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 우리는 어떤 정치적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일까? 식민지 지배 36년의 세월 동안 조선인들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꾸려나갈 역량이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역사는 우리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준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8시경,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면담 전갈을 받고 그와 만난다. 총독부의 요지는 단 하나, 일본 항복 이후 치안에 대한 여운형의 역할이었다. 조선인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운형은 그의 제안을 넘어서는 요구를 한다. 감옥에 갇힌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하고 조선인들의 자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시동을 거는 중대한 순간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진실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역사학자 서중석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에서 "해방된 그날부터 스스로 치안을 맡고 행정 등에 관한 여러 일을 직접 해나간 곳은 전 세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하면서 주체적 해방의 역사를 주목한다.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 민중들이 존경하고 따른 독립 운동의 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남이 가져다 준 해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의 패망은 국제 관계의 산물이지만, 우리 내부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지속되어 왔었고, 제국주의 파멸 이후의 준비까지 이미 해놓은 상태였다는 점은 대단히 중대하다. 일본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친일 부역했던 자들이 대세를 이루는 듯했다. 그러나 그걸 넘어설 수 있는 때는 반드시 올 것이며 이를 위해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을 해온 이들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해방이 되자 곧바로 이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치 기획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바이다.
물론 여운형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는 이후 정치 세력의 내분 그리고 미군정의 부정과 해체 작업으로 현실적 존속력을 잃고 만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역사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처한 현실과 상황은 그 어떤 것도 미리 확정되고 필연적 방향성을 가진 것은 없다.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린다. 문제는 이러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미리 단념해버리는 생각들이다.
체념적 사유에 대한 공격
웅거의 <정치(Politics: The Central Texts)>(창비, 2015년 4월 펴냄)는 현재 칭화대학 공공관리학원 교수로 있는 추이 즈위완(崔之元)이 웅거의 3부작인 <사회 이론(Social Theory)>, <허위적 필연성(False Necessity)>, <조형력을 권력 속으로(Plasticity Into Power)>의 핵심 텍스트를 묶어낸 책이다. 부제가 "운명을 거스르는 이론(Theory Against Fate)"이라고 되어 있듯이 그는 "체제 순응주의"라는 압박과 싸우고 "불복종, 이단, 저항, 희망과 상상력의 연합"등을 주장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급진적 민주주의를 통한 대안 체계의 재구성이다.
웅거는 한국어판 서문에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의 사회 이론의 강렬한 소망은 마르크스 사유의 전통에 있는 핵심적인 통찰을 구출해내, 이를 우리가 만들어 가고 상상하는 사회구조의 속성으로 급진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필연적 환상의 악령으로부터 그 통찰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체제는 결빙된 정치다. 그것은 실천적, 비전적 갈등을 상대적으로 억제하고 일시적으로 방해하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의 관심과 이념이 항상 사회의 제도와 관행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런 제도와 관행을 의미화하고 이에 권위를 부여하는 관념들에 의해 수난당할 때, 우리는 구조적 상상과 구조적 변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나의 사회 이론의 목적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육과 정치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프로그램의 중심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는 시장을 억누르거나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해야 한다. (중략) 교육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시장을 민주화하고 민주주의를 심화하려는 이러한 시도에서 성공할 수 없다. 민주주의 아래에서 학교는 자신들의 환경과 문화에 더 잘 저항하고 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지적 식민주의의 멍에를 벗으라"고 권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해석과 대안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좌나 현실의 테두리 안에 갇힌 우의 논리 모두 배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가장 중대한 통찰의 힘을 얻고 있는 그는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변화의 열망과 정치적 자율성을 결합하는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역할을 주시하는 그로서는 결정론적 해석에 반기를 들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현존하는 제도 내부의 갈등과 타협의 문제"만 몰두하는 실증주의 사회과학은 우리를 "체념한 내부자"로 머물게 함으로써 진정한 변혁의 전망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유한 속에 갇힌 무한자, 그 이름은 인간
사실 웅거의 저작들은 읽기가 전혀 수월하지 않다. 추상화의 수준이 매우 높고, 서구 사상의 맥락과 이론적 논쟁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면 어떤 논쟁을 하려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오의 번역은 탁월하고 정밀하다. 그의 책을 읽는 과정에서 난감해진다면 그것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웅거가 글을 쓰는 방식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역사적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분석하는 대목에 들어서면 독해가 쉬워지면서 그의 지식이 얼마나 방대하고 구체적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법학자인 그가 사상사와 역사, 그리고 최근에는 종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인식 체계와 경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치열한 사유의 투쟁 과정과 훈련을 해왔던 결과다.
웅거는 인간이 살아가는 제도나 법, 정치 구조 등은 인간이 만든 "인공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는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자 다른 제도적 유형을 취했을 수도 있는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달리 말해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며, 그 실현 가능성의 범주 역시 무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의 능력으로 가능하며, 이를 수행하는 인간은 "유한 속에 갇힌 무한자(the infinite caught within the finite)"라는 점을 인식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인간 자신이 가진 무한자적 속성에 대한 깨달음은 불가능성을 상상하고 이를 대안으로 만들어가는 의지로 이어진다. "기존의 정신세계나 사회세계에서 꿈꿀 수 없는 것들을 행"하자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인간에 대한 제한된 실험을 거부"해야 한다고 하면서 "통찰을 어떤 사유 구조에 가두지 말아야" 하며, "최대한의 수정 가능성"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현실적 변화가 얼마나 많은 현실 인식의 수정을 요구하고, 그것이 전체 맥락의 기존 조건을 바꾸어나가는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가 예로 든 탱크의 등장에 대한 대목은 흥미롭다. 1차 대전 당시 탱크가 처음 쓰였을 때 기존의 군사 전략가들은 이를 보병의 보조 수단으로 이해하고 명령 체계의 조정에 비중 있는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의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가져온다.
"탱크 부대원들을 지휘하는 소장 장교는 신속하고 강력한 침투나 포위를 위해 불시의 기회들을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고정되고 미리 짜인 계획을 고수할 수 없었으며, 명령을 내리는 자와 그것을 집행하는 자 사이의 중계자의 역할로 제한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중앙의 지시가 이 재량권의 균형을 맞추는 데 실패한다면, 탱크 부대는 분산되어 집중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 탱크 부대 사령관은 전장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고 그의 계획은 개별 탱크 부대원들이 포착한 기회와 이들이 직면했던 장애물에 따라 수시로 수정되어야 했다."
웅거는 군사 역사의 주요 전환점마다 파괴력의 발전을 꾀하는 기술 변화가 사회 조직에 대해 체제 전복적인 영향을 끼쳐왔다면서,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주도하지 못할 때 국가 역량의 실패를 가져온 것을 주목한다. 그러한 역사적 예의 하나가 중국의 양무운동이다. 그는 서구에 비해 훨씬 앞섰던 중국의 화기 개발이 이후 열세에 빠진 것은 기술과 사회 조직의 변화가 연동되지 못한 탓이며 이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양무운동은 군사기술의 도입은 환영했지만 "국가와 사회의 기존 위계질서를 훼손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기를 기대"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연히 한계가 분명한 것이었다. 결국 기존 질서 내부에만 머물러 변화를 꾀하는 것은 그 체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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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정치적 자율성,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시도는 이와 다른 경로를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경고를 내린다. 볼셰비키 혁명의 기반인 소비에트 모델이 이후 어떻게 국가주의에 포섭되어 민중들의 민주적 역량이 분쇄되는지를 그는 중앙집권적 국가의 정치 독점 과정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체제와 제도를 변화시키면서 기술 발전을 꾀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확실히 봐야 한다는 것이다.
웅거에 따르면, 소련 정부는 자신들에 대한 서구의 적대감으로 인해 외국 자본에 의존할 수 없게 되면서 "도약을 위한 축적 자본의 대부분이 잉여농산물을 도시인구와 산업노동자에게 값싼 식량으로 제공"하는 전략을 정책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농업경제에 대한 압박의 심화로 나타나고 농민들로부터 자율성을 박탈하는 "강압적 집단화와 잉여농산물의 강제 징발"을 관철하는 "수백만 가구를 붕괴시키는 혁명적 독재의 수법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국가와 지도력"의 출현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당시 어떤 정파도 "자본 축적의 형태와 정부 형태가 서로 연결된 정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로써 혁명의 민주적 기반이었던 소비에트는 억압되고 대신 "정부 통제의 단순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모델의 실패를 회피하기 위한 선택지로 등장한 중국의 문화혁명은 어떤 경로를 거치게 되었을까? 물론 문화혁명의 시동에는 정치 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이 작동한 대목이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경제 발전을 위해 관료가 아닌 대중에 기반을 둔 권력의 재조직화였는데, 상황은 "설계자들의 예상을 뛰어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중 선동의 확산이 대중의 권력 조직화를 통제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갔다고 본 중앙 권력은 이에 대한 반전을 꾀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경제 성장 프로그램이 관리자와 당의 위계질서에 자리 잡았다." 통제력이 재건되면서 문화혁명의 대중성은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웅거의 분석과 논리의 중심에는 권력의 통제를 제약하면서 대중 참여의 주체적 확대를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라는 과제가 존재한다. 그는 자본 권력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나 노동계급 중심주의에 빠진 좌파나 보수화된 사회민주주의의 대안은 모두 더 광범위한 대중들의 정치적 활력을 촉진하는 데 한계를 가져온 상태에서, 대중의 권리가 사회적 상속의 방식으로 공유되면서 정치 활동의 적극화가 이루어질 때 대안의 재구성은 가능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대중의 급진적 조직화에 기대를 걸고 있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불완전 고용 노동자, 농업 노동자, 소지주, 급진화된 프티부르주아 대중의 조직화된 호전성을 통해서만 경제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의 수단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하다. 그들은 조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조직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
다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역사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그의 <정치>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대신 우리는 그의 이론적 지향의 기본을 여기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의 더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실천 프로그램은 코넬 웨스트와 공저한 <미국 진보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American Progressivism)>에서 그 일부를 볼 수 있다. 그가 1970년대 브라질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브라질 연방의회에 출마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고 룰라 정부에서 전략기획 장관까지 지낸 현실 정치인의 면모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웅거의 보폭은 넓고 깊다.
1980년 초 미국 유학 시절 그의 책 <지식과 정치(Knowledge and Politics)>, <현대 사회의 법(Law in Modern Society)>를 읽으면서 놀랍고 우울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내용의 방대함과 심오함도 그랬지만, 이 책이 그가 겨우 29세의 나이에 썼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 사상의 통제로 생각이 감금된 한국의 현실을 쓰라리게 되돌아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3부작을 하나씩 펼쳐 들고 읽었을 때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이 아닌 법학 전공자라는 사람이 보이는 학문적 신공(神功)에 기가 질렸다. 새로운 유형의 정치학자를 거기서 목격했다.
다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역사로 돌아가 본다. 해방 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민주적 역량의 급진화가 절실한 때가 아닐까? 대중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체념한 내부자가 되어 운명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다. 정치는 방치를 넘어 대중과 격리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치사회적 운명을 혐오스러운 세력에게 헌납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권리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정치의 재발견"이 절박하다. "대중들의 정치 참여를 위한 역사적 흥분과 열정의 귀환"이 갈급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첫 작업은 기존의 이론과 주장에 매몰되지 말고,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읽는 것이다. 어떤 기회가 있었고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놓쳤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지 다시 우리의 정치적 사고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그어 놓은 가능성의 경계를 넘는 일이다.
권력의 통치를 정치로 인식하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정파의 싸움을 정치로 받아들이는 한 우리에게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우리 모두의 기본권이며 삶의 핵심이다. 자신의 인생을 주도하는 권리를 어디 함부로 남에게 주려는가? 이 각성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는 진실로 시작될 것이다.
*2010년 7월 31일 첫 호를 내고서 5년간 이어온 '프레시안 books'가 새 단장을 위해서 한두 달의 휴식 기간을 가집니다. 그간 '프레시안 books'는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좋은 책을 공들여 쓴 서평으로 독자에게 소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프레시안 books'는 더 적극적으로 책을 매개로 한 소통에 나설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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