 계속되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연대해 주십시오."(강정평화상단협동조합 홈페이지)


"우린 끝까지 싸울 거예요. 우리를 응원해주는 연대자들을 위해서 송전탑 뽑을 때까지 싸워야죠. 또 정부가 잘못된 행동을 하니까 이렇게 막는 거고, 끝까지 할 겁니다."(동화전마을 권귀영) 강정평화상단협동조합 강정마을에서 재배한 감귤, 한라봉, 천혜향 등 농산물이 준비되어 있다. 제주 고등어, 제주 은갈치, 제주 흑돼지 등 축산물도 준비되어 있으며, 전국여성농민회 언니네 텃밭(서귀포 공동체)의 마을고추장, 햇감자 등 꾸러미도 준비되어 있다.


문자주문: 010-6286-2131 메일주문: savejeju@daum.net

미니팜 협동조합 - 밀양의 친구들

밀양 주민들이 경작하고 만든 제철 채소와 과일, 장류, 장아찌류 등이 있다. 1만 원 이상의 출자금을 납입한 후, 대책위 전화로 집 주소와 이메일 주소를 전달하면 된다.(정기적으로 밀양 소식과 농산물 정보 등 제공) 문의: 010-5544-5109

출자금 납입계좌 : 농협 351 0737 8743 83 미니팜협동조합

참고문헌

- <눈물 속에서 자라난 평화>(강정마을회 지음, 단비 펴냄)
- <살아가겠다>(고병권 지음, 삶창 펴냄)
- <밀양을 살다>(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오월의봄 펴냄)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6. 경제운동>(오미일 지음,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펴냄)
- <한국 생활협동조합운동의 기원과 전개>((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엮음, 푸른나무 펴냄)
-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협동조합 역사와 사람들>(조지 제이콥 홀리요크 지음, 그물코 펴냄)
- 계간지 <기억과 전망> 통권8호 중 "잃어버린 진실: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 1 - 부산양협운동의 전말"(차성환)

* 그 외에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과 관련된 다수의 기사 및 현장의 목소리를 참고했습니다.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가 발행하는 생명 운동 이론지 <모심과 살림> 5호(2015년 여름)에 실린 글을 재편집했습니다.
(☞바로 가기 : 모심과살림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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