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칼춤', 박근혜 정권의 레임덕

[주간 프레시안 뷰] 세월호 1년, 한국 정치는 무엇을 배웠나

세 살 된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작년 이 맘 때는 두 살이었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막 시작했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부모가 바빠졌습니다. 온 집안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부드러운 패드로 감싸고, 가위와 칼이 들어있는 부엌 싱크대 문에 안전장치를 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시멘트로 된 바닥을 걷다가 넘어질라 치면, 얼른 일으켜 세워서 까진 데는 없는지 무릎과 손바닥을 살폈습니다.

얼마 뒤 말을 시작하면서 얻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 하면서 아이가 우리를 껴안고 뽀뽀해 주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손가락 끝에 생채기만 나도 화가 나고, 제 아픈 곳을 가리키며 '여기 아파 여기 아파' 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아립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깊은 한숨을 지었습니다. 저렇게 키운 아이들을 떠나보낸 부모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독특한 어떠한 정서를 '한'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참 슬픈 말입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프고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그것을 어찌할 바가 없어서 기어이 맺힌 것이 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 호소할 데가 없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시간이 좀 지나면 나라의 질서를 그르친다는 누명을 쓰고 입이 봉해진, 중세 신분질서 하의 하층 계급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가 굴곡진 우리의 근대와 산업화, 민주화 시기까지 잔존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여전히 이러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재해나 사고가 사라져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동등한 시민으로서 누구나 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정받고, 국가는 국민의 안위와 복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고, 시민들은 국가가 그러한 책무를 다 하는지 감시하고 책임을 추궁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사회는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우리가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한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한은 스스로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을 다 알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있는 사실을 가능한 한에서 모두 밝히고 공개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낸다고 해도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희생자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규명하는 것, 그것은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산 자의 눈물을 닦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은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이것에 왜 실패했는지 되돌아보려고 합니다.

작년 말 어느 모임에서 올해 정치를 전망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정치에서 가장 보편적인 상황은, 집권 3년차에 레임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집권세력에서 미래의 집권세력으로 천천히 권력 이동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특히 야권에 유력한 대안세력이나 인물이 있다면 권력 이동의 방향은 외부를 향하게 되고 속도도 빨라집니다. 선거가 있다면, 정권심판론이 제기되면서 더욱 가속화됩니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과 야당의 지지율은 별개였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아무리 큰 잘못이나 실수를 해도 국민은 야당이 대안세력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304명의 실종자 중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세월호 사건 직후에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여당이 마지막에 내건 현수막은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야당은 선거에 실패했습니다. 대통령은 이번에도 선거의 여왕이었습니다. 대통령을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은, 야당의 무능이었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다시 재보궐 선거가 있습니다. 성완종 비자금 사건이 정국을 흔들고 있습니다. 전패가 예상되던 제 1야당은 어쩌면 한 곳 정도는 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봅니다. 이 사건이 아니었던들, 새정치민주연합은 자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지난 1년 동안, 이 당에서 바뀐 것이 무언가 있는가요?

천정배 후보가 광주에서 앞서가고, 관악에서 정동영이 출마하자 문재인 대표는 다급하게 동교동을 호출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은 후에야 이들은 유세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설혹 이긴들, 그 승리가 문재인의 승리일까요? 박근혜의 눈물을 닦아달라던 그 세력과 다른 무엇이 여기에 있습니까? 그렇게 당선된 세력은 여당보다 세월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요?

세월호 1주기 불과 2주 뒤에 재보궐 선거가 치러집니다. 그런데 제1야당이 단 한 곳에서도 승리를 자신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정치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오히려 제1야당 교체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그 대안으로 내 놓은 것이 전통적 지지층 자극입니다. 자력으로 정권심판론을 펼 능력은 안 되더라도, 실패를 자인하고 새롭게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암담합니다.

야당이 대안 세력이 되지 못하면 새로운 권력은 여당 안에서 창출되기 마련입니다.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여당 내 소장파가 야당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때 마침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유승민 대표는 여당이 세월호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의지를 표명했고, 모든 의원들이 4월 16일에 추모 리본을 달아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유대표의 연설은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집권 3년차라고 하는 시기적 조건과, 야당의 무기력이라고 하는 정치적 상황이 맞물렸을 때, 새누리당 소장파가 얼마나 긴밀한 판단과 대담한 행동으로 나설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의 성공 비결은 과감한 변화와 적극적인 세대교체에 있습니다. 국민의 뜻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유연성에 있습니다. 당에 원로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늘 새로운 전략과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개혁적 이미지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과 가치를 지속시켜나갑니다. 이준석을 최고위원에 기용하고 이자스민을 공천했던 새누리당은, 이제 두 명의 도지사와 원내대표를 배출한 소장파들의 약진을 통해 이제 그러한 선진적 보수당의 모습을 점차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넘어야 할 산도 명확합니다. 유승민 대표는 어제 팽목항에 갔다가 쫓겨났습니다. 말로는 변화를 말할지 몰라도 여전히 새누리당은 세월호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있습니다. 소장파 역시 말로만 떠들 뿐, 그러한 의심의 눈초리를 풀게 할 만한 행위를 한 적이 없다는 지적은 통렬합니다. 새누리당 소장파가 새로운 보수당을 만들고 싶다면, 그래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싶다면, 우선 이러한 인식을 불식시켜야 합니다. 말로 시작했으니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 주목되는 이유입니다.

권력은 새로운 정치세력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한국정치에서 레임덕이란 정부와 여당의 권력이 검찰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샤츠 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이 대의 민주주의에서 주권이 어떻게 정당과 대의기구를 통해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면, 한국에서 절반의 인민주권이란, 선거로 뽑힌 정부의 권력이 집권기 절반이 지나면 검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5년이라면, 절반은 대통령과 여당이, 절반은 검찰이 권력을 갖는 기형적인 분점정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완종 비자금 사건은 이러한 시기적 권력 분점의 결절점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그동안의 한국정치를 보면, 검찰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집권 중반기가 되면 검찰의 수사권에 모든 정치적 향방이 달려있는 사건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곤 합니다. 특검 제도가 생기고 난 이후 이러한 경향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번의 경우에서 보듯이 여당이 먼저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강조하니 말입니다. 집권 후반기 동안, 현 정부와 차기 정권을 취하려는 세력 모두 검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습니다.

야당이 무기력하고 여당이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실의 규명 책임은 사실상 검찰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밝혀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검찰은 선장과 선원들을 기소하고 유병언을 책임자로 몰았습니다. 세월호가 어떻게 도입되고, 과적을 하게 되고, 구출작전은 왜 실패하고, 그 시각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검찰은 많은 사실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기소를 하고 어떤 것은 애초에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검찰은 새로이 국방부를 휘하에 두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공개하고 어떤 것들은 자료를 확보한 채로. 비리로 구조에 투입되지 못한 통영함처럼, 검찰이 추가적으로 실적을 올릴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잘 활용하면서 그 권력을 시연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문제의 당사자인 해수부는 물론이고 구조작전을 담당한 행정안전부 역시 검찰의 권력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검찰은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많은 사실을 확보한 채로, 검찰은 사건을 종료했습니다.

검찰의 기소권 독점은, 우리 사회에서 사실의 규명과 책임의 소재를 밝히는 것이 왜 어려운가 하는 것에 대한 가장 명확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집권 초반, 청와대가 여야의 국회의원들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검찰이고, 집권 후반기에 그 모든 권력을 잃게 되는 것도 검찰 때문입니다. 선출되지 않으면서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인 검찰의 사법권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한,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사건의 사실이 규명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잔동 거리. ⓒ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 사건이 천재지변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여러 모순이 한꺼번에 응축되어 나타난 사건이고 그 희생자들은 결국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해결해가는 모습에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월호는 유가족에게 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좋은 정치를 만들지 못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언젠가 이 날이 한국정치가 새롭게 시작된 날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 조금 후에 되돌아보면, 이 모든 변화는 바로 그날 시작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와야합니다.

뒤쪽 칸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쉬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온 설국열차 같은 대한민국이 바뀌기 시작한 날. 정부의 기능은 관료주의를 떨치고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우선하며, 부정과 부패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악으로 인식되고, 경제는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고, 정치에서는 공공선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날로 기억되기를 바래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세월호 유가족의 한을 풀어내고,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길일 것입니다.

오늘은 하늘도 무심치 않은 것 같습니다. 희생자 여러분, 고이 쉬십시오. 언젠가 우리도 모두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무엇인가 할 말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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