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소녀 사기극, '미친X'은 없다

[정희준의 어퍼컷] 천재 소녀 사기극의 진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동네 어느 집 자식의 대학 입학을 '경축'하는 현수막을 본다. 실제로 보면 살짝 웃음이 나온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라는 부산에서도 본 적이 있다. 한 서울 소재 대학이었다. 축하해 줄 일이다. 그러나 좀 촌스럽다. 무엇보다 자랑도 유분수다. 아무리 자식 자랑이지만 길거리에 내걸어 광고하는 것은 경박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촌스럽고 경박한 일이 서울에서 벌어졌다. 어느 집 딸이 미국 대학에 입학한다고 하니 현수막 정도가 아니라 모든 신문에 보도가 되고 심지어 텔레비전 뉴스에 큼직한 얼굴과 함께 등장한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집안의 자식인데도 온 나라가 뭔 축하를 그렇게 해대는지 신기하다. "자랑스럽다"에 뜨악했는데 "고맙다"에는 내 턱이 떨어질 지경이다.

아이 대학 간 게 전국 뉴스?

미국 하버드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에 동시에 합격했다는 한 아이의 거짓말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이른바 '천재 소녀' 파문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 희대의 촌극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한 고등학생의 철없는 욕망이 단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대학 진학에 열광하고 이를 찬양하는 언론과 한국 사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웃다가 자빠질 수준이었다. 결론부터 말해 욕먹을 건 그 아이가 아니라 언론과 어른들이다. 또 그 원인은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의 주체 못하는 허영심과 천박한 과시 욕망, 그리고 미국에 대한 의존을 넘어 종속을 갈망하는 우리의 내면을 드러낸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우선 이 사건(?)은 지금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촌극이다. 고등학생이 대학 갔다는 이 뉴스가 왜 이렇게 커졌을까. 우선 기사를 쓰는데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것도 베껴서 쓰는 한국 언론의 특기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된 덕이다. 교육 컨설팅(브로커의 또 다른 이름?)을 겸업하는 필자가 확인도 않고 쓴 기사를 국내 거의 모든 언론이 베껴 쓰는 바람에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카운티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 엉뚱하게도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게 된 것이다.

이 코미디 같은 사건이 커진 이유는 또 있다. 천재 소녀 기사는 바로 기자들의 꿈이자 그 꿈이 현실이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유력 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을 했던 아버지가 딸을 미국에 남기고 자신은 기러기 생활을 한 끝에 딸이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입학하고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가 만나자고 애원하는 인물이 된 스토리는 국민들이 관심을 갖기 이전에 기자들의 관심을 가로챘을 것이다. 이 뉴스를 본 기자들은 자기 자녀를 이 뉴스에 대입시키지 않았을까? 특파원이 안 되면 미국 연수라도 빨리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JTBC

좌파조차 흠모하는 미국

천재 소녀 기사는 기자들이나 서울의 '있는 집' 사람들의 꿈일 뿐이다. 다시 말해 절대 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겐 그저 딴 동네의 일이고 남의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뉴스가 들불처럼 번진 이유는 미국에 대한 의존이 내면화되면서 동시에 생성된 열등감 또는 콤플렉스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자랑스럽다"에 더해 "고맙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맥락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강남 스타일로 미국에서 성공한 싸이와 미국 개봉 영화를 제작한 심형래를 마치 우상처럼 숭배했던 우리들의 모습에서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의 정서가 드러났다. 한편, 얼마 전 흉기로 공격당한 리퍼트 미국 대사의 쾌유를 비는 열정적인 행사나 2007년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가 총으로 32명을 살해하자 당시 주미 한국 대사가 "한국과 한국인을 대신해 유감과 사죄를 표한다"고 나서더니 급기야 희생자 수만큼 "32일간 릴레이 단식을 하자"고 했던 제안을 보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한국인들의 불안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리영희는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주인과 머슴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미국에 대한 의존과 종속이 내면화된 한국 사회에서 미국의 명문 대학에 '동시 합격'하고 저커버그로부터 인정받은 한국인 고교생의 등장은 어딘가 가슴 뜨거워지고 자부심을 느끼게 할 요인을 담고 있다.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사랑은 기득권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을 비판하는 진보 진영도 매한가지다.

지난 6월 26일,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이 동성의 결혼을 합법화한 날이다. 그런데 이 날은 한국에서도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 간 결혼을 지지해온 진보 진영은 정말 나의 일처럼 기뻐했고 인터넷은 순식간에 무지갯빛으로 가득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환영하긴 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환영하는 게 어딘가 생뚱맞았다. 미국의 동성 결혼 합법화가 세계 최초라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의 20개 국가가 이미 합법화한 상태였다. 그 20개 국가가 합법화 했을 땐 아무 반응이 없더니 미국에서 합법화를 하니까 난리다. 미국의 동성 결혼 합법화를 경축해 마지않았던 그들 중엔 평소 반미를 외쳤던 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그 아이와 한국 사회, 어디가 비정상일까

모든 게 거짓으로 판명된 이후 언론도 우리도 민망했던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보를 대서특필한 언론도 많던데 사과나 자성의 목소리를 낸 언론사가 있나싶다. 여론도 그 아이를 욕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사실 그 아이는 부모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서 자신의 꿈을 보다 정교하게 연출했을 뿐이지 남들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그 아이를 욕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시쳇말로 쪽 팔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창피하고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실제로 피해를 입힌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호들갑스럽게 칭송했기에 비난도 거국적이었고 더 적극적으로 했다. 그 아이는 어느새 사기꾼, 미친×이 되어 있었다.

욕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언론은 역시 똑똑했다. 이 희대의 촌극을 그 아이의 책임으로 돌려야 했다. 그 아이를 제정신이 아닌 아이로 만들어야 했다. 그 아이를 '비정상'으로 만들어야 우리가 '정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를 공식화하기 위해 그 아이를 질병을 앓는 환자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리플리 증후군'이 등장한다.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고 이에 근거해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게 한 언론이 이 아이에게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정신장애 이름표를 가져다 붙이자 다른 언론들이 또 베껴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질환(?)을 앓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결국 이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을 앓고 있고 치료가 필요한 아이로 공식화된다.

그런데 언론 인터뷰에 응한 정신과 전공의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리플리 증후군은 정신과적 정식 병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고 추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증후군도 현대 사회 의료 산업이 만들어낸 질병이다. 즉,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 비정상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질병화'하려는 의료 산업의 욕심일 뿐이다. 결국 우리 언론은 사과와 반성은 하지 않고 그 아이를 이상한 아이로 만들고선 자신은 쏙 빠져나가는 것으로 자신의 쪽팔림을 해결했다.

아이들은 꿈을 꾼다

아이들은 꿈을 꾼다. 그런데 꿈이라는 게 묘해서 그걸 말로 하면 때론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하지 않는가.) 아이들의 거짓말이란 사실은 아이들의 욕망이고 때론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꿈과 거짓말은 구분이 쉽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꿈이 거짓말이고 거짓말이 사실은 꿈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면서 큰다. 어릴 때 거짓말 안 해 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라. 아이들만 하나. 어른 돼서 거짓말 안 해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라. 사기꾼도 모조리 다 어른 아닌가.

그 아이에게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 입학은 꿈이었다. 욕망이자 결핍이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꿈을 한 편의 동화로 만들었다. 백마 탄 왕자가 공주를 구하러 오는 그런 구닥다리 동화가 아니다. 직업이 뭔지도 모르는 왕자, 취업도 못하는 공주는 필요 없다. 그 소녀가 선택한 왕자는 바로 페이스북의 CEO 저커버그였다. 소녀는 저커버그가 자신에게 만나달라고 애원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 왕자님이 최고의 직장이라는 페이스북 취업을 약속하는 것으로) 자신의 동화를 마무리 짓는다. 사실 이 꿈은 부모님의 기대와 억눌림에 학대받았던 아이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꿈이다.

나는 이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버지가 사과문에서 아픈 아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그래서 앞으로 치료에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 아이가 '치료'가 필요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 부모와 우리 사회다.

내가 고등학교 때 교회를 함께 다니던 한 여고생이 아프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아파서 다리를 잘라야 한단다. 언제? 크리스마스 아침에. 온 교인이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수술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빨'이 먹힌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다 거짓말이었다. 한때 사라졌던 그 아이는 잘 커서 지금 사회에 기여하는 성인이 되었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아무 해를 끼친 게 없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아오던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아이다. 이번 사건은 한국의 어른들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스스로 자가발전해서 호들갑 떨며 찬양하다가 한 아이의 거짓말로 드러나자 그 아이에게 화풀이하며 욕을 해댔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치료가 필요한 건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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