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잊어도, 엄마가 심장에 새길게"

[고잔동에서 온 편지<4>] 단원고 2학년3반 정예진 학생 이야기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이가 쓰던 필기구과 책상, 벽에 붙여놓은 메모지, 쓰레기통 안에 있는 휴지와 구겨진 종이까지. 모든 게 2014년 4월15일, 그 날에 멈춰 있었다. 그 방에 변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방의 주인이 사라졌을 뿐이다.

"4월이 되면, 이 집 앞 골목에 벚꽃이 활짝 펴요. 그러면 정말 벚꽃길이 장난 아니게 멋있어요. 애들이 그 벚꽃 배경으로 사진 찍고 나서 떠나버렸는데, 이제 또 벚꽃이 필 텐데…그땐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주인 없는 방 안의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쉰다. 친구들 사이에서 '미래의 슈퍼스타'라고 불렸던 아이, 벚꽃이 만개한 그 골목길을 친구들을 이끌고 누볐던 아이,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3반 고(故) 정예진 학생의 이야기다.

▲단원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날 즈음, 안산 고잔동 일대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아이들의 마지막 사진도 벚꽃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사진은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단원고 학생들의 모습.
예진이는 누구보다 활달하고 당찬 아이였다. 두 살 터울 남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 같은 학교 아이에게 이른바 "삥을 뜯겼"는데, 엄마 몰래 동생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삥 뜯긴' 5만 원을 돌려 받아올 정도로 야무진 아이였다.

애교는 별로 없는 딸이었지만, 부모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이였다. 동생이 학원을 빠지면 "너 엄마 아빠 학원비는 그냥 나오는 줄 알아?"라고 타박을 줄 정도로 속이 깊은 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독서실비를 한 푼이라도 아낀다고, 각자 시험기간이 다른 중학교 친구들을 모아 독서실 회원권을 공유해 사용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엄마에겐, 그 '알뜰함' 조차도 한이 된다.

"그 어린 애가 그렇게 돈을 아꼈어요. 나는 걔가 그랬던 거 생각하면, 버스비 1000원 아낀다고 학교에서 학원까지 걸어갔던 거 생각하면…너무 속상하고 짜증이 나…."

딸의 17년 짧은 생에, 엄마는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딸 머리카락 한 올까지 쓸어 담은 엄마

세월호 1주기를 한 달여 앞둔 지난 13일, 경기 안산시 예진이의 집에서 어머니 박유신 씨를 만났다. 단원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날 즈음 그랬던 것처럼, 부쩍 따뜻해진 공기에 얼마 후면 흐드러진 벚꽃을 만날 수 있는 봄의 시작이었다. 길고 긴 여름과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다.

▲예진이의 방. 엄마는 예진이 물건 하나하나가 아까워, 쓰레기통조차 비우지 않았다. 책상 옆으로 보이는 캐리어가 예진이가 수학여행 때 가지고 갔던 것이다. 예진이는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가방은 뭍으로 올라왔다. 생애 첫 수학여행, 엄마가 처음으로 사준 캐리어였다. ⓒ프레시안(선명수)

딸이 떠나고 난 뒤 엄마는 모든 것이 애달프고, 아깝다. 아이 방의 쓰레기통조차 비우지 않았고, 화장실엔 아직도 가족 모두의 칫솔 4개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같은 반 도언이는 (바다에서 나온 뒤) 엄마가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했다고 하는데, 그걸 못해서 너무나도 후회가 된다"는 엄마다. 팽목항에서 딸을 찾아 안산으로 올라온 뒤, 방 구석구석을 쓸어 겨우 머리카락 여섯 올을 찾아 빈 병 안에 고스란히 보관해왔던 엄마다.

딸의 흔적을 찾아 방바닥의 먼지조차 쓸어 담고 또 쓸어 담았을 그 엄마의 마음을, 그 당시 엄마의 절망과 무너짐을, 그 누가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젠 모든 게 아까워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모이면 다 '누구누구 엄마'라고 불리잖아요. 그래서 이름표에도 다 그렇게 쓰는데, 팽목항 도보순례 할 때 갖고 간 물건에도 전부 '예진이 엄마'라고 썼거든요. 샴푸 하나에도 예진이 이름을 쓰는데, 그거조차 잃어버릴까봐 너무너무 아까운거예요."

엄마는 몸에 늘 예진이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양쪽 귀걸이에도 딸의 이름을, 목걸이에도 '정예진'이라는 이름 석 자를 펜던트로 만들어 늘 지니고 다닌다. 금은방에서 먼저 떠난 딸의 이름을 목걸이와 귀걸이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딸과 늘 함께하고 싶은 엄마다.

"그런데 제가 도보순례 할 때, 귀걸이 한 쪽을 잃어버린 거예요. 정말 내가 미쳐…애도 잃어버린 엄마가, 이제 귀걸이까지 잃어버렸어…난 엄마도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결국 다음날 침낭에서 찾았어요. 그 귀걸이 한 쪽 찾고 나서 얼마나 안도를 했는지."

세월호 침몰 이후 1년. 고잔동을, 안산을, 아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그 동네를 떠나고 싶은 엄마도 있다.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의 기억인 탓이다. 한 단원고 희생자의 아버지는 지난해 청운동 농성 당시 천막 안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밤이 되면 바람과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천막 바깥 아스팔트 맨바닥에, 깔개 하나 깔고 잠을 잤다고 한다. "천막을 보면 팽목항의 시신 안치소가 생각난다"는 이유라고 했다. 그만큼 세월호는, 남겨진 가족에게 끝없는 고통의 기억이다.

반면, 무엇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엄마도 있다. 아이가 쓰던 방을 정리하지 못하고, 아이의 물건을 차마 태우지 못하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껴안고 싶은 부모도 있다. "잃어버린 내 새끼, 그 기억까지 잃어버리지 않게" 간직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다. 2014년 4월16일 이후, 안산에 남겨진 이들이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다.

▲ 단원고 2학년3반 교실의, 예진이의 책상. 수학여행을 떠난 3반 아이들 중 8명이 생존했고, 23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하늘 무대에 있을 예진이…엄마가 보고싶어 미치겠어"

예진이는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도 밤 12시까지 학원에서 연습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가장 좋아했던 동방신기 유노윤호와 같은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학교 축제 때 찍은 영상을 보면, 왜 '슈퍼스타'란 별명이 붙었는지 알거예요. 정말 예진이 춤추는 게 단연 돋보이거든요."

기억저장소 활동가 임기현 씨가 예진이의 사진을 스캔하다가 옆에서 거든다. 그 말에, 엄마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자랑 좀 해야지.(웃음) 예진이가 학교 봉사단 동아리를 했어요. 가끔 엄마 아빠랑 같이 주말에 봉사하러 가면, 그 어린 애가 할머니들을 번쩍번쩍 안아서 목욕시켜드리곤 했어요. 봉사가면 할머니들이 매니큐어 바른 것들을 자랑하거든요. 그럼 예진이가 그러는 거야. '아유~할머니 너무 고우세요!'. 그 쪼끄만 애가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 그 얘기 듣고 엄청 웃었어요.

아주 쾌활한 애였어요. 고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오후 수업시간에 애들이 졸면 '정예진 나와서 분위기 좀 띄워봐'라고 할 정도로…. 예진이한테는 말 안 했지만, 난 속으로 그런 게 너무 좋았어요."
아이의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며, 그 물건에 깃든 추억과 딸의 사소한 습관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표정이 어느새 밝아진다. 하지만 물 속에 딸을 두고 버텼던 시간과 다시는 만져볼 수 없는 딸의 이야기를 할 때, 엄마는 다시 무너진다. 예진이네 부엌 식탁 위엔 '화가 나고 잠이 오지 않을 때 드세요'라고 쓰인 약 봉투가 놓여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젠 그만 잊어라'고 할 때, 안산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은 이렇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한 달여 전, 단원고 교정에서 촬영한 2학년3반 아이들의 영상. 푸른색 상의를 입은 학생이 예진이다. 가정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같은 반 친구에게, "각자 만 원 씩 걷어서 같이 가자"고 제안할 만큼 착한 아이들이었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학생 7명은, 모두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7일 만에 엄마 품에 돌아온 딸…"바다에서 얼마나 무서웠니"

"97년생 애들은 정말 운도 없어요. 초등학교 때는 신종플루가 유행해서 수학여행 못 가고, 중학교 때도 다른 전염병이 유행해서 못 갔거든요. 이번이 첫 수학여행이었어요."

생애 첫 수학여행. 아빠가 건넨 용돈 10만 원 중 "이거면 돼요"라며 8만 원만 받아들고 수학여행을 떠난 예진이는, 금요일에 부모님과 동생 선물을 사서 돌아온다고 했던 예진이는, 집을 떠난 지 7일이 지난 후에야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처음으로 사준 보라색 캐리어도 뭍으로 올라왔다.

"예진이는 7일 만에 올라왔어요. 방금까지 살아있던 애처럼 올라 왔어요. 피부도 만져봤는데, 그냥 자고 있는 것 같았어요. 시계를 차고 나왔는데 깨진 유리에 10시20분으로 시간이 멈춰있더라고요. 혹시 애가 침몰 뒤에도 바다 속에서 살아 있었을까봐…그랬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면…아이는 갔지만, 난 그게 제일 마음이 아파요."

이젠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그 날, 엄마는 여느 때처럼 출근해 일을 하고 있었다. 직장 상사가 뉴스를 보고 사고 소식을 전했고, 오전 9시44분경 예진이와 통화를 했다. 배가 기울었는데 헬기도 보이고,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예진이가 갑판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10분 뒤, 예진이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좀 전까지는 괜찮았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 나 꼭 나갈 거야". 엄마는 "바보야, 당연히 살아서 집에 와야지"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엄마들에게 팽목항은 지우고 싶은, 지옥 같았던 기억이다. 엄마는, 새 옷을 사서 물에 젖은 옷을 갈아입힐 생각으로 신용카드 한 장 들고 진도로 향했다. 예진이는 생존자 명단에 없었다. 그 이후론 온통 절망과, 고통의 기억 뿐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는 예진이가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까봐, 혹시라도 늦게 나오면 알아보지 못할까봐 애가 탔다.

"정말 지옥이었어요. 안산 장례식장이 꽉 찬다고 해서 애를 찾기도 전에 장례식장 예약을 했는데, 예약한 바로 그날 예진이가 나왔어요. 안 나올까봐 너무 걱정했어요. 수학여행 가기 전에 어금니를 금으로 때웠는데, 나중에 알아보기 힘들게 되면 그걸로 확인하려고 치과에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금니로 때운 부분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정말 지옥이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진도 팽목항의 모습.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의 마음도 타들어갔다. ⓒ프레시안(최형락)

엄마와 함께 진도로 향했던 남동생은 누나의 죽음 이후 "이제 착하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요즘에도 종종 늦은 밤, 누나 방에 불을 켜고 멍하니 앉아 있곤 한다. "누나가 무서울까봐" 그런다고 했다. 엄마는 그 모습이 또 아프다.

장례를 치른 뒤 며칠 후에는, 곧 집에 오겠다던 예진이 아빠가 몇 시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딸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아빠다. "혹시 극단적인 생각을 할까봐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는데, 몇 시간 후에 돌아왔어요." 4월16일 이후, 세월호 유족들에겐 흔히 있는 일이다.

예진이와의 약속…"엄마가, 끝까지 밝혀줄게"

엄마는 지난달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도보순례를 마쳤다. 19박20일에 걸친 고된 여정이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는 것.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지 못해 속이 타는 엄마는, 그게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숙제라고 믿는다.

"목포 들어서고부터는 엄마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 때부턴 바다도 보이니까…. 저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진도에 가면 없는 거 아는데, 그런데 왠지, 진도까지 걸어가면 우리 예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거야…. 진도초등학교에 도착했는데,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나와서 박수치면서 맞아주더라고요. 우리 애도 여기 있어야 하는데, 정말 우리 애도 여기 있어야 하는데, 왜 우리 애는 여기 없는 건지…정말 미쳐버리겠더라고요."

예진이의 빈 방 의자엔 엄마가 도보순례를 하며 입었던 노란 조끼가 걸려 있다. 한쪽 벽면엔 '진실을 인양하라'고 쓰인 플랜카드가 붙어 있다. 그렇게 엄마는, "광화문에서 경찰들과 처음 대치했을 때 너무나도 무서웠다"는 평범했던 엄마는, 예진이와의 약속을 새기며 2015년 봄을 맞는다. "바다 속에서 우리 애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면, 그런 건 공포도 아니잖아요."

▲예진이의 '버킷리스트'. 엄마는 8번 문구를 보며 가장 많이 울었다고 한다. ⓒ프레시안(선명수)

예진이가 떠나고 난 뒤, 엄마는 빈 방을 뒤적이다가 누런 종이에 쓰인 예진의 버킷리스트를 발견했다. '못해봤던 거, 못 입던 거, 못 먹었던 거 해보기',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도록 살기'. 10여 가지의 '희망 목록' 사이에, 엄마는 유독 8번 글귀를 보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예진이의 버킷리스트 8. 부모님께 후회 안하도록 효도하고 죽기.'

'다른 건 몰라도 예진이가 8번은 이루고 떠났을 거예요.' 다시 눈가가 붉어진 엄마에게, 입 안에 맴돌던 그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예진이의 사진이 곳곳에 걸린 거실 안. 열어둔 창문 사이로 4월의 그날처럼 봄의 기운을 담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슈퍼스타 예진이에게, 엄마가 보내는 편지…"엄마가 심장에 새길게"

엄마는 지금도 예진이가 보고싶을 때면, 종종 단원고 교실을 찾습니다. 책상을 쓰다듬으며 예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씁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알리는 서명을 받을 때도, 팽목항까지 길고 긴 도보순례를 떠날 때에도 힘들 때면 딸을 향한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2014년 4월16일 이후, 예진이 어머니 박유신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편지글을 동의를 얻어 일부 그대로 소개합니다.

'우리에겐 그리운 얼굴이 누군가에겐 두려움이라 이렇게 마주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지금도 고잔동의 거리엔 단원고 희생 학생의 부모님이 쓴 플랜카드가 달려 있었습니다. 별이 된 304명의 희생자들과, 남겨진 가족들이 묻습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이제 고작 1년. 이렇게 잊어도 되는 걸까요?

ⓒ프레시안(최형락)


ⓒ박유신

2월17일
예진아
엄마
우리딸 보고싶어
미칠거같은데
어떡해야하니..
여전히
너희들 웃음소리가
들리는거같은데
불까지 꺼진
교실을 보니
엄마 너무 아프다
속상해서
불이란 불은
다 켜놓고 왔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해서
막 욕두하구 왔는데
친구들한테
창피하진 않았는지...
왜 너희들한테
몹쓸짓을 한걸까
왜그랬을까
정말 왜그랬을까
너무 보고싶다
너무 보고싶어
사랑하는 내딸
정예진
언제쯤 볼수있는걸까

ⓒ박유신

2월15일
4월16일...
피말리며
널 데리러
팽목을 갔었지
그곳에서
엄만 지옥을 만났구...
너무 그리운 예진아
이번에두
막연하게
팽목에가면
널 만날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걸었던거같애
너만 생각했어 걷는 동안..
널 느꼈구..
바람에두 햇빛에두
구름에두..
헤아릴수도
없을만큼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엄마 말 들었니?
정예진
엄마딸
슈퍼스타
정예진
엄마가
우리딸
엄마심장에 새길께
아무 걱정마
꼭 밝혀줄께
그리구 꼭 만나자
꼭 그러자
사랑해
ⓒ박유신

2월8일
사랑하는 엄마딸
너무나 그리운 엄마딸
엄마 오늘은 더 보고싶고
서글프다
14일째 ...
오늘은 광주를 걸었어
내일이면 우리딸 별이된지
300일이래...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
억울해 돌겠는데...
살아나온 네친구들보니
어찌나 부럽던지...
네가 살아왔다면
절대 가만 있지 않을텐데
여러가지로 속상하고
힘든 하루다
추웠단말도 너한테 미안해서...
의찬이도 챙겨야하는데
이렇게 엄만 너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하겠다
몸이야 때가되면 되는데
에휴..
너만 있으면 되는데
속상해
엄마 너무 아프다
예진아
예진아
내딸
정예진
사랑해
ⓒ박유신

1월31일
예진아~~
너무도 그리운 엄마딸
엄마는 우리애기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녹아내리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버티는데...
넌 엄마를 지켜주는구나
역시 착한 딸
한걸음한걸음 내딛을때마다
발에 느껴지는 통증 장난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해줄수 있다는게 아프면서도
행복해
오늘은 세종시 정부청사도
걸었어
교육부 앞에 서니 억울해 환장하겠더라
노란리본을 문에 달고
다시 걸음 떼면서
서럽구 너가 너무 보고싶어 또
폭풍 오열했어
예진아! 엄마 보고싶어도
조금만 기다려 엄마 잊으면 안돼???
엄마가 꼭 밝혀줄께
사랑해
내일두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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