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 제2의 아이히만을 만드는 사회

[김윤태 칼럼]무엇이 잘못됐나? 무엇을 할 것인가?

2014년 4월 16일 300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런 끔찍한 부조리가 국가와 기업에 의해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충격을 주는 동시에,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태도도 커다란 놀라움을 주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을 버리고 제일 먼저 구조선에 몸을 실었다. 그는 법정에서 퇴선 당시 구호 조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살인이나 도주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과적 책임은 "1등 항해사의 책임"이고, 부실한 안전 점검 보고서는 "관행이었다"고 주장했다.

제2의 아이히만을 만드는 사회

이준석 선장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나 살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호가 침수 한계선에 잠겼을 때 탈출 교신을 받았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이를 묵살했다. 그들은 "승객들을 어떻게 탈출시켜야 하느냐?"는 다급한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월호 선내에는 승객들에게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만 나갔을 뿐이었다.


나는 세월호 이준석 선장의 모습에서 독일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보여준 나치 비밀경찰 아돌프 아이히만을 연상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자"라고 적었다. 아이히만은 겉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의 법정 진술에서 처형당한 아이히만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2014년 모든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윤일병 사건'에서도 우리는 제2, 제3의 아이히만을 발견한다. 극단적 폭력이 일어나도 말리거나 저지하지 않고 방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을 준다. 이러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승객의 고통을 외면하는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심지어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 농성장에서 피자를 먹으며 '폭식 투쟁'을 벌이거나 "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회적 유대감이나 결속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유족을 만나길 피하더니 심지어 세월호 참사 1주기인 16일에 남미순방을 떠난다. 왜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생겨났을까?

국가의 쇠퇴, 국가의 횡포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청와대, 안전행정부, 해양수산부, 해경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재난에 대비한 위기관리도 실패했지만, 사후 조사와 문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는 오늘날 한국 국가의 성격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수많은 학생이 침몰하는 배에서 구조를 기다릴 때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국가는 없다"고 외쳤다. 2015년 벽두의 의정부시 오피스텔 건물화재 사건으로 4명이 숨지고 12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다시 사람들은 경악했다. 화재가 발생한 건물은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증가하는 1, 2인 가구를 위한 소형 주택을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스프링클러 등 소방 규정을 무시하고 허용한 것이다. 원룸형 주택의 참극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탈규제의 결과이다.


그러나 국가는 다른 상황에서는 공격적으로 나타났다. 용산 재개발 반대 시위에 경찰특공대를 보내고,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를 진압하고, 인터넷의 대통령 비판 댓글과 동영상을 샅샅이 뒤졌다. 심지어 국가는 세금을 받는 국정원 직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 직원을 동원해 인터넷 댓글을 달고 대통령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왜 어떤 상황에서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상황에서는 국가는 지나치게 강력한가? 질문은 국가가 있느냐, 없느냐 문제가 아니다. 질문은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상 국가권력은 소수의 특권 집단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국가를 지배하는가?

한국 국가는 항상 보편타당한 입법자이거나, 다양한 사회 계급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군사정부 시대에 한국 국가는 대기업과 결탁하여 노동조합과 시민에 대한 폭력과 배제를 일삼았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은 약화되었지만, 더 노골적으로 자본의 영향력이 커졌다. 때때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요구가 거세지면 후퇴하거나 타협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국가는 자본의 요구를 가장 중시한다. 막대한 부의 집중을 이룬 자본은 효율적으로 국가, 정당, 대학, 언론, 심지어 노동조합과 시민운동까지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시도한다.


국가의 폭력과 감시는 더욱 교묘해진 반면, 국가는 공개적으로 자본의 요구에 굴복하며, 심지어 자본의 요구에 따라 국가정책을 '탈규제'의 방향으로 변경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고,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는 암덩어리"라고 목청을 높였다. 여의도 정치는 비생산적이고 장외 정치는 경제를 망치는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는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정치는 실종되고,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진다. 바로 여기에서 세월호 참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탈규제 이데올로기의 결과

세월호 참사 이면에는 기업의 탐욕과 관피아의 부정부패를 합리화하는 탈규제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탈규제 이데올로기는 탈국가, 탈정치를 부추기고, 한국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다. 리바이어던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오죽하면 "2015년 새해 소망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떠돌겠는가? 국가의 약화는 곧 시장의 지배를 허용하고 자본의 독재를 정당화한다. 이윤의 논리가 사회의 운영을 통제하고 모든 시민의 삶을 질식하게 만든다. 자유 시장 속에서 사람은 기업의 도구가 된다.


1980년대 이후 전두환 정부는 통화주의 경제학을 수용하면서 경제 자유화를 추진하였고, 국가의 경제 개입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김재익 경제수석 등 미국에서 교육받은 새로운 경제 관료는 경제 자유화, 공기업의 사유화, 금융 세계화,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적극 지지하고 국가주의를 포기했다. 당연하게도 한국 국가의 '이념적 자살'은 한국 경제의 급속한 '미국화'를 부채질했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가 성공한 이후에도 국가는 점차 약화되었고, 시장은 기업의 손에 넘어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는 해외 자본의 개방, 공기업 민영화, 탈규제, 무역자유화, 노동 유연화를 실행하면서 경제의 신자유주의화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공공성의 약화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이 급속하게 약화되면서 시장의 힘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공기업 사유화(privatization)가 '민영화' 또는 '선진화'로 둔갑하고, 공공 서비스는 빈껍데기로 전락하고 있다. 공공 기관에도 경쟁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민간 기업의 논리를 적용하고 이를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라고 부른다. 공공 의료 기관에는 의사가 부족하고, 공립학교에는 수업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의료와 교육도 산업으로 간주되고, 영리 추구는 보편적 진리가 되었다. 건강과 인성 대신 국내총생산, 경제성장률, 일자리, 순익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이 아프고 감옥에 가야 국내총생산이 증가하는 현상을 경제성장이라고 강변한다. 극단적인 경제주의와 성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공공 서비스는 '공공의 적'이 되고 있다.


17세기에 토마스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은 시민의 지지를 받아야 했지만, 자본의 독재는 모든 시민 위에 '부드럽게' 군림한다. 자본은 억압의 수단 대신 유혹의 수단으로 사람들을 스스로 자본의 논리에 따르게 만든다. 국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자본의 지배를 쉽게 수용한다. 자신의 능력, 정신, 감정도 모두 자본의 논리에 따라 상품화하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다. 자신을 보호하는 국가를 경멸하는 대신 자본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주식 투자자가 증가하고 소비자는 증가하지만, 정당의 당원과 투표율은 감소한다. 재벌의 세습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다. 이렇게 국가가 조용히 죽어가면서 현대사회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하여

세월호 참사는 한국의 민주진보세력의 미래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먼저, 세계화와 경제 자유화의 변화 속에서도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진보정치의의 원칙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이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정부의 개입정책은 경제를 살리고 시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최악의 결과를 막을 수 있는 전략적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자유시장은 해결책이 아니라 무책임한 재앙을 만들 수 있다. 만약 진보적 정치세력이 공적 영역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결국 보수적 정치세력에게 권력을 내줄 수밖에 없다.


둘째, 진보정치의 대안은 시민사회의 협력을 통해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소수의 정부 관료와 전문가가 모든 사회적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막을 수는 없다. 재난사고와 기후변화와 같은 새로운 지구적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참여를 촉진하는 정책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진보정치의 원칙과 전략으로 현재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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