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피크제, 디테일에 악마가 숨어 있다

[노동 시장 구조 개혁 뜯어 보기 ①] 임금 피크제

일명, 노동 시장 구조 개혁 논란이 뜨겁습니다. 정부-여당은 '개혁' '선진화' 등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반면 야당과 노동계는 '개악' '구조 조정'이라며 반발하고 있고요. 임금 피크제,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 임금 체계 개편, 일반 해고, 노동 시장 이중구조, 기간제 기한 연장 등 알 듯 모를 듯 용어들이 쏟아지다 보니 누구 말이 맞나 알쏭달쏭합니다.

자, 그래서 하나씩 쉬운 말로 풀어서 정부-여당의 시장 개편안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3가지, △ 임금 피크제와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 △ 일반 해고 요건 완화와 가이드라인 논란 △ 기간제 사용 기한 연장 및 파견 허용 업종 확대를 하나씩 뜯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 남의 일이 아닙니다. 당장에 독자 여러분의 일자리와 미래에 직결되는 정책들입니다.

임금 피크제, 청년 일자리 창출에 기여?

이미 몇 회사에서는 시행 중인 임금 피크제. 말 그대로 최고점(피크) 급여 시점을 정해 놓고, 피크 도달 이후에는 그보다 단계적으로 낮아지는 급여를 받는 임금 제도를 말합니다. 정부-여당은 청년 실업 수준이 심각한 만큼, 중·장년층의 급여를 깎아 새 일자리를 만들자며 임금 피크제 도입 사업장을 늘리려고 하고 있죠.

2003년 국내에 처음 도입된 이래로 임금 피크제는 늘 논란, 연구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난히 이 제도가 부각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정년 60세 법'이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고령화 사회 대비책으로 2013년, 국회는 '고용상 연령 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습니다. 정년 60세가 권고 사안이 아니라 의무 사안이 된 것입니다.

기업들은 불만이 많습니다. 고령화 사회는 돌이킬 수 없으니 정년 60세 법 자체를 반대하긴 어려웠죠. 대신 재계는 임금 비용을 줄이기 위한 다른 수단도 의무화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연공급에서 성과급 중심 체계로의 임금 개편, 그리고 임금 피크제가 그것들입니다.

이 가운데 성과급 중심으로의 임금 체계 개편에 대해선 정부가 이미 재계 의견을 받아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3월 고용노동부가 '합리적 임금 체계 개편 매뉴얼'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죠. 이는 일단 다른 기사(☞관련 기사 : 합리적 임금 체계 매뉴얼? "기업 위한 임금 '개악' 참고서")로 설명을 넘기고, 이 기사에선 임금 피크제만 들여다보겠습니다.

부풀려진 통계, 그럴싸한 이론만 '너울너울'

따져 봐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 정도겠습니다. 1) 정부-여당-재계의 주장대로 정말 임금 피크제로 청년 일자리가 늘어날까요? 2) 법상으로 임금 피크제 도입 여부는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하는데, 법을 뜯어고치지 않고 어떻게 이 제도를 널리 널리 퍼뜨리겠다는 걸까요.

우선 올해 재계가 임금 피크제 도입을 외치며 내놓은 통계들을 보겠습니다.

"임금 피크제 도입으로 발생하는 재원으로 2016~2019년 사이에 18만 개의 청년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2015년 4월)

"정년 연장으로 2016~2020년 기업이 추가 부담해야 할 인건비 부담액이 107조 원으로 추정된다. 모든 기업에 임금 피크제를 도입할 경우 같은 기간에 26조 원이 절감돼 29세 이하 정규직 31만 명을 채용할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2015년 6월)

4~5년 사이 18만 개, 31만 명. 뭔가 거대해 보이는 숫자입니다. '저 중에 혹 내 일자리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하지만 이 통계들엔 맹점이 있습니다. 국회 입법 자문 기구인 입법조사처가 지난달 29일 이 통계들을 반박한 따끈따끈한 자료를 내놓았죠. 여러 맹점을 지적했지만 한 가지만 소개합니다.

재계의 위 통계들은 모두, 모든 노동자가 법대로 60세까지 일할 것을 가정하고 있다고 입법조사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보다 일찌감치 일터에서 밀려나죠.

전 고용노동부 장관인 방하남 등이 2010년 쓴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근로 생애 연구>를 보면, 우리나라 노동자 가운데 정년 이전에 조기 퇴직하는 노동자는 67.1%에 이릅니다. 남성은 평균 55세, 여성은 평균 51세에 좋건 싫건 직장을 떠납니다. 18만 개, 107조 원, 31만 명…. 이런 재계의 통계는 꽤 크게 부풀려져 있는 셈이죠.

아낀 돈을 신규 일자리 창출에 쓰겠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임금 피크제로 급여 부담을 줄였다고 합시다. 재계 주장대로 26조 원이 2020년까지 절감된다고 하더라도, 이 돈이 신규 일자리 창출에 쓰인다는 것은 어떻게 보장하죠? 기업의 선한 의지를 믿으면 되는 걸까요?

임금 피크제로 절감된 돈을 이를테면 '고용 창출 기금'으로 묶거나, 또는 절감액의 적어도 몇 퍼센트는 반드시 일자리 창출에 써야 한다는 법상 의무를 만드는 등의 대안이 함께 마련돼 있냐고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부풀려진 통계와 그럴싸한 이론만 너울대는 중입니다.

혹시 몰라 전문가들에게도 전화를 돌려 물어봤습니다. '해외에서 임금 피크제를 하면서 일자리 창출을 담보할 수 있도록 제도가 설계된 적이 있나요?'란 질문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전직 노사정위원회 위원이자 노동 정책 전문가가 대답했습니다.

"임금피크제로 구글에 검색 돌려봐. 모든 유알엘(url·주소)이 다 'kr(한국 인터넷 페이지임을 알리는 주소의 마지막 부분)'일 테니까."

여기서 남겼으면 하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거대한 숫자들과 그럴싸해 보이는 통계에 속지 마세요.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사실 임금 피크제가 줄기차게 논의됐던 2013년에도 실제 일자리 창출과의 연관성을 따지는 연구 결과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지만 그 가운데 효과가 있다는 연구는 재계 것 말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제도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로 임금 피크제는 기본적으로 '세대 갈등론'을 숙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령·장년층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려고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식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논리는 곧바로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죠. 임금 피크제를 포함한 노동 시장 구조 개편 정책이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관련 기사 : [이철희의 정치시평] 왜 하필 지금 '노동 개혁'일까?)

▲ 지난 5월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임금 체계 개편과 취업 규칙 변경 공청회'에서 노동계 관계자들이 '노동 시장 구조 개악' 중단을 요구하며 단상을 점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취업 규칙 변경은 막 해도 된다?

두 번째 쟁점입니다. 현행법상 임금 피크제는 노사 자율에 따라 도입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 임금·단체 협상을 하고, 없는 경우 취업 규칙에 관련 조항을 바꿀지 말지를 노동자들과 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여당은 이런 법을 바꾸지 않고도 임금 피크제의 일방적 도입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요?

자, 우선 나의 '취업 규칙'을 본 일이 있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세요.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10명이 넘는데, 취업 규칙이 없다면 '불법'입니다. 인사 규정, 복무 규정, 연봉 규정, 보수 규정 등도 취업 규칙에 속합니다. "취업 규칙이 왜 필요해? 근로기준법 다 따르고 있어!"라고 사장님이 말하면 익명의 이메일을 보내서 알려주세요. 근로기준법은 '최저선'을 정해놨을 뿐입니다.

취업 규칙은 말 그대로 회사 법입니다. 이걸 바꾸어야 임금 피크제 도입이 가능하죠. 취업 규칙을 바꾸기 위해선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이 동의 서류를 노동청에 제출해야 취업 규칙이 합법적으로 개정됩니다. 노조가 있다면 교섭을 통해 임금·단체 협상을 고치는 방법으로 일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정부-여당이 이런 종전의 룰을 모두 깨부시는 놀라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판례 몇 개를 내세우며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 있는 취업 규칙의 변경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과반 동의 없이 변경할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을 시장에 뿌리겠다는 게 정부-여당의 계획입니다.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라니요. 그건 대체 누가 정하는 거죠? (☞관련 기사 :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 사례 속출…"노동부가 공범")

노동 정책, 노동법 전문가들은 이런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 시도에 입을 '떡' 벌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죠. 백번 양보하더라도, 사장님이 임금 피크제와 관련한 부분의 취업 규칙 조항만 바꿀 거라고 어떻게 믿나요. 해고 규정도 마구 바꾼다면요? 노동조합을 교묘히 탄압할 무시무시한 징계 조항들이 생긴다면요.

이미 불법과 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이런 취업 규칙 변경 사례는 넘쳐납니다. 이마트 노조 사찰로 악명을 떨쳤던 신세계그룹은 재작년 전사에 "취업 규칙을 바꿔 노조를 차단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내려보내기도 했습니다. 감시·감독의 사각지대인 중소·영세 사업장에선 사장님이 노동자들을 한 명 한 명 불러 동의를 종용하기도 하죠. 이제 이런 불법들이 '깔끔하게(?)' 합법화 될지도 모릅니다. (☞관련 기사 : 신세계그룹 "취업 규칙 바꿔 노조 차단하라" 지시)

'모법 위반' 판결 나올 게 뻔한데…전문가들 '갸우뚱'

무엇보다 가장 전문가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 있는 점은, 정부의 이런 시도가 훗날엔 '불법'으로 결론 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나 행정 입법을 통해 이러한 취업 규칙 변경책을 각 사업장에 내려보내려고 합니다. 이는 모법인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에는 묵묵부답이고요.

우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이미 지난 '통상 임금' 논란 때 다 겪었습니다. 추가 근무 수당인 기준 임금에 정기 상여금이 포함되느냐 안 되느냐를 두고 한국 사회는 무려 25년 동안 논쟁을 벌였습니다. 노동부가 1988년 정기 상여금은 통상 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제멋대로 법을 해석해 행정 지침을 내린 까닭이죠.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작년 12월, '아닌데? 따져보니 포함되는데?'란 취지의 판결을 내렸고 이후 엄청난 후폭풍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받아야 마땅했던 수당을 노동부 때문에 25년간 못 받아 왔던 것이 확인된 것이니까요. 고용노동부에서 일하는 한 공무원은 그래서 "정부가 통상 임금 논란에서 얻은 교훈이 하나도 없는 거죠"라고 답답해했습니다.

이렇듯 임금 피크제 논란 뒤에는 '취업 규칙 막 바꾸기' 노림수가 숨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노동계 전문가는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 가이드라인이 정부-여당의 개편 정책에서 빠지지 않으면 노-사-정 대타협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여러분도 임금 피크제와 함께 취업 규칙 논란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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