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어느 '진보적' 지식인의 고백

[주간 프레시안 뷰] 나를 부끄럽게 한 한 마디

지식의 가벼움
4월 16일, 이 글을 씁니다. 무기력한 1년을 보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를 비웁니다. 비우지 않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이지요. 미안하다 말하는 순간 눈물이 흐릅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제 삶이 통째로 미안하니 눈물이 흐를 밖에요. 진보라는 언어를 즐겨 썼던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늘로 간 아이들에게 저의 삶 전체를 바쳐 미안하다 말합니다. 모두 비운 몸뚱이가 흘리는 눈물이라 슬프기보다는 뭔가 아득합니다. 그 아득한 끝을 잡아 새 삶을 이어가려 합니다.
4월 11일 밤, 기억저장소 전시관 천장에 도기로 빚은 아이들의 기억함이 걸렸습니다. 도예가 김태곤 선생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지는 기억함입니다. 다행히 유가족 분들이 내 아이의 기억함이라고 노란 별로 표식을 해두고 가십니다. 16일이 지나면 그 기억함에 아이가 좋아했던 인형이랑 일기랑 사진을 넣어두겠다 하시고요. 자주 오셔서 아이의 꿈과 사랑을 기억하며 삶을 이어 가겠다 하십니다. 기억저장소 전시관이 유가족들과 세상 사람들의 위안의 공간이 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기억함 밑에 서 있는 저라는 존재는 그 무게감을 견디지를 못해 16일 오늘도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기억함의 무게감이 제 삶의 가벼움, 지식세계의 가벼움을 일깨워줍니다. 진보적 지식세계를 추구하고 사회의 변화를 향해 뭔가 실천해왔다는 것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지긋한 무게로 누르며 알려줍니다. 저의 지식의 가벼움, 실천의 공백들이 결국 아이들을 수장시켰습니다. 진보를 진실된 마음으로 빼곡하게 채우지 못한 죄, 아이들 하나하나와 공감하며 꿈과 행복을 채워주지 못한 죄, 제도 혁신의 성과들만 믿고 정작 실존하는 아픔들에 눈 감고 살아온 죄. 저에게 4월 16일은 지식인으로서 지식의 가벼움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날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보적 생각과 일상의 분열
사람을 살리는 지식을 만들지도 못했고 사회적 실천 역시 성기기 짝이 없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저를 반성하게 하는 것은 분열증입니다. 진보적 생각으로 현상을 분석하기도 글을 쓰기도 했지만 돌아서 맞닥뜨린 현실에서는 돈과 내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삶의 풍요로움을 애써 잊으며 그저 물신주의에 빠져 비싼 음식, 비싼 옷, 비싼 집을 좇았습니다. 안산에서 만난 어느 활동가가 제 차를 타고는 "고급차가 역시 좋네"하고 비아냥거렸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참사를 겪고 안산을 들락거리면서조차 내 아이에게는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지"하고 '훈육'하는 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억저장소 전시관에 걸린 '아이들의 빈 방' 사진이 제게 말합니다. 분열증을 걷어내고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실천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진보를 추구하라고 말입니다. 비디오 저널리스트를 꿈꿨던 단원고 2반 수정이의 빈 방에는 꿈을 이야기한 기록들로 가득합니다. 엄마, 아빠의 참사 이후 1년간의 처절한 실천의 삶이 빈 방 안에 함께 채워져 있고요. 노란 바람개비와 리본과 유가족임을 표시하는 목걸이들은 사람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상징입니다. 수정이의 빈 방은 오늘 16일 이후에도 그렇게 채워져 갈 것입니다. 그런 유가족들에 비해 저는 분열적인 삶을 이어왔습니다. 저의 분열증은 실천의 한계를 야기한 주범이기도 합니다. 애써 낸 시간에만 그것도 시혜적 사고를 완전히 떨쳐내기 못한 채 무책임하게 움직였습니다. 유가족들은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실천이, 뒤틀려 왜곡되어 있는 제 삶을 바로잡아주고 있지요. 그들을 돕는다고 착각하고 저 자신의 삶을 제대로 혁신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저의 투쟁은 불철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채워내지 못해, 그리고 우리 시민사회가 제대로 역할하지 못해 유가족들은 삭발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잔인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의 하나는 저를 비롯한 진보적 시민 모두의 분열증입니다.

엘리트주의의 거짓들
안산에서 여러 활동가들, 유가족들과 움직일 때조차 저는 한계투성이였습니다. '해석'하고 '발상'해 제시할 뿐, 공감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매주 화요일 몸을 옮겨 안산에 있었고, 일도 하고 술도 같이 했지만 결국 저는 엘리트주의의 거짓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기보다는 저의 '발상'을 설득하고 때론 강요하기 일쑤였지요. 유가족들의 아픔에 공감하다가도 어느새 위로하고 '훈육'하는 가볍고도 건방지기 짝이 없는 엘리트가 되어 있는 저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배를 침몰시키고 아이들을 수장시킨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가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잘못된 습관을 반복합니다.
지난 11일 토요일 늦은 밤, 얼굴에 최루액을 맞고 오열하는 유가족들을 뒤로 한 채 우리 모두는 자진 철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8000여 명이 모인 집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을 앞세워 '격렬하게' 싸우게만 했습니다. 수십명의 운동가, 학자, 종교인이 체포되고 다음날까지 수천명이 함께 밤샘 농성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는 뒤에 빠져 있고 유가족들이 경찰들에게 짐승 취급을 받게 하고 말았습니다. 처참한 싸움 뒤에 유가족들에게 닥쳐올 억울함과 허망함을 헤아리지 못한 처사입니다.

유가족들이 삭발을 하고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든 것은 시민사회 모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토요일 밤의 무책임한 '대격전'도 우리의 불철저함의 소치입니다. 시민사회에 아직도 잔존하는 엘리트주의가 문제의 배후에 있습니다. 충분히 경청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감하며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생각을 모아 움직이기보다는 '지도부'가 판단하고 습관적으로 '리드'하는 엘리트주의의 거짓 세계가 결국 모두를 아프게 합니다. 11일 싸움 며칠 후 삭발을 한 채 기억저장소에 들린 어느 엄마의 이야기가 아직도 제 가슴을 때립니다. "머리라도 깎아야지, 무슨 방법이 있어야지요. 그래도 머리통이 예쁘다 해줘서 다행이에요" 하고는 엷은 미소를 짓습니다. 우리를 잘 이끌어달라는 부탁까지 곁들이시니 저는 부끄러움에 또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지식인에겐 보이지 않는 것들
지식인들에게 쉽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권력의 폭력적인 공격들, 예를 들어 3월말부터 시작된 불법적 '시행령' 공격이나 치졸한 '배·보상' 공격 등이 대표적이지요. 저 역시 강하게 문제제기를 했고,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의 해임, 대통령의 유가족과 국민에 대한 공식 사과, 문재인 야당대표와 의원들의 해수부 항의방문, 영수회담 제안 등을 즉각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요구한들 뭐하겠습니까. 그들만의 리그 안에 갇혀 요지부동이니 말입니다. 해수부에 쳐들어가 점거농성이라도 벌여야 하지만 우리 능력이 그에 미치지 않는 것도 유가족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이유의 하나입니다.
잘 보이는 것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가슴이 쓰라리지만 잘 보지조차 못해 내팽개쳐 놓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해수부가 배·보상 접수를 시작함과 동시에 유가족들은 '은밀하게 다가오는' 권력의 폭력으로 인해 또 다른 아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상처가 덧나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지요. 저는 안산을 오가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보이는 것들에 예민하지 못했습니다. 위로부터 쉽게 보이는 제도의 문제, 권력의 직접적인 폭력에만 매달렸습니다. 형제자매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1주기를 맞아 여러 행사를 하지만, 입시지옥 안에서 치르는 그런 행사들은 그저 형식일 뿐, 오히려 어린 마음에 상처만 더해주는 꼴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도 가정을 지키려 꾸역꾸역 다니는 회사가 유가족들에게는 부담이자 미안함이자 슬프디 슬픈 노동의 현장일 뿐입니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노동 따위는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술 한 잔 마실 때도, 야채가게서 찬거리 하나를 살 때조차도 유가족들은 이제 그만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낍니다. 권력의 폭력은 이렇게 삶의 곳곳에서 '문화'의 탈을 쓰고 작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래로부터 함께 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함으로 인해 아픔의 실존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삶의 처참한 상황을 야기하는 미시권력들을 해체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생각하니 후회와 자괴감에 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국회의원들이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호통이나 치고 앉아 있는 것을 비판했지만 어찌 보면 저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현장을 모르고 권력 다툼이나 눈에 들어오는 그런 지식인 노릇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 지난 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의 삭발식.ⓒ프레시안(손문상)

나를 부끄럽게 한 한 마디 말
기억저장소 전시관 귀퉁이에 빈 방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엄마 내가 약간 힘들고 아프니까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6반 원석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이랍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힘들고 아픈 것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걱정하는 어른들을 배려하고 있었고, 기다려주면 스스로 어떻게든 이겨나가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인 저는 아이를 아프게 하는 현장의 권력을 내버려 둔 채, 폼 나는 담론이나 내뱉고 진영 싸움에나 휘둘리고 제도 혁신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지요. 저 꿈 많고 아름다운 아이들이 죄 많은 어른들을 배려하고 있는 동안, '훈육'이나 일삼고 책임지지 못한 욕심만 아이에게 퍼붓고 살았습니다. 아이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저 배워야 할 대상으로만 치부하고 말았습니다. 표현과 행동의 방식이 제게 익숙하지 않았을 뿐, 아이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부탁하며 사랑을 보내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우리의 무책임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고 욕망 덩어리에 갖혀 헤어나지 못한 왜곡된 삶 덕분에 말입니다.
돈과 권력의 욕심에 빠져있는 부도덕한 정권은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지침 없이 싸워가야 합니다. 하지만 4월 16일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 자신을 바라보려 합니다. 저 자신의 생각, 습속, 거짓들이 악의 존재를 용인했습니다. 어른보다 더 어른이었던 아이들, 세상의 부조리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그 아이들, 그러면서도 어른들에게 사랑의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왔던 아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추운 바다 속에서 손톱이 빠지도록 살기 위해 애쓰면서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아이들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맞은 4월 16일은 미치도록 부끄러운 날입니다.
원석이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힘들고 아프게 해 미안하다'고, '끝까지 너의 사랑을 잊지 않겠다'고, '네가 원한다면 기다릴 것이고, 또 기다리며 나를 반성하겠다'고 말입니다. 오늘 4월 16일은 우리 모두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작은 변화, 실천들을 하나하나 쌓고 또 쌓아 하늘로 간 아이들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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