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글로벌 도시' 상하이의 이면

[차이나 프리즘] 상하이 노동자 거주지역의 역사적 변화

1. 중국공산당, 도시를 접수하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전국은 구(舊)해방구, 신(新)해방구, 대도시중심지로 나눠진다. 구해방구는 화베이(華北)와 동베이(東北)의 전 지역 및 화동(華東)과 시베이(西北)의 일부지역으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에 이미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어 토지개혁이 이뤄지고 기층까지 당조직이 건설된 지역이다.

신해방구는 화동과 화중(華中)의 대부분 지역과 시베이의 거의 모든 지역 및 창장 이남의 광대한 지역 전체로서, 공산당의 조직적 자원이 없고 반(反)공산당 역량이 강고한 곳이다. 대도시중심지는 1948년 후반 이전까지는 공산당이 장악하지 못하고 주로 지하세력으로 활동한 지역이며, 건국 초기 권력을 장악한 인민해방군과 농촌지역에서 경력을 쌓은 공산당 간부들은 이 대도시지역에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이러한 대도시의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상하이(上海)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되기 4개월쯤 전인 1949년 5월 27일 상하이를 지키던 5만 명의 국민당 군대가 인민해방군에게 항복함으로써 상하이는 중국공산당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다.

건국 초기 "신중국"(新中國)을 건설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 도시들은 "구중국"(舊中國)의 상징으로 소비와 향략의 "자본주의 공간"이었다. 1842년 아편전쟁 패배에 따른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영국의 조계가 설치된 이후 100여 년 동안 제국주의와 국민당 정권에 의해 지배된 상하이는 이러한 "구중국의 자본주의 공간"의 대표로 간주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가 지배했다는 사실 때문에 상하이는 1949년 이전 중국 최대의 근대적 공업중심지이자 경제중심지였다. 따라서 공산당은 상하이를 철저히 개조함으로써 이념적인 측면이나 국가운영 측면 모두에서 사회주의 도시건설의 전형으로 삼으려 했다.

2. "신중국" 최초의 노동자 거주지역, 상하이 차오양신촌
건국초기 상하이 도시 개조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입장은 한마디로 "노동자계급이 주인이 되는 생산의 도시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 이전의 상하이가 자본가, 제국주의자, 군인, 관료, 지주들이 주인이었던 것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념적으로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기 때문에 상하이라는 도시의 주인은 노동자들이 되는 것이고, 노동자들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사회주의 건설에 앞장서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공산당은 이들이 도시에서 거주하는 지역인 "공인촌"(工人村)을 대규모로 조성함으로써, 상하이라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대경제도시의 주인은 노동자계급이라는 것을 도시경관 차원에서 보여주려 했다.
건국 이전 상하이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은 판자촌과 같은 열악한 곳이었다. 건국 이후 상하이가 직할시로서 지정되고, 앞서 언급한 이념적 정책적 이유 때문에 주택과 각종 부대시설을 포함하는 노동자 거주지역인 차오양신촌(曹楊新村) 건설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1952년 5월 노동절을 전후하여 차오양일촌(曹楊一村)이 완공되고 7월에 입주가 이뤄진다.

상하이 푸퉈구(普陀區)에 위치한 차오양신촌은 사회주의 중국 최초의 노동자 거주지역으로 당시 중국 전역의 "선진노동자, 모범노동자, 고급기술자, 우수당원, 애국인사"들이 주로 입주하였고, 1990년대 초까지 차오양구촌(曹楊九村)까지 완공된다.

차오양신촌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은 물론, 식료품 가게, 영화관, 이발관, 사진관, 유치원, 문화관 등 노동자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건국초기 상황에서는 최고 조건을 가진 거주지역이었다. 이러한 특별대우는 당시 주석이던 마오쩌둥(毛澤東)이 노동자들에 생활조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상하이 시장 천이(陳毅)가 "생산을 위해 복무해야 하고, 노동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계급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도시건설 방침을 제시하여 차오양신촌 건설 과정을 직접 챙겼기 때문이다.

1952년의 차오양신촌 건설을 시작으로 다른 지방에도 노동자 거주지역이 건설되고, 1953년 1월에는 동북지역 선양(瀋陽) 테시구(鐵西區)에 전국 최대의 노동자 거주지역인 공인촌(工人村)에 입주가 시작된다. 이처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는 노동자 거주지역이 조성되는데, 대부분의 노동자 거주지역은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공장과 같은 부지에 속해있거나 근거리에 위치했다.

중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속한 공장 혹은 직장을 단위(單位)라고 하는데, 단위는 같은 단위 소속의 노동자들을 그 내부의 당 조직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지배 동원하고, 노동자들에게 의료, 교육, 문화, 주택 등의 복지를 제공했다. 즉 사회주의 시기 중국의 도시에서 단위는 상층의 당-국가에서 요구하는 정치적 동원과 물자의 생산을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무상이나 다름없는 저렴한 가격의 노동자 거주지역의 주택과 기타 사회경제적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소속 노동자들의 일체감과 정체성을 확보하고 노동자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3. 개혁기의 노동자 거주지역

사회주의 시기 건설된 노동자 거주지역들은 개혁기에 들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이 개혁개방을 결의한 이후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함으로써 단위들은 사회주의 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기존에 노동자의 정치적 충성심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여 단위 내부에서만 지급되던 일상생활의 각종 필수품들이 이제는 개혁기에 등장한 시장에서 돈을 주고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바뀐 것이다.

이로 인해 그러한 필수품들의 지급여부에 의해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지배하던 기존의 단위체제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개방에 따라 기존에 금지되었던 사상과 문화가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여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단위 내부 노동자에 대한 공산당 조직의 정치적 지배도 예전만큼 확실하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도 단위 소속 노동자들이 단위에 대한 소속감이나 정체성 및 충성심이 약화된 결정된 계기는 1998년 공유제(公有制) 주택제도의 폐지였다. 건국초기부터 노동자 거주지역을 조성하고 노동자들에게 단위 소유의 공유제 주택을 무상으로 지급하던 제도가 공식 폐지된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더 이상 무상주택을 얻을 수 없게 됐고 "상품주택"을 주택시장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했다.

이로써 단위는 사회주의 시기처럼 소속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사회경제적 복지를 제공하는 중국 특유의 사회적 실체로서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점차 일반적인 의미의 "직장"에 가까운 실체로 점차 변화되었으며, 사회주의 중국 도시경관의 중요 구성요소였던 노동자 거주지역은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중국 최대의 노동자 거주지역이었던 선양 테시구의 공인촌은 현재 거의 해체되고 몇몇 건물만이 거주용도로 사용하거나 "노동자 생활관", "노동자 수장관" 등의 이름을 가진, 과거를 기념하는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이 전시관들이 공인촌이 과거 사회주의 중국의 대표적인 아이콘 중 하나였음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기존에 공인촌에 거주하던 노동자들은 이제 대부분 테시구의 국유기업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사를 갔거나, 국유기업 개혁과정에서 해고가 되어 공인촌을 떠났다. 기존에 공인촌에 거주하던 일부 노동자들은 "모범노동자"라는 칭호를 받고 정부가 새로이 조성한 "공인신촌"(工人新村)으로 옮겨가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지만, 모든 물자가 열악했던 시기인 1953년 초 입주가 이뤄질 시기에 "아랫집 윗집, 모두 전등 전화"(樓上樓下, 電燈電話)가 상징하는 우월한 생활조건으로 만인의 부러움을 샀던 "선진 노동자계급"의 거주지역인 공인촌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이러한 선양 테시구 공인촌의 변화는 2000년 초반 중앙정부 차원에서 추진된 동북지역 노후공업기지 개조과정에서 가속화된 것이며, 건국 초기부터 전국적으로 건설된 노동자 거주지역들이 겪고 있는 개혁기의 현상(現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4. 철거, 젠트리피케이션, 국제대도시

차오양신촌은 앞서 살펴본 다른 노동자 거주지역들과는 달리 외형적으로 쇠락되지 않았고, 개혁기에 들어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오히려 새로이 건설되고 확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하이 차오양신촌은 더 이상 노동자들만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 아니고,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존엄의 생활공간"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도 더 이상 "생산의 도시"가 아니다. 상하이를 대표하는 도시이미지는 더 이상 노동자 거주지역(=차오양신촌)이 아니라, 초호화 종합 쇼핑몰 신텐디의 스쿠먼(石庫門 : 옛상하이의 건축양식)이라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차오양신촌의 위상변화는 개혁기 중국 노동자들의 위상변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 상하이의 상징인 동방명주탑(왼쪽에서 다섯번째 건물)을 비롯해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푸동지역 ⓒ연합뉴스

1990년에 국가급 개발구로 지정된 상하이는 1990년대 내내 도심지역을 재개발했고 이로 인해 도심 공간구조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심에 있던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은 철거되어 주민들은 교외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는 고급주택, 쇼핑몰, 문화시설, 교통인프라 등이 들어서는데, 현재 상하이 도심을 동서로 연결하는 옌안고가로(延安高架路)도 장래 증가할 교통량에 대비해서 이때 건설된 것이다.

이렇듯 도심의 노동자 공간이 개혁기 등장한 부유층의 공간으로 대체되는 중국식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고급화)은 다른 국가의 사례와는 달리 철저히 토지소유권을 보유한 국가에 의해서 주도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하이 도심재개발을 통해서 발생한 철거민들은 소액의 보상금을 받고 열악한 조건의 주택을 구하거나 아니면 국가(여기서는 시 정부나 구 정부) 주도로 개발한 푸동신구(浦東新區)의 임대아파트에 대량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주도의 1990년대 도심재개발과 2000년대 상하이 엑스포 건설로 발생한 철거민의 숫자와 철거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알려진 바 없으며, 상하이 도시건설 아카이브인 상하이시 성시건설당안관(上海市城市建設檔案館)에 관련 공문서 자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중국인 연구자들도 이들 자료들에 대한 접근은 용이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철거민들의 투쟁과 저항에 관한 어느 해외 중국인 연구자에 의한 연구서 <상하이 사라지다>(SHANGHAI GONE : Domicide and Defiance in a Chinese Megacity, 친샤오 지음, 2013)가 출간되었을 따름이다.

개혁기 차오양신촌으로 대표되는 상하이 노동자 거주지역은 그 외형적인 쇠락여부와 무관하게 더 이상 상하이의 아이콘이 아니고, 대신 금융, 무역, 물류, 서비스의 중심도시를 나타내는 "국제대도시"(Global City)가 21세기 상하이의 상징이자 지향점이 되어버렸다. 상하이가 꿈꾸는 국제대도시의 청사진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푸동신구의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해서 판단하면, 금융개방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투자와 교역의 "순수한 자본의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시티 상하이는 생산자가 주인이 되는 도시라는 '숭고한 이념'을 노동자 거주지역으로 실현하려했던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렸다. 글로벌시티가 금융, 서비스, 교통, 생산의 허브로서 글로벌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중심지이지만 동시에 글로벌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안적 주체들을 생산해내는 공간이라는 저명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의 주장이 상하이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차이나 프리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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