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정조, '불통' 박근혜…"한국 지배층, 아직 멀었다"

[프레시안 books : 저자, 책을 말하다] '세기의 서' 네 번째 <18세기, 왕의 귀환>

'민음 한국사' 시리즈는 근래 나온 한국사 책들 중 손꼽을 만한 수작(秀作)이다. 100년 단위로 역사를 재구성해 '세기의 서(書)'로도 불리는 시리즈로, 인문기획집단 문사철에서 기획·편저했다.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1년 사이에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을 시작으로 세 권을 선보였다. 그에 이어 네 번째 책 <18세기, 왕의 귀환>(민음사, 이하 <18세기>)이 이달 출간됐다.

'세기의 서'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깊이와 대중성이라는, 엇갈리기 십상인 두 가지 지향을 조화시키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고 그것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점이다. 중견 연구자들이 해당 시기를 분야별로 집필해 깊이를 확보하고, 오랫동안 역사책을 만들어온 문사철에서 이를 조율해 대중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옛 지도, 그림 등을 적극 활용하는 것에 더해 다양한 그래픽 자료를 덧붙여 독자가 책의 묵직한 내용을 딱딱하게 느끼지 않도록 만들려 한 노력도 눈에 들어온다.

18세기는 그간 TV를 비롯한 대중 매체에서도 많이 다룬 시기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면이 있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이 이 시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18세기>를 함께 쓴 8명의 연구자 중 한 사람인 노대환 동국대 교수와 '세기의 서'를 총괄하는 강응천 문사철 주간을 17일 광화문 부근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유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이다.

대혁명의 시대, 조선에선 성리학에 입각한 '왕의 귀환'

ⓒ민음사
프레시안 :
제목이 '왕의 귀환'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강응천 : 처음엔 신분 변동, 사회의 다양한 욕구의 분출에 초점을 맞추고 변혁 주체 세력이 등장하는 부분을 잡아내려 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이 시기 변화의 중심에도 왕이 있었다. 15세기 이후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16∼17세기에 붕당 정치가 펼쳐진다. 그게 17세기 말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탕평이 제기된다. 붕당의 문제점을 왕 중심으로 교정하는 것이 탕평의 이념이다. 탕평이 어느 정도 주효해 영·정조 때는 왕권이 15세기에 비견될 만큼 돌아왔다. 특히 영·정조의 카리스마에 의해 다양한 변화가 성리학의 틀 내에서 어느 정도 수용도, 통제도 되면서 부흥을 이뤄냈다. 그런 점에서 왕이 돌아왔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제2의 전성기를 이끈 왕들의 무기가 성리학이었다는 것이다. 성리학에 입각한 왕권이라는 점은 세종 때나 영·정조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회적 기반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18세기는 각계각층에서 분출하던 다양한 욕망을 끌어안고 성리학 이념 주도로 사회를 끌고 갈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라는 점에서 성리학의 임계점을 보여준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건 미구에 시장 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변화와 도전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 영·정조 시기를 중흥기로 부르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조선에서 '왕의 귀환'이 있었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독립 전쟁으로 공화국이 탄생했다. 시민이 앞으로 나서고 왕이 퇴조하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귀환'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노대환 : 긍정적인 점과 한계가 다 있는 것 같다. 조선 개창 후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계속됐다. 붕당기에 들어가면 신권이 왕권을 서서히 누르게 되고, 현종 대에는 신권이 왕권을 사실상 초월하는 정도까지 나아갔다. 숙종 대에 가면 환국을 통해 왕권을 회복하게 된다. 왕권 강화의 긍정적인 측면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붕당 정치가 상호 균형이라는 이상에서 벗어나 정치 이념에 따라 상대의 목숨까지 빼앗는 극단적인 파행 정치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걸 수습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배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역할을 할 수 있던 건 왕밖에 없었다. 국왕이 혼란한 정치 상황을 수습하고 안정시킨 측면이 있었다.

다만 그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지는 못했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상공업 사회나 시민 사회를 전망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갔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영조와 정조의 정치 형태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여전히 양반 사대부 중심이었다. 서얼, 중인 등 일부를 끌어들이기는 하지만 그건 굉장히 약한 상태였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후진적이어서 뒤처졌다? 나름의 합리성 갖춘 강한 체제여서 뚫기 어려웠다

프레시안 : 대중이 즐겨 보는 사극이나 일반적인 역사 서술을 살펴보면 18세기는 다소 화사하게, 그와 반대로 19세기는 잿빛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영·정조 때 그렇게 긍정적인 요소가 많았다면, 왜 정조가 물러난 후 얼마 안 돼서 급격히 추락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노대환 : 17세기와 18세기 비교도 필요하다. 17세기는 그야말로 성리학 이념의 시기였다. 성리학이라는 안경을 끼고 모든 것을 재단했다. 예술도 사대부적인 예술, 즉 이념적인 예술이었다. 예술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도구로서 예술이었다. 모든 것이 이념의 도구였던 것이 18세기에 가면 서서히 해방된다. 그 안경을 벗어버리려는 것이 18세기 문화 운동의 기본 성격이다. 그림도 (보이는) 그대로 그리자는 것이 진경산수로 나타난다. 풍속화도 그렇다. 예전처럼 이념이 들어간 사군자에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민(民)의 실생활을 그대로 보고 그린 것이다. 김홍도도, 신윤복도 그림에 색을 입히지 않나. 색이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색이 없는 세계는 없지 않나.

그런데 이게 18세기 후반에 찬란하게 피어난 것이 아니다. 막 피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풍속화만 봐도 김홍도, 신윤복 같은 몇 사람을 제외하면 없지 않나. 그런 단계였는데, 정조는 이를 17세기 방향으로 돌리려고 했다. 이 시기를 문예 부흥이라고들 하지만, 정조는 그야말로 순정 성리학자였다. 활발하게 일어난 문학 운동에 대해서도 문체 반정으로 거꾸로 돌리려 하지 않나. 그랬기 때문에 18세기 후반에도 그런 흐름이 온전히 피어나지 못했는데, 그나마 그런 것들이 19세기에 가면 더 보수화한다. 19세기에는 추사류의 문인화가 다시 자리를 잡고, 문학에서도 경학 중심의 문학 운동이 나타난다. 이처럼 18세기에 굉장히 활발했던 것이 19세기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막 피어나려던 것이 제대로 피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강응천 : 시장 경제로 가는 흐름은 기본적으로 동서양에 다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중앙 집권적 왕정이 유럽보다 동양 쪽에서 훨씬 오래전부터 체계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새로운 세력이 뚫기에는 기존 체제가 너무나 강고했다. 심지어 합리적인 측면까지 있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집단인 백과전서파의 한 인물은 강력한 관료 체제가 완비돼 있고 중앙 집권적인 중국을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생각했다고 하지 않나. (동아시아에서) 18세기는 새로운 것이 분출하기보다는 기존의 강한 전통이 꽃을 피우는 시기, 거기에 새로운 변화가 부차적으로 있었던 시기다. '우리가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시장 경제로 가는 것도 뒤처졌다', 이게 아니라 더 강력하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뚫고 나가기가 어렵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노대환 : 중인이 부르주아처럼 나타날 수 있던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18세기 후반에 이 사람들의 대부분은 양반 지향 의식이 더 강했던 것 같다. 19세기에 개화 사상가로 전신하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게 조선이 갖고 있던 전통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성장하던 그들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첨병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양반이 되거나 양반에 동참하고 싶어 했다. 대표적인 것이 위항 문학 운동이다. 중인 문학 운동이 18세기 후반에 중요한 운동이긴 한데, 양반 문학 따라 하기 성격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나중에 김택영 같은 양반은, 중인들이 신세 한탄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만큼 18세기 후반에도 양반 문화의 영향력은 컸던 것 같다.

강응천 : 18세기 시점에서 양반 사대부의 인구 비율을 어느 정도로 보나.

노대환 : 법제적인 양반은 조선 후기에 50퍼센트 정도까지 갔지만, 실제적인 양반은 조선 초기에도 10퍼센트 정도였고 후기에도 크게 차이 났을 것 같진 않다. 정말 양반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은 양반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강응천 :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 시점에서 기득권층을 2퍼센트라고 했다. 사제 1퍼센트, 귀족 1퍼센트. 98퍼센트의 제3신분이 한 줌도 안 되는 2퍼센트한테 지배당하고 있다고 해서 제3신분의 대표인 부르주아가 들고일어난 게 프랑스혁명이지 않나. 그런데 한 나라의 공론에 참여할 수 있는 집단이 10퍼센트라고 하면, 그 체제의 안정성은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하고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서로 양반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들이 '먹고사는 것도 저들보다 낫고 교육도 잘 받았는데 왜 내 권리가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혁명으로 간 것이다. <18세기> 필자 중 한 사람인 김백철 선생은 거긴 개혁을 제대로 못해서 혁명을 당한 것이고 여긴 영·정조 때 나름대로 개혁이 성공해 기득권 체제가 지켜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그 층이 10퍼센트 정도면 굉장히 깨기 힘든 체제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중국공산당원이 8000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나. 10퍼센트에 조금 못 미치는데 그 가족까지 합치면 10퍼센트를 넘는다. (체제의 안정성을 말하는 건) 조선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강응천 문사철 주간. ⓒ프레시안(최형락)


공론 참여 집단 10퍼센트, 무시할 수 없는 그 저력

프레시안 : 예전에 식민 사관에서는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을 들먹이며 '역사적으로 한국이 후진적이어서 당했다'는 식으로 강변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연구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중앙 집권 체제를 갖췄음을 앞에서 말한 것도 그것과 닿아 있다. 그럼에도 18세기 이후 100년(혹은 오늘날까지 본다면 200여 년)의 역사까지 놓고 볼 때, 당시에는 나름의 합리성을 갖췄다고 한 그 부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걸린다. 한 사회의 이행 문제, 그리고 19세기 조선의 급격한 추락과도 이어진 사안이다.

노대환 : 유교적인 사고 틀은 19세기에 오히려 더 보수적으로 강고해진다. 그게 문제였다. 순정 성리학적이던 것이 18세기 들어 약화되면서 뭔가 새로운 것들이 나올 수 있는 상태였다. 북학 운동도 그런 것 아닌가. 유학을 완전히 깨는 작업까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유학이 변신하면서 사회 발전 추세를 따라가고 또 견인하는 역할을 하려는 움직임이 북학 단계까지는 계속 나타났다. 그러나 19세기는 정조 대와는 달랐다. 정조도 보수적이었지만 개혁적 보수주의, 건전한 보수였다고 한다면 세도 정치가들의 보수주의는 그야말로 반동적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학이라고 하는 것도 세도 정치기에 가면 북학파들이 얘기했던 개혁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일종의 고증학, 그러니까 골동품이나 금석문을 보면서 스스로 즐기는 식이었다. 역시 문제는 19세기 세도 정치기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영조와 정조의 경우도 아쉽다. 굉장히 능력 있는 분들이었다는 점에서, 사회 발전 추세에 더 과감하게 드라이브를 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두 양반한테 늘 남더라. 북학파나 중인처럼 그걸 지원해줄 세력들도, 강하진 않았지만 있었다. 그러나 정조 같은 사람은 유학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 유학적 이상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글을 보면 참 많이 나온다.

강응천 : 18세기로 들어가서 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어쨌든 성공한 것 아닌가? <18세기>에 정조의 1804년 갑자년 구상이 나오는데,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구상대로 거의 돼가고 있다는 생각을 정조는 했을 것 같다. 그 요체는 근대적인 상업 중심 국가가 아니라 농업 중심의 안정된 성리학적 이상 국가였을 것이다. <18세기> 필자 중 한 사람인 이욱 선생 글을 보면 영조는 상업 세력의 성장을 이용하거나 북돋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돼 있다. 정조 때는 마지못해서 신해통공(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한 조치) 같은 것도 하긴 하지만, 영조도 정조도 성장하는 상인 세력과 결탁하거나 상인들로부터 무언가를 도모하는 행위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기껏 한 것이 주교사를 설치해 배다리를 놓고, 거길 오가는 상인들에게서 조금 걷는 정도였다. 전형적인 유가적 사고방식에 머물렀던 것인데, 자본주의로 가는 길, 상공업으로 가는 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아쉬움은 남는다.

프레시안 : 이 문제와 관련해 조선 시대 연구자 중에는 조선 문명을 근대 문명에 선행하는 형태가 아니라 근대 문명에 저항한, 근대 문명의 출구를 찾을 대안의 하나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강응천 : 오늘날 한국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다. 지금의 중국도 그렇고, 인류 문명은 어쨌거나 자본주의 혹은 상품 화폐 경제의 최종 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조선 시대 유교에는 누구의 눈으로 보더라도 부정적인 측면들이 분명하게 있었는데 그걸 미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잘못된 길이었고 조선이 가려던 길은 아직 구현되지 않았다고, 역사적 우연에 따른 100∼200년의 과도기를 지나 원래 갈 길을 갈 것이라고. 그러나 그건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노대환 : 베트남사 연구자 중에도 베트남사를 서양과 비교해보니 들어맞지 않아 비교 작업을 포기했다는 분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갔고 베트남은 이런 길을 갔을 뿐이다, 이제 그 길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이야기인데, 역사가로서 바른 길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인류가 지향해야 할 공통적인 길은 있다고 본다. 그 길을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울러 18세기 후반에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여성 문제, 천민을 비롯한 피지배층 문제 같은 것이 그렇다. 또 조선 후기에 경제적으로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북학파들이 세상에서 조선처럼 가난한 나라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문제들이 있는데도 그냥 조선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라고 하는 건 적당한 인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유럽 사회에도 부정적인 것은 있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근대화의 이면에는 자유, 평등처럼 근대화의 성취 부분도 많이 있었다.

▲ 노대환 동국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버려진 아이들, '꼭지딴', 땅꾼, 광대를 통해 들여다본 18세기

프레시안 : 사극 등을 보면 권력 암투 위주로 이 시기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다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18세기>의 경우 정치 흐름을 세밀하게 살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천변 풍경'에서 비중 있게 서술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기근이 들면 버려진 아이들의 시체가 오물과 함께 떠내려가던 개천, '꺽정이'(거지)들의 총두목 '꼭지딴'의 위세, 땅꾼의 탄생 등 아프면서도 흥미로운 장면들이 여럿 담겨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하다.

강응천 : 역사책을 만들면서 제일 안타까운 부분이 그것이다.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를 만들 때부터 그랬다. 가난한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밝히려고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고 자료도 거의 없다. 왕들의 역사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을 찾으면 되고 전문가도 많은데, 민중들의 역사는 그렇지가 않다. 세금 기록, 반란 기록 같은 데에서나 민중의 편린이 드러난다. 그래서 (작업하기가) 굉장히 힘들고 늘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번엔 '천변 풍경'에서 다양한 하층민을 담은 것에 더해 광대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광대에 집중해 당시 최하층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느끼고 있었는가를 구성했다. 결론은 18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국가와 민중은 점점 괴리됐다는 것이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광대들은 국가적인 편제 속에서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궁중 연희에 불려나가는데, 그런 게 점점 약해진다. 상업 경제의 발달 속에서 광대들이 시장에서 맘껏 쇼를 하면서 독자적으로 먹고살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늘어난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두 개의 나라가 있는 것 같은 형국이 돼간다. 19세기에 가면 점점 더 양반들의 나라는 양반들의 나라이고, 국가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민초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다. 결과를 보면 서양에서처럼 체제를 뒤엎는 정도까지는 가지 못했으나, 미약하지만 그런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18세기> 필자 중 한 사람인 허용호 선생은 쓰고 있다.

난 18세기에서 영·정조 시대의 정치 과정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체제 위기에 봉착한 상층 엘리트 세력이 어떻게 제 살 깎는 개혁을 통해 체제를 되살리는지를,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개혁을 이뤄내는가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영조에서 정조까지, 사분오열됐던 기득권 세력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를 동원하면서 각 계파를 제어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참 무서운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대동법과 균역법이라는 큰 개혁을 해내지 않나. 자체 개혁을 통해 체제의 안정성을 담보하는데, 지금 대한민국 엘리트 세력은 망할 때까지 그렇게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조선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조선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스스로 개혁하는 지배층을 상대해 어떻게 변혁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하는 과제도 던져준 시기가 18세기 아니었을까.

노대환 : 정조도 마지막에 노비 문제를 이야기한다. 기록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정조가 노비제를 폐지하려고 했다는 측도 있다. (사료를) 읽어보면 정조는 좀 애매하더라. 어쨌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01년) 공노비를 혁파할 때 그걸 주장한 사람이 이건 정조의 유지(遺志)라고 하면서 추진한다. 공노비 혁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적인 큰 양보이고 개혁이다. 그런 것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 정화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그 점이 바로 조선 사회가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 사도세자를 추존할 것을 주장한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 한국국학진흥원유교문화박물관 소장.


'소통 군주' 정조와 공론 정치의 힘

프레시안 : <18세기>에는 1798년 정조가 충격적인 문서를 공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했음을 드러내는 '금등'이라는 문서였다. '금등'은 1990년대에 나온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 다뤄지며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영원한 제국>은 기존과 달리 무인(武人) 군주로서 정조를 비중 있게 그렸다. 이는 이인화가 그 후 군인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화하는 책을 낸 것과 이어져 있다는 지적도 당시 적잖게 나왔다. 정조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주목할 만한 대목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노대환 : 정조의 <홍재전서>에 제일 많이 나오고 키워드처럼 삼는 게 있다. 바로 소통이다. 정조가 늘 이야기했던 게, 소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소통과 완벽히 같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소통은 뭔가 막힌 사람들, 한계를 가진 사람들의 한계를 뚫어준다는 것이었다. 지방이라는 한계 때문에 관리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조는 지방마다 돌아다니면서 과거를 보게 했다. 제주도까지. 전국에서 인재를 얻기 위한 것이자 지방민을 위한 소통이었다. 서얼을 위한 소통으로 규장각 검서관 같은 것들을 두었다. 수원에 가는 길에서 상언(上言)을 받아들인 건 백성들과 소통한 것이다. 정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이렇게 소통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소통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람을 끌어들이면서 위기를 돌파했고, 그런 점에서 집권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소통력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19세기에 가면 완전히 깨진다. 소통력이 없어진다. 지방과 서울의 단절, 기득권을 가진 소수 관료와 그렇지 않은 관료의 단절이 일어난다. 모든 게 단절되니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백성들에겐 민란밖에 없게 된다.

강응천 : 놀라운 것은 만인소에 액면 그대로 1만 명 넘게 모였다는 점이다. 그것도 영남에 영락해 있고 과거에도 들지 못한 유생이 1만 명 넘게 연명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대표 유생으로서 연명 상소를 갖고 서울에 올라와 의사를 표출하고 정조와 면담까지 하고 간다. <18세기> 필자 중 한 사람인 최성환 선생 글에는 미리 정조하고 소통했던 것 아니냐고 돼 있는데, 어쨌건 이건 조선 시대의 공론이라는 개념이 만만찮은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현대 한국에서 지방에서 1만 명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일 아닌가. 그런 공론의 형식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전통이다. 영국의 경우 귀족들과 왕의 합의문에 불과한 마그나카르타 같은 것을 민주주의의 대단한 원리처럼 이야기하지 않나. 조선 시대의 공론 정치는 마그나카르타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막강한 전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만인소는 지난 8월 정치권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당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정조는 무려 100미터 길이의 만인소를 벼슬도 없는 이에게 밤새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뜻을 모두 들어주었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면담 요청에 응하지 않던 '불통' 박근혜 대통령을 '소통 군주' 정조와 대비하며 비판한 것이다. 가로막힌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더해, 노동을 비롯한 사회경제 문제 전반에서 박근혜 정권은 한계를 뚫어주기는커녕 장벽을 높여 힘없는 이들의 삶을 더 팍팍하게 하고 정치적으로 역주행한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18세기로 다시 돌아오면, 인터넷도 전화도 없던 시대에 그 많은 사람의 뜻을 어떻게 모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노대환 : 거미줄 같은 조직망이 있었고 지식 네트워크가 쫙 깔려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직화된 사회였다. 1820년대에 서얼 1만여 명이 집단 상소를 올리는 일도 있었다. 정조는 집권하자마자 서얼 문제를 말하고 서얼을 소통시켰다. 그래서 정조 대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19세기에 가니까 그렇지 않았다. 1820년대에 서얼 1만여 명이 상소를 올려서 '정조 때 이미 소통을 다 약속했던 건데 왜 너희들은 하지 않느냐'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은 그것에 반대해 권당, 그러니까 동맹 휴학을 해버린다. 그래서 갈등이 심하게 벌어진다. 이것도 결국 소통의 부재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정조나 영조나 개인적으로 너무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게 한계이기도 했다. 개인의 역량과 카리스마에 의해 정치가 큰 문제 없이 운영됐지만, 시스템적으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스템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사람이 못 따라가는 면이 많지 않나. 대부분은 함량 미달인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 정조 대에는 청렴결백하고 도덕성을 갖춘 정치가를 만들어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18세기 후반에 그게 성공해서, 조선 전체에서 이 시기만큼 인재가 많은 때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사람들은 많은 수가 18세기 후반 사람들, 정조가 키워낸 인물들이다.

강응천 :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분출했던 시대가 역사에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왕조 전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조선 왕조는 어쨌건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극복해야 할 그 대상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체제 위기 앞에서 제 살 깎은 조선 기득권 세력…한국 지배층, 따라가려면 멀었다

▲ 주교사가 관리하던 배다리.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프레시안 :
단순한 질문을 하나 던지면, 18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왕의 귀환'은 재앙이었을까 축복이었을까.

강응천 : 축복이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재앙은 아니었다고 본다. 시쳇말로 임진왜란 때 망해버렸어야 할 나라가 계속 가는 바람에 근대화에 뒤처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안 망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짓누르는 것만으로 300년을 더 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지배층은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개혁을 조선의 지배층은 해냈다. 대동법 같은 것을 보면 세금의 기준을 토지로 삼자는 건데,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과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는 엄청난 부자 증세인 셈이다. 대동법을 놓고 한 100년에 걸쳐 싸웠지만 결국 해냈다. 송시열처럼 반대하던 사람들조차 나중에는 돌아서서 찬성한다. 느낀 것 아니겠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고,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선은 역시 위대한 나라였어', 이렇게 볼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쉽지 않은 개혁을 해낼 수 있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다 죽어가던 왕조를 어떻게 되살렸는가를 짚어보면 앞에서 말한 공론 정치, 소통 메커니즘, 그리고 서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돼 있었던 중앙 집권적 군주 국가의 시스템 등이 눈에 들어온다.

노대환 : 재앙 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왕조의 장기 지속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가 있으면 왕조는 늘 교체되지 않았나. 장기 지속됐다는 건 그럴 수 있었던 힘이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그 힘을 제대로 살피기보다는, 요즘 좀 덜하긴 하지만 너무 근대화의 논리에 휘말렸다.

프레시안 : <18세기>는 전형적인 한국사 책과는 구성, 전개 방식 등에서 다른 점이 많다. 예컨대 서울과 파리라는 두 도시의 풍경을 비교하고 세금을 비롯한 경제 전반의 문제도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짚어보는 등의 특별면이 많다. 본문 첫머리를 피아노의 탄생으로 여는 것도 눈에 들어온다.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강응천 : 세기별로 책을 만들자고 한 것에 그게 다 들어 있다. 세기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쓰이는 시간관념이다. 10진법적인 시간관념은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자, 그렇게 하면 우리 역사를 더 넓은 지평에서 동시대의 외국과 같이 놓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놓고 보면 '15세기에 조선과 세계는 이렇게 갔구나' 하는 것을,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대체로 비슷하게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편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가고 있었고 거기에 일정한 지그재그가 있을 뿐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일방적인 18세기 미화는 위험하다

프레시안 : 영·정조 시기는 대중 매체에서도 많이 다룬다. 그런 것들에서 아쉬웠던 부분, 더 주안점을 두고 이해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하며 정리했으면 한다.

노대환 : 최근 18세기 자체를 과장되게 문예 부흥기라는 식으로, 긍정성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까 '18세기까지는 이렇게 잘됐는데 19세기에 왜 갑자기 조선 사회가 그렇게 됐다는 것이냐'는 식의 의문을 많이 낳게 된다. 18세기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그 한계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19세기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의 문제점이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18세기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도출돼 나타난 것이다. 그런 연속선상에서 생각한다면 조선의 르네상스, 문예 부흥이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18세기를 미화하는 건 위험하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최근엔 오히려 그게 주류 경향인 것 같다. 반면, 못난 조선이라든지 (진작) 망했어야 할 나라 같은 식으로 조선 사회 자체를 단순하게 유럽과 비교하면서 매우 후진적인 사회로 그리는 것도 문제가 있다.

강응천 : 18세기 붐이 인 지가 꽤 됐다. 그동안 한국에선 서구의 앞선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따라잡자는 것이 기조 아니었나. 18세기에 대한 관심은 한국 경제의 위상이 올라가고 중국도 잘나가는 것을 보면서 '서구 자본주의를 잘 베낀 것으로만 이렇게 된 건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늘어나고 조선에서 그 동력을 찾으려는 사회적 의식이 형성된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화려했던 18세기의 면모는 그런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 흐름 자체를 막지는 못할 것 같다. 그 흐름이 가진 긍정성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것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평범한 민중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 시기의 문화적 양상에 넋을 빼고 '조선 사회는 멋있었다', 이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평가해주면서, 10퍼센트에 불과한 저 세력이 어떻게 망국의 위기까지 겪으면서도 버텨낼 수 있었나 하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망해버렸어야 하는데 왜 안 망했느냐는 식으로 주관적으로 분노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지 않나.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돌아가는 걸 보면 당장 망할 것 같고 정권 교체를 해도 몇 번은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지 않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봤으면 한다. 역으로 조선에 있었던 것을 너무 부풀려서 '그 길로 계속 갔어야 했고, 일본이나 서구의 제국주의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잠깐의 우연에 불과했다'는 식으로 조선의 10퍼센트 과두제를 미화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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