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위해 대통령 거스른 장관, 반년 만에 쫓겨난 사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6> 조봉암과 진보당,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1946년 공산주의를 부인하며 방향 전환을 한 후 조봉암은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조봉암은 공산당과 결별한 후 좌우 합작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일제 때 했던 활동과 비슷한 것인데, 민주주의독립전선이라는 게 1947년 초 출범할 때 이극로 등과 함께 그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그리고 중도 세력이 만든 미소공동위원회대책협의회, 이걸 '공협'이라고도 부르는데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릴 때 이 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이 좌우 합작에 열심히 참여해 주요 간부로 활동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공협'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한 미소공위가 1947년 7월이 되면 결국 틀어지기 시작하지 않나. 그렇게 된 데에는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미국의 냉전 정책이 이미 구체화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특히 6월에 들어서면 마셜 플랜으로 미국이 유럽 문제에 적극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7월에 가면 조지 케넌이 주장했던 소련에 대한 전 세계적 규모의 봉쇄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미소공위를 통해 통일 임시정부를 만든다는 정책이 미국에서 7∼8월이 되면 폐지되고, 9월에 가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다고 보통 설명한다.

그렇게 되니까 통일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 굉장한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그런 속에서 '남북대표자회의 같은 것이라도 해서 이제는 우리 민족끼리 뭔가 찾아봐야 하지 않느냐'는 움직임이 제기된다. 그런 것과 관련을 맺으면서 중도파를 중심으로 그해 12월에 민련 또는 민자련이라고 하는 민족자주연맹을 만든다. 민족자주연맹의 주석은 김규식이었다.

조봉암은 민족자주연맹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김규식의 비서 격으로 송남헌과 함께 활동했던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은 조봉암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봉암이 민족자주연맹에 여러 번 들어오려고 했는데도 그 때문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5.10선거의 이중성과 조봉암의 5.10선거 참여

프레시안 : 김규식은 왜 그렇게 한 것인가.

서중석 : 김규식이 갖고 있던 강한 반공 의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작용했다고 한다. 미소공위에 의해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는 좌파와 연합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좌우 합작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까지도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었고 그런 입장에선 공산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반대하지 않겠지만, (제2차 미소공위까지 막을 내린 상황에서) '조봉암은 과거에 공산주의 활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김규식이 아주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봤던 모양이다.

당시 민족자주연맹에 참가한 사람들은 거의 다 중도 우파 성향을 띠고 있었다. 예컨대 홍명희도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는데, 나중에 북한으로 넘어가긴 하지만 이 당시에는 누구나 홍명희를 중도 우파 정도로 분류했다.

그렇기 때문에도 조봉암은 민족자주연맹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된다, 이런 점도 생각할 수 있지만, 1948년 5.10선거에 조봉암이 참여한 것은 또 많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5.10선거는 분단 정부를 확고하게 세우기 위한 선거 아니냐, 미국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기 위해 5.10선거를 치르는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들이 당시 합작파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 5.10선거의 이중성을 항상 강조하고 이 선거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의 대다수는 5.10선거를 납덩이같은 마음이라고 할까,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겠나. 분단이 된다는 게 뭔지 명확하게 감이 오진 않지만 '굉장한 불행이 올 수 있다.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제 정말 하나의 국가로 돼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많이 갖게끔 한 건 사실이다. 김구, 김규식이 참여한 남북 협상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성원을 보낸 것도 그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민족 지도자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당위적인 입장에서 그 노력을 지지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분단만은 피해야 한다. 그건 바로 전쟁을 피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당시 큰 여론이었다.

프레시안 : 5.10선거에 대한 그러한 여론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조사 자료로는 어떤 게 있나.

서중석 : 예컨대 한국여론협회에서 1948년 4월 10일 서울에서 통행인 1262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것을 보더라도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5.10선거에 한해서만 선거인 등록을 하게 했는데 1262명 중에서 선거인 등록을 한 사람은 934명, 하지 않은 사람은 328명이라고 돼 있다. 즉 74퍼센트가 등록한 것으로 돼 있다. 그렇지만 이 934명 중 자발적으로 등록한 사람은 84명, 9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91퍼센트인 850명이 선거인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답변했다. 1262명 전체로 따지면 사실상 84명을 제외하고는 등록을 강요당했거나 등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압도적 다수가 '이 선거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해야 하나?', 이걸 두고 큰 고민을 많이 했다는 걸 얘기해주는 것이다. 당시 선거인 등록을 강제하는 방법은 배급 제도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어쨌건 많은 사람이 이 선거에 참 무겁게 응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분단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조봉암은 그 선거에 나선다. 조봉암처럼 유명한 사람이 그 선거에 나섰다는 것은 충분히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좀 이상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중도파, 그러니까 좌우 합작을 강하게 추진했고 미소공위에서 임시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태도를 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 조봉암. ⓒKBS 화면 갈무리


5.10선거에 대한 김구·김규식·조봉암의 다른 선택

프레시안 : 각각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남북 협상에 참여한 양대 인물 중 하나인 김구는 적극적으로 5.10선거를 부정하는 얘기를 한다. 그렇지만 우사 김규식은 그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예컨대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 그러니까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했을 때에도 김규식은 유명한 '불참가 불반대'를 내세운다. '나는 그 선거에 참여하지 않지만 그 선거에 참여하는 걸 반대하진 않겠다', 이것인데 난 이것이 굉장히 사려 깊은 발언이라고 본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사는 국제적인 시야가 넓은 사람 아니었나. 그렇기 때문에 '분단이 어쩔 수 없는 게 됐는데, 난 김구와 함께 남북 협상을 하러 간다. 민족적 입장에서 이 위기에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잘못이다. 한 번에 안 되면 백 번이라도 남북 간을 트기 위해 만나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런 우사는 8월 15일 정부 수립을 공포했을 때도 김구와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남한과 북한에 들어선 정부가 민생을 위해 잘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통일 운동을 계속 펴야 한다.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논리를 김규식은 편 것이다. 여기에 사실은 조봉암과 통할 수 있는 면이 있다.

민족자주연맹의 주요 간부라고 볼 수 있는 김병로, 안재홍 등 상당수는 김구, 김규식의 북행을 반대한다. 그러면서 5.10선거엔 참여하지 않는다. 차마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5.10선거에 참여할 수 있겠나. 민족을 위해 평생 살아온 사람이 분단을 초래하는 그 선거에 참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것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봉암처럼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속에서 난 5.10선거에 참여하겠다. 그래서 훌륭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훌륭한 헌법을 만들도록 하고 통일되도록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해 노력하겠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단정 운동 세력은 한민당이건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건 자신들이 정권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국민들한테 인기가 좋은 중도파가 정치에 참여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그쪽을 회색 인간, 기회주의자, 빨갱이 앞잡이로 계속 몰아댔다.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 거기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나는 나서겠다', 이런 용기를 갖기가 사실 쉽지가 않은데 나는 그런 용기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한민당이나 이승만 지지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현실 정치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구 같은 태도도 필요하고, 우사 같은 태도도 필요하고, 김병로와 안재홍 같은 태도도 필요하고, 조봉암 같은 태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프레시안 : 5.10선거 참여에 더해 조봉암은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한동안 친이승만 성향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당시 진보적인 사람들 중 상당수에게 비판 혹은 오해를 받기 딱 좋은 모습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비판 혹은 오해가 훗날 진보당 확장을 비롯한 조봉암의 활동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나?

서중석 : 조봉암이 5.10선거에 참여한 건 그 당시에도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그 이후에도 조봉암을 계속 비난하게 하는 중요 요인을 이루고 있다. 나중에 혁신 정당인 진보당 같은 걸 만들 때에도 일각에서 조봉암의 태도를 문제 삼을 때 5.10선거에 참여한 걸 가지고 이야기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조봉암이 5.10선거에 참여한 것을 결코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건 5.10선거 직후 조봉암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 1948년 5.10선거 모습. ⓒ국가기록원


사상의 자유, 인민의 권리 보장 위해 노력…이승만·한민당과는 다른 노선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주한 미군 자료를 보면, 선거가 끝난 직후 조봉암이 '5.10선거에 참여해 당선된 의원들을 보면 세 부류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나온다.

하나는 미소 양군 철수와 남북 협상을 주장하고 통일 전에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데 반대하는 그룹이다. 통일 전에 정부를 수립하면 안 된다고 본 강경한 그룹이 5.10선거에 나와 당선된 것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분명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미국, 국제연합, 그리고 이해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신중히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보는 그룹이다. 그러니까 5.10선거를 통해 당연히 정부가 수립되는 것이었는데도,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한 것이다. 어쨌건 통일 정부를 생각하면서 신중히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게 두 번째 그룹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이 숫자는 상당히 다수라고 돼 있다. 이건 무소속구락부, 나중에 소장파로 알려지는 그 세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조봉암 자신도 여기에 속한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내전이 일어나건 말건 즉각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보는 그룹이다. 즉각 정부를 수립하면 내전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이 당시에는 많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이게 바로 한민당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그러니까 이승만 지지 세력 이쪽인데 이쪽 세력이 제일 강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레시안 : 5.10선거에서 조봉암은 인천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된다. 당선 후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국회가 열리고 며칠 후인 1948년 6월 12일 국회에서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관한 건을 채택하게 된다. 이 메시지에 관한 건은 단정 세력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봉암은 이렇게 연설한다.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은 3000만이 원하지 않는 사업이라고 했는데 나 자신은 찬성할 수 없다', 이렇게 딱 부러지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남북 협상 또 남북 통일이 전 민족이 다 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향한다'는 이 표현이 재미난 표현인데, 지지한다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쓸 수 없기 때문에 '향한다'는 표현을 쓴 것 같다, 전 민족이 다 향하는 것인데 왜 이걸 비난하느냐는 이야기였다. 또 자신은 친소파도 아니지만 반소파도 아니라고 여기서 밝혔다.

그러면서 좌우 합작 때 주장했던 논리, 그러니까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를 협조시키는 것이고 미국과 소련을 적대시하는 것으로는 조선 민족의 독립이 달성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여기서 독립은 통일 국가 수립을 가리킨다. 이것에 대해 미국은 즉각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반스탈린 공산주의자라고 선언했던 조봉암이 친스탈린 편견을 보여줬다."

그다음 날인 6월 13일, 조봉암이 주요 리더였던 무소속구락부에서 통일 문제에 관한 견해를 발표한다. 거기서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우리는 조국의 남북 통일, 완전 자주 독립을 전취할 것을 최대의 임무로 한다", 이걸 명시했다. 단정 세력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밝힌 것이다.

조봉암은 30명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얘기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상당히 긴 자료로 따로 만들어서 발표했다.

거기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쓰는 건 부당하다고 이야기했고, 국민이라고 하지 말고 인민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도 의미가 있다. 그뿐 아니라 '인민의 권리, 의무에 대하여'라는 장을 따로 만들고 '남조선에서는 경찰이 구실을 마구 붙여서 양민을 유치장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신체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법률로 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헌법에서는 양심의 자유로 통과됐는데, 조봉암과 몇 사람은 '양심의 자유라는 표현은 애매하다. 무의미한 수사다. 당연히 사상의 자유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는 신흥 국가의 인민에게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면 국가보안법 논리는 존재하기 어렵지 않나. 이와 함께 조봉암은 노동자 계급의 특수한 권리가 헌법에 들어가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조봉암이 5.10선거 직후 한 행동을 보면 이승만, 한민당과는 아주 다른 노선을 걸으면서 현실 정치에서 최선의 길을 나름대로 가려 했던 것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에 들어가고 친이승만 단체에서 활동한 이유

프레시안 : 조봉암 등이 강조한 사상의 자유는 1948년 8월 15일 정부 출범을 선포한 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해 12월 1일 공포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제헌 국회에서 "속담에 고양이가 쥐를 못 잡고 씨암탉을 잡는다는 격으로 이 법률을 발표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조헌영 의원)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검찰총장조차 "가벼운 매로 대할 사안을 도끼로 대응하는 것 같아 너무 무겁다"고 우려할 정도로 제정 당시부터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법이었다. 그럼에도 극우 반공 세력이 "보안법 폐기 주장은 공산당을 돕는 행위"라고 강변하며 힘으로 밀어붙여 이 법을 만들었다. 그 후 많은 사람이 우려한 대로 국가보안법은 조봉암을 비롯한 숱한 '씨암탉'을 희생시키며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다시 돌아오면, 조봉암은 해방 후 방향 전환과 5.10선거 참여에 이어 이승만 정부에 입각하며 다시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내각을 발표할 때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해 또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승만 초대 내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게 있다면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이 된 것이었다. 조봉암은 예전에 저명한 공산주의자이지 않았나. 그리고 당시에는 농림부 역할이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내무부와 함께 제일 중요한 부서라고 볼 수 있었다. 내무부는 경찰을 장악하고 있어 제일 힘이 있는 부서였고, 농림부가 그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봉암이 거기에 참여했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발탁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농지 개혁을 안 할 수가 없었고, 한민당과 이승만이 사이가 나쁜 상황에서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지 개혁을 추진하도록 조봉암을 발탁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한민당과 조봉암은 사이가 보통 나쁜 게 아니지 않았나. 그렇지만 이것보다도 어쩌면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나 싶은데, 뭐냐 하면 그 당시 198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60여 명이 무소속구락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발언권이 강했다. 당시 민족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발언을 많이 했기 때문에 여론의 지지를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무소속구락부를 대표하는 조봉암하고 윤석구(체신부 장관), 이 두 사람을 끌어들임으로써 무소속구락부도 자신을 반대하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고 분석한다. (무소속구락부 결성 직후 조봉암은 6명의 간사 중 하나로 선임됐다.) 그런데 두 가지 다 이승만의 의도와 조봉암의 의도는 좀 차이가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차이가 있었나.

서중석 : 윤석구도 그렇고 조봉암도 그렇고 입각한 이후에는 무소속구락부에서 이탈했다. 무소속구락부 이 사람들의 주류가 나중에 소장파가 되는데, 다른 일부 의원들과 합쳐서 국회를 한동안 주도하지 않나. 그해 11∼12월부터 이듬해인 1949년 6월까지를 소장파 전성시대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소장파가 제헌 국회 여론을 장악했다. 주요 입법을 이 사람들이 많이 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봉암, 윤석구가 '이승만을 지지하라'고 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을 리도 없었다.

하여튼 조봉암, 윤석구는 무소속구락부 및 소장파와 그 후 관련을 맺지 않게 된다. 이게 또 조봉암이 살아남은 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까 질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조봉암은 이승만의 수족 같은 사람이던 윤치영 초대 내무부 장관이 들어 있었고 친여권 단체로 분류되던 이정회에 들어가서 활동도 하고, 족청과도 여러 관계를 맺고, 한때는 국민당에 들어가서 1950년 5.30선거 때는 국민당으로 입후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5.10선거에 참여했다고 해서 욕을 얻어먹은 조봉암이 왜 또 이런 친이승만적인 활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만한 활동을 하게 되는가. 그게 논란의 초점이다. 그런데 우선 그걸 생각해야 한다. 한민당 내부가 다 그렇지는 않았지만 한민당은 비교적 내부 결속력이 있었다. 그런 한민당과 조봉암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얼음과 숯처럼 성질이 정반대여서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 관계였다. 양자는 도무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 그때까지 양쪽이 내놓은 주장이 쭉 그랬다. 그런데 이정회, 국민당, 족청은 한민당과 달랐다. 내부가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돼 있지도, 내부 결속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잡동사니 그룹 비슷한 면모가 없지 않아 있었다.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막연한 것을 빼놓고 보면 그랬다. 사실 여기 속했던 사람들이 언제나 이승만을 확고하게 지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건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도 비슷했던 것인데, 하여튼 느슨한 조직들이었다. 그래서 조봉암이 피신해 있기가 좋았던 조직이 아니냐, 난 그렇게 본다.

족청 같은 데는 성격이 복잡했다. 극우들이 많이 들어간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나중에 족청 일부는 혁신을 부르짖고 4월혁명 시기에는 혁신계에서 일부 활동하기도 한다. 여러 세력이 족청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도생하며 자신의 정치생명을 유지하고 키우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주류인 이범석 세력만이 아니라 여러 세력이 족청에 들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범석 지지 세력도 좀 복잡했다. 그런 것들이 조봉암이 족청과 정치적 관계를 맺는 하나의 틈을 준 것이 아니냐고 볼 수 있다.

이승만과 엇갈리고 한민당과 충돌한 조봉암의 농민 중심 농정

ⓒ오월의봄
프레시안 :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중 농지 개혁 부분에서 짚은 것처럼,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토지 개혁 구상은 이승만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서중석 : 농림부 장관이 된 조봉암이 이승만 대통령과 협조적인 관계를 맺느냐, 이승만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그런 데에서 문제가 생기고 거기에 조봉암의 위치가 있었던 것이다.

조봉암은 제헌 국회에서 헌법을 심의할 때 '토지를 반드시 지주에게서 박탈해 농민에게 나눠줘야 한다. 산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이 생각한 토지 개혁을 훨씬 뛰어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입각 제안을 받았을 때 조봉암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 방식, 즉 농민 중심으로 토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을 이승만에게 전하고 양해를 구한 후 입각을 결정했다.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을 맡게 되자 우익 청년단원들은 차마 이승만에게는 직접 항의하지 못하고 "왜 공산당을 입각시켰느냐"며 이승만의 비서 집을 습격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농민들, 농민 단체들, 지방에 있던 농민 지도자들 이런 쪽과 자주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걸 볼 수 있다. 전국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농정 관계자 및 농민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했다. 그리고 토지 개혁을 구체화하고 그 시안을 만들기 위해 농림부 팀은 1949년 정초부터 중요 도시들에서 공청회를 열었다. 농업, 임업 계통 종사자들이 여기에 참석하도록 하면서 상당히 농민적인 토지 개혁을 내놨다. 우선 당시 농민들이 굉장히 못살았기 때문에 1년에 수확량의 20퍼센트 이상을 물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20퍼센트면 당시에 싼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내는 것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20퍼센트씩 6년 납부하게 하는 게 좋다'며 농민에게는 1년 수확량의 120퍼센트를 부담하게 하고 지주에게는 150퍼센트를 보상할 계획을 세웠다. 예전에 농지 개혁을 다룰 때도 이야기했지만, 물론 이승만은 이건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 시기에 조봉암이 국회에서 한 다음 발언은 농지 개혁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소작 제도라는 이 수천 년 내려오는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에요. 없애버리자는 것이에요. 이것이 개혁이에요. 개혁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 문자가 결코 무서운 문자가 아니에요. 그런 까닭에 소작 제도를 없애고 우리나라의 봉건적인 사회 조직을 근대적인 자본주의 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올시다.")

토지 개혁 문제 외에도 조봉암은 농민들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협동조합을 육성·장려하고, 농민이 직접 교육받고 실천할 수 있는 농사 훈련 기구 같은 것을 창설하려 했다. 양곡 매입 같은 데서도 이승만 정부와는 동떨어지게 강요가 아닌 자발성을 중시했다. 이 당시 양곡 매입은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다. 도시민이 그걸로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조봉암은 여기서 농민의 자발성을 중시했다. 그리고 초기에 조선공산당을 같이했던 김찬을 사장으로 앉히고 농업학자 인정식을 편집국장으로 한 <농림신보>도 창간했다.

프레시안 : 농민을 중심에 둔 조봉암의 농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취임한 지 반년 만에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에서 물러나게 된다.

서중석 : 이승만이 이런 것들을 용납할 리 없었다. 농지 개혁안은 국무회의에서 일축을 당했고, 농업협동조합법은 기획처로 돌려져서 영원히 국회에 나오지 못했으며, 양곡 매입과 관련해 조봉암 자신도 모르게 강권 발동령이 내려졌고, 신문 창간 건은 대통령이 승낙했다가 보류를 지시했다. 그래서 뭐 하나 된 게 없었다.

조봉암의 정치적 생명을 직접 위협한 것은 감찰위원회에서 조사한 독직 사건이었다. 감찰위원회는 조봉암이 관사 수리비 등으로 공금을 부당하게 유용했다고 하면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여론화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검찰에까지 넘어가고 그랬다. 감찰위원회 배후에는 한민당이 있었다. 이건 한민당이 농림부 장관 조봉암을 때려잡으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1949년 2월에는 '농림부 장관을 파면에 처한다'는 발표까지 감찰위원회가 했다. 사실 거기에 그런 권한이 있다고 볼 수도 없는데 그렇게 했다.

그해 2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권고에 의해 조봉암은 사표를 제출하게 된다. 형식상으로는 독직 사건 때문에 사표를 낸 것이 아니라 조봉암이 농민들에게 양곡을 자유롭게 팔 수 있고 팔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수차례 연설한 것, 양곡 매입에 강권을 발동하는 것은 조봉암 자신의 의사와는 배치된다고 한 것 때문에 사표를 제출했다. 즉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다녔다는 것, 이게 대통령의 권고사직 이유였다.

이 독직 사건에서 조봉암은 1심, 2심, 3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여튼 조봉암은 돈 문제 때문에 일제 때도 문제가 있었는데 또 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건 나중에 진보당 사건 때 또 생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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