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죽이고 쿠데타? 암살 음모 사건의 진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00> 조봉암과 진보당, 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조봉암은 1952년 대선에서 2위를 기록하며 정치적 위상을 높인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에 더 큰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대선 이후 조봉암은 어떤 상황을 맞이하나.

서중석 :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 이후 조봉암은 계속해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조봉암 주위에는 죽음의 신, 사신(死神)이 어른거린다고 했는데 1953년에는 김성주 사건이 나게 된다. 1952년 선거에서 김성주는 선거 사무차장이었는데 1953년 6월 원용덕이 사령관이던 헌병 총사령부에 연행됐다.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됐는데 걸려든 명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조봉암 등과 사회민주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정치 제도로는 구미식을 택하나 경제적으로는 자유 경제 체제를 버리고 계획 경제를 수립하려 한 것이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한 집단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민주당 추진위원회란 단체가 구성됐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두 번째 죄목은 더 터무니없는 것인데, 1952년 8.15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대통령을 살해할 것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헌병 총사령부에서는 계속 새로운 사실을 만들기 위해 김성주를 고문했다. 그런데 고등군법회의 판결 선고일(1954년 5월 6일)에 이상하게 김성주가 출두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계속해서 조사하고 알아보고 그랬는데,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판결 선고일 전에 헌병 총사령부의 김진호 중령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김성주를 헌병 총사령부 취조실로 끌고 가 고문을 했는데 그때 김성주가 고문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헌병 총사령부는 이 사실을 숨기고 암매장까지 했고 국방부는 "김성주에게 사형을 언도했다"는 발표만 한 것이다.

조봉암을 겨냥한 거듭된 조작, 김성주 사건과 동해안 반란 사건

프레시안 : 참 무서운 세상이었다. 1951년 말 조봉암의 측근이던 이영근 등이 대남 간첩단 사건에 휘말렸는데, 그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김성주 사건이 터졌다. 김성주가 서북청년회의 주요 간부로서 극우 반공 활동에 앞장선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시기에 조봉암과 함께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 짐작이 간다.

서중석 : 서북청년회 부회장이었던 김성주가 이렇게 고문으로 죽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8.5 정부통령 선거이지만, 이승만과 왜 멀어지게 됐는가 하는 것을 길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 것은 한국전쟁 시기에 유엔군이 북한으로 진격할 때 상황과 관련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관할권이 대한민국에 있다고 하면서 평남지사를 임명했지만, 유엔군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엔군은 평남지사 대리로 김성주를 임명했다. 그것 때문에 김성주는 찍혔다고 할까, 그런 상황이었는데 조봉암 선거 사무차장까지 맡으면서 결국 헌병 총사령부에 그렇게 끌려간 것이다.

김성주 사건은 1960년 4월혁명 이후 아주 크게 문제가 된다. 그러면서 사건 당시 헌병 총사령관이던 원용덕과 김진호 중령, 또 서북청년회 부회장이었고 이 사건이 났을 때 내무부 치안국장이던 문봉제 이런 사람들이 김성주 가족에게 고발을 당했다. 그 후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는 원용덕과 김진호에게 각각 15년형을 선고했다. (원용덕은 복역 중 박정희 정권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 1968년 세상을 떠난다.)

프레시안 : 4월혁명 이전에는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김성주를 죽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나?

서중석 : 그렇지 않다. 자유당 정권 때 이미 국회에서 김성주 사건 조사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진다.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1955년 1월 김성주의 가족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한다. 그해 3월 국회 본회의에서 김성주 사건 진상 조사를 결의한다. 그에 따라 구성된 특별조사위원회는 같은 해 10월 20일 국회에 조사 결과를 보고한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김성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김진호 중령을 즉시 파면하고 법에 따라 처단해야 하며, 원용덕 중장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등의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프레시안 : 사건 내용이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는데도 이승만 정권 때는 가해자들이 멀쩡했다가 4월혁명 이후에야 처벌을 받게 됐다는 것인가?

서중석 : 그렇다. 어떻게 하지를 못하다가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조봉암을 겨냥한 사건 조작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조봉암을 해하려는 조작 사건은 1955년경 또 발생한다. 동해안 반란 사건이라는 것인데, 김준연이 조봉암을 서면으로 고발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핵심은 속초에 있던 제1군단에 이 대통령이 시찰을 나오면 이 대통령을 죽이고 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봉암을 군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건데,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었다. 이 사건으로 한때 시끄러웠다.

▲ 죽산 조봉암. ⓒKBS 화면 갈무리


북진 통일론을 비판하고 보도연맹원 문제를 적시한 '우리의 당면 과업'

프레시안 : 그처럼 자신을 위협하는 조작 사건이 거듭 일어나는 속에서도 조봉암은 1954년 정치 활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을 발표한다. 총선이 있던 해라는 점과도 무관치 않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이 시기 조봉암의 노선을 종합한 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조봉암은 1954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각오, 다짐을 하는데 그게 바로 그해 3월에 발표된 '우리의 당면 과업'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당면 과업'은 직접적으로는 4월 26일 제네바에서 한국 통일 문제를 다루는 국제 회의가 열리는 것에 맞춰 통일 문제에 큰 비중을 뒀지만, 전반적으로는 5월에 실시될 총선거에 대한 포부를 담은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조봉암은 이 글에서 북진 통일론을 통렬히 비판하지만 아직 평화 통일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다만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북진 통일 같은 주장으로는 한국 문제가 풀릴 수 없다', 이런 주장을 계속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산당에 정치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주 세력이 표면으로 모조리 대두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진보 세력이나 비판 세력을 반국가적 세력, 반정부 분자로 몰아치는 것을 지양하고 김구, 김규식과 활동을 같이한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국민보도연맹원 생존자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숙청된 족청계 등도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말로 하면 '혁신계가 대두하는 것을 막지 마라', 이것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어떤 정치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포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보도연맹원 문제를 직접 언급한 게 특히 눈에 들어온다. 1987년 6월항쟁 이전 한국의 정치가들 중 이처럼 보도연맹원 문제를 분명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조봉암 이외에 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조봉암은 1954년 5.20선거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우리의 당면 과업'을 발표하며 포부를 밝혔지만, 얼마 후 조봉암 자신이 아예 총선에 출마조차 할 수 없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5.20선거는 우리나라 선거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선거로 꼽히는데, 조봉암은 아예 출마 자체가 봉쇄됐다. 자신의 출신구인 인천을구에 입후보 등록 서류를 내려고 했는데 탈취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자신이 지지를 받고 있던 부산, 그리고 자유당 제2인자인 이기붕이 입후보할 서대문을구 이쪽으로 서류를 내보자고 해서 두 군데에다 등록을 시도했다. 그러나 전부 등록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타의에 의해 이제는 국회의원도 될 수 없는 처지로 떨어진 것이다.

5.20선거는 1952년 8.5선거와 함께 부정 선거로 악명이 높다. 경찰의 곤봉이 선거 결과를 결정했다고 해서 곤봉 선거로 불리기도 하고, 경찰 선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승만 정권 쪽에서는 몇 명은 반드시 떨어뜨리려고 했다.

"나한테 이런 횡포가 가해졌으니 다른 후보들은…", 실력자 허정의 개탄

프레시안 : 그렇게 떨어뜨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로 누구누구를 꼽을 수 있나.

서중석 : 우선 조봉암하고 신익희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 두 사람은 못 나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신익희가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는데, 이 지역구를 같이한 자가 그 유명한 최인규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지휘한 내무부 장관 바로 그 사람이다. 신익희가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임무가 최인규한테 주어졌다고 최인규 글에 나온다. 그런데 최인규가 '여론 조사나 한 번 해보자. 그냥 신익희를 밀어붙여서 못 나오게 하는 것보다는 여론 조사 결과를 보고 결정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여론 조사를 했다. 그랬더니만 최인규가 훨씬 유리한 것으로 나왔다고 최인규 글에 쓰여 있다. 그래서 신익희를 못 나오게 하려고 경찰을 동원해 애쓸 것 없이 그냥 나오게 해도 되겠다고 했는데, 그 여론 조사에 응한 사람들이 그야말로 최인규를 속인 것이다. 압도적으로 신익희가 당선됐다. 신익희는 이런 과정을 거쳐 다시 국회의원이 됐다.

(이승만 정권 시기의 내막을 파헤친 '비화 제1공화국'을 연재한 <동아일보> 1973년 12월 20일 자는 5.20선거 당시 광주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자유당은 투표 3일 전에 각 투표구별로 유권자를 모아놓고 경찰이 최인규에게 투표하는 훈련을 시킨 다음 모의 투표를 실시, 최 후보가 당선되자 자축연까지 베푼 일이 있다. 그러나 막상 선거 결과는 신익희 후보의 승리였다.")

그리고 원내 자유당으로서 이승만을 몹시 괴롭혔다고 자유당 측에서 생각한 오위영의 경우 울산에 입후보하는 걸 봉쇄했다. 오위영은 결국 중도에 포기했다. 이렇게 도처에서 경찰한테 선거가 엉망이 됐는데, 허정 회고록을 보면 허정이 이 선거에서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가 하는 것이 생생하게 나온다.

프레시안 : 허정은 이 선거에서 어떤 일을 당했나.

서중석 : 허정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에겐 4월혁명 후 과도 정부 수반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지만, 이 양반은 도미 유학을 할 때 이승만 직계로 활동했고 해방 후 정부 수립을 했을 때 이승만 정권의 양대 세력 중 하나라고 했다. 팔판동 세력이라고도 불렸는데, 뭐냐 하면 한쪽은 국무총리 이범석 쪽으로 형성된 권력, 또 하나는 허정을 중심으로 신성모 등이 집결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힘이 세다고 불린 사람이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직전 장면이 해외에 나가 있을 때 허정은 국무총리 서리도 지냈다.

그런 위치에 있던 사람인데, 5.20선거에서 부산에 출마를 했더니만 법무부 장관이 당선을 저지하려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경남경찰국장으로서 악명이 높던 김종원이 직접 형사대를 진두지휘해 선거 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허정이 정견 발표를 하면, 경찰은 트럭에 정체불명의 청년들을 가득 태우고 와서 청중을 위협해 쫓아버리고 텐트 기둥을 뽑아버렸다. 이들의 행패에 맞선 허정의 운전수는 허정 앞에서 뭇매를 맞고 유혈이 낭자한 상태로 쓰러졌다. 이 괴청년들은 허정 선거 사무소 간판도 다 부수고 기물도 부쉈다. 그러면서 선거 사무소 건물 주인을 위협해 허정 쪽에서 사무실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허정은 선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투표일을 며칠 앞두고 선거 운동원 중 몸이 아픈 사람이 경찰에 며칠간 연행돼 있다가 집에 돌아온 다음 날 죽었다. 그렇게 되니까 사건이 커졌고, 허정으로서도 운동원까지 이렇게 죽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겼다.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고, 또 실제로 선거 운동을 할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경찰이 그렇게까지 선거를 방해하고 운동을 봉쇄해버리니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 않았겠나. 그래서 선거 포기를 결심하고, 자신을 아껴주는 유권자들에게 그 경위라도 알리려고 전단을 2만 장가량 만들었다. 그랬더니만 이 전단마저 김종원이 직접 지휘하는 형사대가 압수해버렸다.

당시 허정은 정말 암담하고 절망적인 심정이라고 썼다. 이 대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허정 회고록에 있는데, 내가 이 부분을 인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이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운 나에게 이런 횡포가 가해졌으니 다른 후보들은 어떤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을 것인가.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정말 누구의 가슴이건 절절하게 울릴 것이다. 허정 같은 실력자조차 이승만 정권한테 이렇게 당하는 상태인데 다른 사람들, 특히 야당 후보건 무소속 후보건 얼마나 심하게 이 선거 때 당했겠는가.


개헌 조건부 입후보 강조한 이승만, 친일파에 대해서도 괴이한 담화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이때 왜 그렇게까지 한 것인가.

서중석 : 왜 5.20총선이 이렇게 중요하게 됐느냐. 그 이유는 간단하다. 1967년 총선이 3.15 부정 선거에 버금가는 사상 유례없는 추악한 부정 선거, 망국 선거라는 비난을 받게 된 이유와 똑같다. 박정희는 1967년 6.8 부정 선거를 통해 3선 개헌에 필요한 의원 다수를 확보하려 했다. 똑같은 이유로 이승만은 영구 집권을 하기 위한 개헌에 필요한 정족수, 즉 국회의원의 3분의 2를 장악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허정마저 내쳤던 것이다.

이 선거에서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당 공천이라는 게 있었다. 그전에는 같은 당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명이 후보로 나오고 그랬는데,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공천제가 실시됐다. 공천제를 실시한 이유가 자유당 쪽으로서는 아주 명백했다. 뭐냐 하면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에서도 '개헌 문제 가지고 공천을 바터(barter)하고 있다'고 크게 보도하고 했지만 아예 대통령이 4월 6일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 이렇게 담화를 발표했다. 개헌을 지지하는 사람에게만 공천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천제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때 신문에 난 걸 보면 이런 서약서를 받았다고 돼 있다. "일, 본당 총재 각하의 지시와 당 정책에 절대로 복종할 것. 일, 민의원이 된 후에는 민의에 의한 개헌의 당 결정을 절대로 지지할 것." 이 서약서에 도장을 찍게 하고, 당시 공천 공인증이라고 불렸던 이것을 제수했다고 돼 있다. 그러고는 이 대통령은 '정당 정치에서 무소속은 출마해서는 안 된다', 이런 담화도 발표한다. 다른 단체에서 나오면 안 되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하여튼 이때 자유당 국회의원 확보에 이렇게 애를 썼다.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을 하기 위해 이렇게 공천제를 실시하긴 했지만, 어쨌건 공천제는 정당 제도를 발전시키는 데는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아주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5.20선거는 친일파 문제와 관련해서도 하나의 계기가 된 선거로 꼽힌다.

서중석 : 5.20총선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대통령은 4월 7일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개헌 조건부 입후보를 이야기한 6일에 이어 연달아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이건 친일파에 대한 괴이하기 짝이 없는 담화라고 볼 수 있다. 뭐냐 하면, 친일파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설명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정 시대에 무엇을 하던 것을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 뭘 했든지 간에, 가령 고등관을 지내고 또 일본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한 사적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지금 와서 잘하면 그건 친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잘한다는 건 뭐겠나. 이승만 대통령 본인한테 충실하다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까 이 선거에서 악질 친일파들이 자유당으로 대거 나올 것이라는 걸 예고하는 이야기였다. 1948년 5.10선거는 그래도 친일파의 출마를 많이 제한했고, 1950년 5.30선거 때도 친일파가 나오기는 꽤 많이 나와 당선은 됐다고는 해도 중도파 민족주의 성향의 무소속이 많이 당선되는 등 1954년 선거와는 상황이 달랐다. 또 자유당을 봐도, 그래도 족청계가 자유당을 장악했을 때는 친일파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쨌든 이범석은 독립 운동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이지 않았나. 그런데 족청계를 철저히 거세한 후 치른 5.20선거에서는 친일파가 대거 대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권력에 맹종하는 국회, 친일파가 똬리 튼 자유당

ⓒ오월의봄
프레시안 : 5.20선거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선거 결과를 보면 경찰들이 애쓴 게 효험을 봤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유당은 36.8퍼센트밖에 득표를 못 했지만 203석 중 무려 114석이나 차지했다. 이와 달리 무소속은 67석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제일 반대하던 민국당은 15명밖에 당선이 안 돼서 그야말로 쪼그라들고 망하는 식으로 돼버렸다. (무소속 후보의 득표율은 47.9퍼센트로, 자유당 득표율보다 11.1퍼센트포인트 높았다.)

이때부터 권력에 맹종하는 국회가 출현했다. 4월혁명 시기 민주당 정권을 제외하면 6월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국회라는 건 거수기 국회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나. 그게 바로 1954년 5.20선거로 탄생한 국회의원들에서 시작된다.

이승만과 이기붕을 제외한 자유당의 핵심 간부들, 그러니까 이재학, 한희석, 장경근, 이태식, 이익흥은 전부 친일파였다. 친일파가 아닌 사람이 자유당 간부가 되기가 굉장히 힘들게 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유당은 친일파 일색이라고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태가 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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