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박정희 쿠데타를 묵인했을까?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III.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1. 1960년대 한국 정치와 미국 (2)

1960년 4월 혁명에 의해 이승만이 물러난 뒤에도 한국의 정세는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자유당 일각에서는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재추대하려는 은밀한 움직임도 있었다.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학생 데모와 아울러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던 어용교수 퇴진 등을 위한 학원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다양한 문화단체들은 부패한 정권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봉사했던 문인과 예술인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에 미국 국무부는 한국에 "또 다른 폭발"이 발생하면 1958년 9월 쿠데타를 통해 버마 (미얀마)의 과도정부 수반이 된 "네윈 (Ne Win)이 통치하는 것 같은 잠정적 통제(Ne Win-type of interim control)"가 필요하다고 주한미국대사관에 통보했다. 한국의 안보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민중혁명의 발전을 강력한 군사독재로라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허정 과도정부는 1960년 6월 제2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마련하여 7월 29일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확정했다. 미국 국무부는 새로 들어설 한국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주요 내용은 ①민주당이 다수파가 되도록 지지하고, ②장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도록 하며, ③이종찬이 국방부 장관에 유임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 1960년 4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거리에 선 교수들 ⓒ연합뉴스

첫째, 국무부는 내각제 아래에서 미국의 목표와 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온건한 다수파가 필요한데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룹은 민주당뿐이라고 생각했다. 국무부가 이상적으로 삼은 한국 국회의 모습은 온건한 민주당이 다수파가 되고, 보수 그룹이 소수파가 되며, 진보 그룹이 제 3세력으로 구성되는 것이었다. 보수 그룹은 나중에 정부가 바뀔 때 옛 자유당 의원들을 포함한 야당 의원들을 포용할 수 있고, 진보 그룹은 사회주의 지향적인 사람들에게 활동 무대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지하로 잠복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의도였다. 특히 이 진보 그룹은 공산주의자들의 명확한 목표가 될 것이므로 보안 감시의 초점을 편리하게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둘째, 국무부는 새 정부를 이끌 지도자로 친미적인 장면을 선택했다. 그를 대통령으로 삼아 그의 성실성과 국제 정세에 관한 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는 계산이었다. 만약 장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고 총리가 되면 정부의 지도력이 약해지고 민주당 안에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장면 자신도 매카노기에게 대통령직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무부가 구상했던 장면 대통령과 윤보선 총리 구도는 7‧29 총선에서 민주당 구파가 더 많이 당선됨으로써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라는 정반대 체제가 되고 말았다.

셋째, 국무부는 한국 군부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성실성과 능력을 갖추고 신망을 받고 있는 이종찬이 국방부 장관으로 유임되길 원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친미적인 이종찬에게 미국의 지지를 확신시키는 것이 당시 떠돌던 군사쿠데타 소문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늦어도 1960년 6월부터 쿠데타 소문들을 듣고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 8월 들어선 민주당 정부에서 이종찬은 유임되지 못했다.

미국이 4월 혁명 이후 허정 과도정부에 이르기까지 지나칠 정도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면서도 의도했던 대로 장면 대통령 선출과 이종찬 국방부장관 유임을 실현시키지 못한 이유의 하나는 4월 혁명으로 한국에 "결연한 자주적 풍토"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영향력 행사의 어려움과 위험을 느끼고 선거 과정에서 개입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무부는 7‧29 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가 미국의 목표에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주한미국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이 내정에 간섭한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라고 지시했지만, 매카노기는 선거운동 기간 중 미국대사관의 "부당한 시도"를 한국인들이 주시하고 있음을 느낀다며 정치 지도자들을 접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응답했던 것이다.

장면 내각이 들어선 뒤 장면과 미국을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4월 혁명의 영향으로 불붙은 민족통일 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이었다. 1960년 6월 재미동포 김용중과 일본에서 귀국한 김삼규에 의해 시작된 통일 논의는 7‧29 총선을 계기로 진보적인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곧이어 언론과 문단 및 학원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통일론의 전개는 대부분 자주와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한 교류나 중립화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의 자주는 외세의 배격을 의미했고 외세의 배격은 주한미군의 철수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9월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발기된 데 이어, 11월부터는 대학생들의 통일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장면은 11월 4일 정부의 정책과 다른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선도책을 펴되 과격한 행동은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미국 국무부는 11월 5일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을 달성한다는 결의를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 세력과 학생들의 통일 논의는 중단되지 않았고, 11월 16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분규와 관련해 미국인 이사장과 총장 서리의 본국 소환을 외치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반미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나라와 학원의 민주화는 달러가 보증해 주지 않는다"며 "달러가 가져오는 노예근성"부터 막아야 한다는 결의문까지 나왔다. 4월 혁명은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에까지 민족주의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통일운동은 날로 확산되어 1961년 초까지 전국적으로 각 대학교 및 20여 고등학교에까지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고, 사대당을 비롯한 혁신 세력의 일부는 여전히 한국의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거나 남북교류를 촉구했다. 특히 미국과 직접 관련된 문제로 1961년 2월 체결된 '한미 경제협정'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양키 고우 홈!"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1950년대 이후 남한에서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혁신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 및 대학생들은 그 협정이 한국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시키며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하는 불평등 조약이라며, 전국적으로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그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다. 그리고 2월 중순부터 수천 명의 주한미군부대 종업원들은 한미행정협정 (SOFA)의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장면 정권은 1961년 3월 국가보안법을 보강하고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통일운동과 데모에 강력하게 대처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2대 악법 반대투쟁'이라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반발을 초래하여 '장면 정권 규탄대회'로 이어지게 했으며, 4‧19 1주년 기념일에는 "반혁명적 보수 야당"이 "외세와 결탁하여" 4월 혁명을 중도에서 정지시키고 말았다는 '4‧19 시국선언'이 발표되고 "외세는 물러가라"는 구호마저 거리낌 없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 데모는 '백만인 서명운동'으로 발전했다.

반미감정까지 표출되는 한국의 불안한 상황에 직면해 미국은 1960년 말부터 군부에 의한 정권교체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4월 혁명에 영향받은 혁신 세력의 진출과 민족주의의 발흥 및 자주적 통일운동의 전개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며, 한국 정치의 안정과 미국의 안보 이익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허약한 장면 정권을 대체할 강력한 군사정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중앙정보국 (CIA)은 늦어도 1961년 4월부터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쿠데타 음모가 서울에서는 "널리 알려진 소문난 비밀"이기도 했다. 당시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실바(Peer Silva)가 1978년 펴낸 회고록에 따르면, 미국 정보요원들은 쿠데타가 일어나기 며칠 전 박정희의 측근 참모를 통해 구체적 계획까지 알고 있었다.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미국은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하면서도 쿠데타를 저지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5월 16일 새벽 3시경 장도영이 매그루더 (Carter Magruder)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박정희의 쿠데타 시도를 보고하며 쿠데타 진압을 미군이 도와주도록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미국 관리들은 쿠데타 발생 직후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공산주의 전력을 알았지만, 그가 한국전쟁 이후 분명히 반공주의자로 변했으며 그를 포함한 쿠데타 주도자들의 행위에서 "친공 혹은 반미감정의 증거"가 전혀 없음을 파악하고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를 꺼려했다. 덜레스 (Allen Dulles) 중앙정보국장이 이 쿠데타를 가리켜 자신이 재임 중에 중앙정보국의 해외활동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사건이라고 증언한 배경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4월 혁명의 발발에 힘입어 미국의 기대와 지지를 받고 총리가 된 장면은 1년도 못되어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했고, '반공 친미'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국의 승인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공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 이와 관련해 국무부 출신 한국전문가 헨더슨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국 군부는 은밀하게 경찰을 대신해 안보를 위한 도구로 나섰다. 군부는 미국 정부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가장 큰 재정 지원을 받으며 가장 잘 훈련된 기구였다. 군부의 반공주의는 악의적이고 제도적으로 되었다. 박정희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자마자 군부는 재빨리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체계적인 감시 장치를 구축했고 굳건하고 극단적인 반공정책을 폈다"

반공 강화와 아울러 반미감정의 표출은 즉각 억압되었다. 군사정권은 다양한 종류의 문화 예술 단체들을 해산하고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했다. 문학예술 작품을 통한 미국에 대한 비판조차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벌되었다. 박정희 군사독재는 문학예술 속에서도 반공과 친미를 결합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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