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경종·정조 연거푸 독살? 의학으로 검증해보니…

[프레시안 books] 이상곤 <왕의 한의학>

목수가 땅바닥에 집을 그렸다. 흔히 지붕부터 그리는데, 목수는 달랐다. 먼저 주춧돌을 그리고,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함께 징역살이를 한 목수 이야기다. 신 교수는 "목수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다고 적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라는 설명이다.

이상곤 박사가 낸 책 <왕의 한의학>(사이언스북스, 2014년 12월 펴냄)을 읽으며,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현직 한의사가 정리한 조선 왕들의 몸과 질병의 기록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등을 꼼꼼히 살폈다. 조선의 사관들이 왕의 일상생활과 약물 처방 및 투약 뒤 증상 변화 등을 세밀하게 기록해뒀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우리는 흔히 정치와 문화의 변화를 중심에 놓고 역사를 이해한다. 어쩌면 이런 방식은, 지붕부터 그린 집 그림과 마찬가지 아닐까. 삶의 기쁨과 괴로움은 결국 몸에 새겨지기 마련. 몸에 관한 기록을 살피는 건, 역사를 낮은 자리에서 이해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왕의 몸'을 통해 조선 역사를 들여다본 저술에서, 주춧돌부터 그린 목수 이야기를 떠올린 건 그래서였다.

조선 왕들은 왜 즉위하자마자 약골이 됐을까

ⓒ사이언스북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세종 7년 임금을 괴롭힌 질병의 원인은 아마 세종의 재위 초반에 벌어진 일들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 곧이어 국상이 이어졌다. 동생 성녕대군(세종 즉위년), 큰아버지 정종(세종 1년), 어머니 원경왕후(세종 2년), 아버지 태종(세종 4년) 순으로 줄초상을 치러야 했다. 3일장도 힘들다고 하는 판에 3년상을 연년으로 치르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을 것이다. (…) 세종은 정종부터 태종까지 세 번의 3년상을 예법에 따라 성실하게 치렀을 것이다. 세종의 심리적,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세종 4년의 허손병을 둘러싼 소동은 견디다 못한 세종의 육체가 내지른 비명일 것이다. (…) 세 차례의 국상을 치르면서 20대의 세종의 몸이 관을 짤 정도로 허약해졌음을 알 수 있다." (28~30쪽)

현직 한의사의 눈으로 보면, 세종이 재위 기간 내내 온갖 병치레에 시달렸던 이유가 또렷이 드러난다. 다시 이어지는 내용.

"즉위와 함께 국상을 치르며 왕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는 것을 이후 우리는 후대 왕들의 기록에서 수차례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30쪽)

아버지의 죽음, 임금 자리에 오르는 부담. 이 두 가지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다. 까다로운 예법에 따라 상례를 치르는 일은, 새로운 왕의 자질과 교양을 확인받는 첫 시험대였을 게다. 지금의 고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쟁률이 높았던 과거 시험을 통과해, 평생 성리학 교양을 쌓아왔던 자존심 높은 신하들이 '매의 눈'으로 왕을 지켜본다. 이들을 다스리려면, 왕은 첫 시험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필연이다. 왕은 용상에 앉는 순간부터 몸이 망가진다.

조선 왕 가운데 상당수가 재위 기간 내내 온갖 병에 시달렸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 즉위와 함께 치러지는 '3년상'을 꼽은 저자의 안목이 날카롭다. '몸이 겪는 피로와 스트레스'라는 눈으로 살폈기에 가능한 통찰이다.

왕의 치료, 통섭형 인재들의 논쟁이 지닌 한계

조선 왕의 몸 상태는, 그 자체로 조선 정치의 핵심 변수였다. 빼어난 자질을 지녔던 세종이 재위 기간 내내 건강했다면? 그 뒤를 이었던 문종의 종기 치료가 원활했다면? 조선 역사는 많이 달랐을 게다. 세조의 쿠데타도 없었을 테고, 훈구파가 전횡을 부린 조선 초기 역사도 달라졌으리라.

후기 역사도 마찬가지다.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가 건강했다면? 효종의 종기 치료가 잘 이뤄졌다면? 조선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니, 어쩌면 부질없는 상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왕의 몸에 대한 기록이 지닌 가치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왕의 몸은 정치의 핵심 변수였으므로, 왕의 병과 치료 역시 당대의 논쟁거리였다. 게다가 조선의 선비 중엔 성리학 교양과 의학 지식을 겸비한 '유의(儒醫)'도 많았다. 전문가에게 뒤지지 않는 의학 지식을 갖춘 왕도 있었다. 예컨대 정조가 그렇다. 이들은 종종 왕의 치료 방식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의학 논쟁인 동시에 정치 논쟁, 철학 논쟁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빌자면, 통섭형 인재들의 논쟁이다.

동시에 이런 특징은, 한의학이 치료 의학으로 발전하는 데 장애 요소가 됐다.

"전문 기술자인 어의들이 진단·처방을 하고, 성리학자인 대신들이 자문 역으로 참여해 토론하며 최선의 처방을 도출할 수 있도록 설계된 당시 조선의 내의원 시스템은 도리어 의학의 기술적, 이론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내의원의 삼제조로 왕의 진료와 치료에 참여한 성리학자 대신들은 거시적 총론에는 강했지만 미시적 각론에서는 예리한 기술적 진보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 일쑤였다." (12쪽)

이런 고민은, 꼭 의학에만 적용되는 게 아닐 테다. 특정 분야에 깊은 지식을 지닌 전문가와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갖춘 교양인이, 중요한 의사 결정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도 통한다.

<삼국지연의> 화타의 수술 전통은 어디로 갔을까?

<삼국지연의> 독자라면, 후한 말기의 의사 화타가 관우를 치료하는 장면을 기억한다.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사용해서 수술을 한다. 저자에 따르면, 화타의 외과 치료술은 인도 의학에서 전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취제 '마비산'은 대마와 만다라화로 만들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신농본초경>과 <명의별록>에는 대마의 향정신성 효과가 기록돼 있다. <중약대사전>은 만다라화의 마비 효과와 독성을 지적했다.

동양 최고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연의>에도 기록된 한의학의 외과 치료 전통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기술과 지식이 계승·발전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일단, 저자는 전통 의학에도 외과 치료 기능이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게 침으로 종기를 치료하는 방식이다. 그저 찌르기만 하는 게 아니다. "X자 모양으로 종기 부위를 절개하는 관혈적 절개술이나 침자절개법 같은 침으로 하는 수술 치료법"이 존재했다(260쪽). 그러나 한계 역시 분명했다.

"외과적 종기 치료법은 조선 의학의 앞길을 가로막은 성리학 원리주의의 벽에 작은 구멍을 냈다. 그러나 그 벽은 너무 높았다. 결국 조선의 의학은 성리학이 쳐 둔 테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61쪽)

왕처럼 사는 우리, <왕의 한의학>에 기대 거는 까닭

저자의 미덕이 빛나는 대목이다. 저자는 전통 의학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 약점과 한계도 인정한다. 실제로 다산 정약용 등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전통 의학의 미신적 요소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졌다면, 그래서 내부의 비판을 통해 전통 의학이 새로운 균형을 찾았다면, 그 바탕 위에서 서양 의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시나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 실제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20세기 초중반의 역사는 전통 의학을 폭력적으로 거세했다. 일부 한의사들은 재야에서 동서 의학의 공존을 모색하며 한의학의 새로운 길을 찾아나갔다. 1921년 설립된 동서의학연구회가 그 결실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단체를 감찰 대상으로 삼았고, 정기적으로 사찰을 했다. 이 단체 회장 중 한 명이 지석영이다. 그는 당시 치명적인 유행병이었던 천연두에 대한 예방접종인 '우두법'을 보급했다.

저자는 말한다. "동서 의학의 병행 발전과 융합을 꿈꿨던 한말 풍운기 우리 한의학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왕의 한의학> 저술을 가능하게 했던, 조선 왕들의 몸에 대한 꼼꼼한 기록.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조선 성리학자들의 기록 문화는 저자가 꿈꾸는 도전을 가능케 하는 밑거름이다. 이는 그저 수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몸과 조선 왕의 몸은 얼마나 다를까. 삶의 조건만 놓고 보면, 닮은 점이 많다. 풍요로운 식단과 극심한 스트레스, 과로와 운동 부족, 청소년기의 혹독한 학습 노동. 이런 조건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 왕들의 질병과 치료에 대한 기록을 탐구하는 건, 지금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줄 수 있으리라. <왕의 한의학> 이후의 작업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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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설, 대부분 근거 없다

동시에 <왕의 한의학>은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은 책이다. 조선 후기 역사는 페이지마다 왕의 독살설로 점철돼 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이복형제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실제로 이런 의혹에 바탕을 둔 반란 사건도 있었다. 경종이 죽기 전에 게장과 생감을 먹었고 이는 한의학적으로 치명적인 위험을 낳는다는 논리인데, 저자는 경종 독살설이 근거 없다고 본다. 우선 경종이 함께 먹었다는 게장과 생감에 대해선 "이 둘의 조합이 독약도 아니고, 실제로 먹어 봐도 꼭 못 먹을 것도 아니며, 영조가 게장과 생감을 진어했는지도 불분명하다"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경종의 죽음이 일종의 '약화(藥禍) 사고'라고 본다.

이 같은 해석은 '독살설'이 뒤따르는 다른 왕들에게도 적용된다. 노론에 의한 독살설이 종종 제기됐던 정조 역시 '약화 사고'로 죽었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또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은 '의료 사고'로 죽었다고 본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서양 문물에 눈떴다는 소현세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인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설이 종종 제기됐다. 하지만 저자는 소현세자가 학질을 앓았으며, 오진과 잘못된 치료로 인한 의료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조선 왕의 독살설은 종종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됐다. 또 일부 역사 저술가들이 도발적인 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의학 논리로, 이런 가설을 검증한 경우는 찾기 힘들었다. 독살설을 소재로 한 소설과 드라마를 떠올리며 <왕의 한의학>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몸에 새겨진 진실 캐는, '낮은 눈'으로 본 역사

이 글 도입부에서 집을 그릴 때 주춧돌부터 그리는 목수 이야기를 소개했다. 거짓말은 있어도, 거짓 몸짓은 없다. 선비가 목수 흉내를 낸다 한들, 거친 손마디와 재빠른 손놀림까지 꾸며내지는 못한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몸에 새겨진 역사를 캐는 시도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주춧돌부터 그리는, 낮은 눈으로 본 역사 기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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