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복수?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자꾸만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 날씨 탓만은 아니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내린 초유의 사건 앞에서, 이 나라 대한민국이 노골적인 극우 전체주의 국가로 퇴행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다.
이것은 실로 가공할 사건이다. 대중정당이 '헌법'의 이름으로 강제해산 당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보통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고, 역사적 퇴행을 막기 위한 투쟁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 투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헌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이 무미건조한 법조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삶을 규정하는 살아있는 '합의'로서 생명력을 갖도록 함께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지향하고 있는가, 하나의 정치공동체로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어떤 길로 가꾸어 가려고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헌법이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수시로 헌법을 함께 읽고, 토론하고, 그 이상과 가치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입법자들이나 직업적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이번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해산 판결을 시민의 힘으로 막아내지 못한 것도, 또 이런 참담한 판결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조작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결과를 찬성하는 국민들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오랫동안 헌법을 애호하지 않고, 그것을 골방에 방치해 둔 탓이 크다는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등, 분단체제 극복과 평화, 생명과 안전을 위해 고투해 온 (진보정당들을 포함한) '진보 세력'들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어쩌면 지금의 사태는 그동안 활발한 연구와 토론, 대중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그 주인으로부터 알뜰한 돌봄을 받지 못했던 헌법의 '복수'일지도 모른다는 성찰이 앞서야 한다.
제헌헌법과 대한민국
이러한 성찰이 절실한 또 하나의 까닭은, 지금 이 나라를 노골적인 극우 전체주의 국가로 퇴행시키려는 세력들이 '개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프로젝트를 본격적인 정치 일정에 올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정작 주인이 그것을 아끼고 돌보지 않는 사이에 도둑들이 그것을 꺼내어 주인을 위협할 흉기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비상한 상황이 될 것이다. 누군가 내 부엌의 녹슨 식칼을 갈아 흉기로 쓰려 한다면, 아니 내 집문서를 마음대로 조작하여 재산권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것을 묵인할 주인이 어디 있는가.
헌법을 집문서에 비유하는 것이 가당치 않을지는 모르겠다. 허나, 대한민국의 성립이 가능하도록 했던 제헌헌법에 비추어 볼 때, 이 나라의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부의 '소유권' 문제는 지금 '개헌'까지 운위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일부 세력의 주장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제헌헌법에 근거해 세워진 대한민국은, 그 합의가 공화국 시민의 힘에 의해 충실하게 이행된다면, 지금과 같은 '겨울 공화국'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뒤늦은 반성과 성찰 속에서, 헌법에 대해 공부해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책 몇 권을 찾아 읽고 있다. 그 중 법학도로서 현실 정치의 일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조유진이 쓴 책 <헌법 사용설명서 : 공화국 시민, 헌법으로 무장하라>(이학사 펴냄)의 제1장 '제헌헌법은 살아있다'에서,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중요한 발언 몇 가지를 재인용하고자 한다.
먼저 제헌국회 당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서상일 의원(우파 정당인 한국민주당 소속)이 1948년 6월 23일 헌법기초위원회 보고 및 헌법안 제1독회에서 했던 발언이다.
"헌법의 정신을 요약해서 말씀하자면 (…) 우리가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구성해서 우리 삼천만은 물론이고 자손만대로 하여금 (…) 민족사회주의국가를 이루자는 그 정신의 골자가 이 헌법에 총집되어 있다."
다음은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과 대동청년단 단장을 역임했던 지청천 제헌의원의 발언이다.
"소위 전체주의라는 공산주의 체제와 모든 그 무제한 자본주의를 취하지 않고 우리는 (…) 말하자면 국가권력으로써 철두철미 민족주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제면에 들어가서는 사회주의로 나가야 되겠습니다. (…) 우리는 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를 선택하는 역할을 아니하고 조선 처지에 맞는 민족사회주의로 건설해 나가는 것이 입국의 이념이 아니면 완전 독립을 보장하기 (…) 지극히 곤란한 것입니다."
한편 제헌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는 제헌헌법이 규정하는 경제질서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국가 체제에 편향함을 회피하고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의 원리를 아울러 채택함으로써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의 장점인 각인의 자유와 평등 및 창의의 가치를 존중하는 한편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확보하게 하고 그들의 균등 생활을 보장하려는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의 원리를 또한 존중하여, 말하자면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일견 대립되는 두 주의를 한층 높은 단계에서 조화하고 융합하려는 새로운 국가형태를 실현함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하고 설명한다.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유엔에 가입해 있는 한 국가'의 이념과 동일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하는데, 위에서 보듯이 대한민국 헌법을 만든 제헌의원들이 수시로 쓰고 있는 '민족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 같은 개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사실 이러한 발언들은 제헌헌법의 이념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극히 일부의 자료에 불과하다. 특히 '근로자의 이익 분배 균점권' 같은 제헌헌법의 조항은 지금처럼 노동자-민중의 생존이 얼음절벽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가히 혁명적인 조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대로 기업과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화국에 대한 전체주의의 승리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상이 함께 녹아 있는 제헌헌법이 누더기가 된 것은 박정희의 쿠데타와 장기집권과 깊이 관련이 있다. 한마디로 박정희는 제헌헌법에 의해 수립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극우 전체주의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해방과 제헌의 역사를 욕되게 한 것에 불과하다. 이후 87년 개헌을 통해 반(反)공화국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유신헌법의 그늘은 상당히 제거되긴 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이 대한민국의 근간인 제헌헌법의 '혁명적' 이상을 모두 복원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공화국 시민들은 헌법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렸다. 좌/우,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헌법은 오랫동안 시민들로부터 '골방 노인네' 취급을 당해 왔다. 헌법에 대한 외면은 결국 우리가 함께 세우고 지켜야 할 가치, 즉 공준(公準)에 대한 경멸로 치달아 왔고, 그러한 정치적 냉소와 무기력을 숙주로 삼아 '헌법 모독 세력'들이 암약하며, 공화국을 사실상 해체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얼어붙은 산하의 현실은 그러므로 '헌법의 복수'라기보다는 '공화국에 대한 전체주의의 승리'를 예고하는 서막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바야흐로 '박정희의 꿈'이 실현되려 하고 있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판결을 계기로,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참담한 결정의 근거로 사용된 헌법의 현 주소를 묻는 사회적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헌법재판소의 법관들이 입고 있는 그 '법복'의 권위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이 나라 대한민국을 세웠던 제헌의 정신과 그들의 거리는 도대체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지, 다시 묻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개헌 논의'를 그저 권력 다툼을 위한 정치꾼들의 이전투구로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신헌법에 의해 오염되었던 제헌헌법의 이상이 21세기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 숨 쉬도록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 토론에, 공화국 시민 모두가 적극 참여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근거 없는 낙관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나, 그래도 겨울이 깊으면 봄도 가까워진다는 섭리는 변하지 않는다.
프레시안=평화뉴스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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