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문명사의 '반동노선'이다

[김기협의 자본주의 이후]<2> 산업문명은 꼭 자본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인류의 역사에 온갖 굴곡이 있거니와, 선사시대에 채집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의 이행을 가져온 농업혁명과 18세기 이후 농업경제로부터 산업경제로의 이행을 가져온 산업혁명, 두 가지가 가장 큰 변화로 꼽힌다. 이 두 차례 변화는 인류의 존재양식을 전면적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큰 변화로 꼽히는 것이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수많은 다른 생물종들과 대략 대등한 상태로 존재했다. 포유류 가운데 적응력이 뛰어난 종이었기 때문에 남극대륙을 제외한 지구상 전 지역으로 서식지를 넓히기는 했지만 그 확장에는 식량 획득의 조건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 이 단계에서 인류의 개체 수는 100만에서 1000만 사이를 오갔을 것으로 고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상태를 이후의 '문명 상태'와 대비해서 인류의 '자연 상태'라 할 수 있다.

농업혁명은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얻어먹던' 단계에서 '찾아먹는' 단계로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량 획득 능력이 늘어나서 서식지를 크게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년에 걸친 이 단계에서 인류의 개체 수는 억대까지 늘어났다.

농업문명 초기의 식량 생산력은 잉여생산 없는 자급자족 수준이었다. 늘어나는 생산력은 인구 증가와 서식지 확장에 투입되었다. 그러다가 서식지 확장이 한계에 접근하면서 제한된 영역 내에서 입체적 사회조직이 시작되었다. 잉여생산을 발판으로 2차-3차 산업이 자라나는 분업 현상의 전개에 따라 본격적 문명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농업인구의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만큼 잉여생산이 늘어난 후기 농업사회에서는 산업구조와 사회조직의 원리를 교체할 필요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농업문명의 후반부가 역사학에서 말하는 '중세'에 해당되는데, 중세의 사회조직 원리는 농업문명의 속성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농업문명을 가장 고도로 발달시킨 중국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서열이 대표적인 예다. 조정자 역할의 제1계급 '사' 아래로 1-2-3차 산업이 서열화돼 있었던 것이다.

농업인구의 비율 감소는 그 사회의 경제활동에서 2-3차 산업의 비중이 커진다는 뜻이다. 체제 질서의 운용에 있어서도 농업활동보다 상공업활동의 통제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에 따른 변화가 중국에서는 당나라 말기인 9세기에 뚜렷해졌다.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무력(武力)국가' 당나라와 '재정(財政)국가' 송나라를 대비시킨 뜻도 여기에 있다.

후기 농업사회에 닥친 변화의 과제를 한 마디로 '유동성 증가'라 할 수 있다. 중세질서의 핵심은 인간의 관리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농업문명 초창기에 세워진 '제민(齊民)'의 원리가 중세를 지배했다. 그러나 산업의 다각화와 비생산활동의 증가에 따라 그 원리로는 효과적 사회통제가 어렵게 되었다. 인간 아닌 다른 관리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대상이 '돈'이었다. 추상적-보편적 가치를 가진 돈은 과밀해진 인구와 다양해진 활동 사이에 효율적으로 관련을 맺음으로써 유동성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과 운영의 기본 도구로 돈을 활용한다는, 넓은 의미의 자본주의는 후기 농업사회의 필연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외세의 개입 없이 자체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학계의 관심을 모은 일이 있다. 이 논의가 '자본주의 맹아' 문제에 집중되었다. 조선 후기의 사상적-제도적 변화 중에 자본주의 요소를 추구한 것이 있었다면 자체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주제가 다른 지역에서도 탐구되었다. 그 중 10-11세기의 중국과 12-13세기의 이슬람 세계의 체제 운용에서 자본의 역할이 커졌던 일을 많은 연구자들이 확인했다. 유럽의 근대 자본주의처럼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역할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탈 중세'의 의미를 가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흑사병이 유럽의 특이한 발전을 일으킨 것일까?

후기 농업사회의 유동성 증가 과제를 뻑뻑한 반죽에 물을 넣어 부드럽게 만드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자본이 용매(溶媒)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일어난 자본주의는 반죽에 물을 넣는 것이 아니라 물에 반죽을 넣는 격이었다. 대단히 과격한 방법이었다. 왜 이런 과격한 방법을 쓰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해주는 적절한 연구를 아직 참조하지 못했다. 내 나름대로 추측할 때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에 걸친 흑사병 유행이 배경으로 큰 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1이 줄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잉글랜드의 인클로저 현상을 초래한 과정은 잘 연구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과격한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향한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변화를 이 인구 급감 사태가 불러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유럽의 과격노선과 비교하면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자본주의는 '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색할 만큼 온건한 것이었다. 중국의 경우 자본은 무력과 함께 통치수단의 하나로 채택되었지만 자본 자체의 권력화는 억제되었다. 명나라 후기 정권을 농단하던 환관들이 탄핵당할 때 조정 세입의 몇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몰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 얼마간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재력이 비공식적 권력 운용 수단이 되어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후기 농업사회 단계의 중국에는 유럽과 달리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천하 체제가 안정되어 있었다. 변화를 도입하더라도 기본 체제를 흔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점진적이고 온건한 방법을 취했다. 14세기 초에 명나라가 정화(鄭和)를 앞세운 대항해에 나섰다가 접은 이유를 놓고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장의 급격한 확대를 원하지 않는 체제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무렵까지 중국의 자연과학과 물질문명이 유럽보다 크게 앞서 있다가 그 후 몇 세기 동안 역전된 사실도 같은 이유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농업문명은 유럽보다 일찍 난숙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따라서 탈중세의 과제도 일찍부터 제기되어 있었고 10세기경부터 그 방향의 변화를 완만하게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14-15세기의 인구 격감을 계기로 다른 선진지역에서 경험하지 못한 특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크게 흔들린 것 역시 인구 격감의 영향을 받은 일로 보이는데, 보편적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에서 문명권 차원의 절제가 없어진 것도 중국 등 다른 지역과 다른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15세기 이후 유럽의 특이한 변화는 르네상스, 대항해시대, 종교개혁을 거치며 힘과 속도를 더해갔다. 식민지경영과 원거리무역이 중요한 경제활동으로 자라나면서 격화하는 경쟁의 주체로 국민국가가 나타났다. 그 경쟁이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에 이르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큰 길이 열렸다. 19세기 들어 부국강병을 이룬 유럽국들이 밖으로 나서자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일어났다. 종래 유럽인의 해외활동은 기존 문명권의 외곽에만 머물렀는데, 이제 유럽인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앞에 아무런 거침이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필요로 한 소유권의 절대화

자본주의의 출발점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것은 1776년,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막 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였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환상의 파트너였다. 산업혁명이 추구한 대량생산체제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로운 시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실적 운용을 위해서는 시장을 마음껏 키워주는 대량생산체제가 필요했다. 자본주의체제의 탄생은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의 특성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나는 소유권의 절대화와 가치의 획일화, 그리고 경쟁의 극대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농업사회는 체제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소유권을 부정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무기 소지를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유권의 행사에 절제가 없을 경우 사람을 해치는 데, 그리고 질서를 교란시키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이 무기와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에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책임을 지우는 규정을 되새겨보자. 생명은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와 나란히 재산을 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가? 명예, 사랑, 행복 등 인간이 누리는 온갖 가치를 제쳐놓고 재산 하나를 생명과 나란히 놓는 것이 무슨 뜻인가? 재산을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독립적 가치로 절대화하는 것이다.

▲산업혁명 시대의 어린이 노동자들.

인생의 모든 가치는 생명에 종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산이 생명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것은 다른 모든 가치를 재산에게도 종속시키는 관념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된 사회에서는 생명을 제외한 모든 인간적 가치가 돈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심지어 생명의 가치까지 재물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일각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 가치의 획일화가 자본의 지배력을 보장해 준다. 한국인은 이 사실을 해방공간에서 처절하게 경험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돈의 힘으로 민심에 역행하는 노선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의 '87체제'에서 총칼의 힘을 대신해 돈의 힘이 수구세력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도 또 하나의 사례다. 자본주의체제의 극한적 강화를 주장하는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들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려 드는 것도 가치의 획일화를 고착시키려는 의도다. 자본주의체제는 한 번 작동하면 가치의 획일화를 통해 체제의 변동을 가로막는 메커니즘을 가진 것이다.

가치의 획일화는 경쟁 극대화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각자의 특성을 두루 인정해준다면 심한 경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점수'라는 하나의 기준만 내세워 모든 학생을 한 줄로 세울 때,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한두 점 더 따기 위해 아이들은 밤잠을 설쳐야 하고 부모들은 사교육에 재산을 바치게 된다.

경쟁은 인간사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현상의 본질적 요소다. 경쟁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혈압 없는 동물이 죽은 동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혈압에도 적정선이 있지 않은가? 80~120의 범위를 어느 쪽으로 벗어나더라도 건강을 걱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건강을 위한 경쟁의 적정선도 있는 것이다.

참여자들의 총 소득이 손실보다 큰 '플러스섬'의 경쟁은 건강한 경쟁이다. 고통과 좌절을 느끼는 패자가 있어도, 보듬어줄 여유가 승자에게 있다. '제로섬', 총 소득이 손실과 같은 수준이 된다면 경쟁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여자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마이너스섬', 총 소득이 손실에 미치지 못하는 경쟁은 사회에 해독이 된다.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사회를 무너트리는 길로 나아간다.

과잉 경쟁의 늪에 빠진 자본주의 체제

자본주의 체제는 분명히 과잉 경쟁의 경향을 보여 왔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과잉 경쟁의 낭비 현상을 변명하는 논리가 개발되어 왔다. 19세기 중엽부터 유행한 '깨진 유리창' 논리는 20세기 말까지 '군사 케인스주의'(military Keynesianism)에 활용되기도 했다. 빵집 유리창을 주인 아들이 실수로 깨뜨렸을 때, 새 유리를 끼우기 위해 돈 쓰는 주인이 마음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1850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란 글로 이 주장을 반박했다.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는 것이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 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유리가게 주인이 실제로 번 돈이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으니, 그 손실이 사회 전체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바스티아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후의 경제학에서는 '기회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근대인은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봄에 있어서 직관을 무시하려 든 일이 많았다. 깨진 유리창 이야기가 하나의 대표적인 예다. 온갖 미시적 이론을 동원해 사회에 손실이 발생했다는 거시적 사실을 감추려 든 것이다. 원자론의 힘에 기댄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착시'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거시적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될 때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미시적 이론을 더 만들어낸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데 활용되어 온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도 또 하나의 그런 예다. 낙수 효과가 생산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상황도 있다. 밭에 물을 줄 때, 물이 넉넉히 있다면 겉흙부터 적셔주는 것이 노력을 줄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심한 가뭄에 물이 넉넉지 못하다면 고랑에만 물을 부어 속흙을 적셔줘야 한다. 이랑에 붓는 물은 증발해 버리니까. 농부가 통상 겪는 것은 후자의 상황이다. 그런데 낙수 효과가 유효한 상황만 상정하고 세밀한 묘사로 그럴싸하게 내놓는 것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려는 꼼수일 뿐이다.

사회 상황 중에는 자본주의가 유리한 상황도 있고 불리한 상황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체제는 상황이 바뀌어도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관성을 갖고 있다. 앞에서 말한 가치의 획일화 경향도 이 관성의 한 가지 요소다. 또 한 가지 요소는 힘을 가진 집단에게 이득을 주는 체제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지속이 사회 전체에 손해가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힘을 가진 집단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 지속을 바라고, 집단의 힘으로 그 뜻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노선의 승리에 이 점이 크게 작용했다.

1970년대는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어 자본주의체제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떠오른 시기였다. 자본주의체제 아래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던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한 것은 불거지고 있던 모순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보다 거꾸로 격화시킴으로써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모순 격화는 파국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인데, 모두가 피해를 입는 파국 속에서 힘을 가진 소수만 이득을 챙기겠다는 반동적 노선이 신자유주의다.

약자의 피해를 더 키우려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목적은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강자가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은 어떨지? 시스템의 전면적 붕괴 속에 강자라 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강자도 아니면서 이 노선을 추종하려는 세력에게 있다. 국가사회에 큰 피해를 입힐 노선을 추종하는 한국의 신자유주의 세력은 일제하의 친일파보다도 매판성이 더 심한 집단이다.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체제 아래 착취하는 입장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입장에 많이 서있어 왔다. 그 피해자 노릇을 더 심화시키려는 것이 신자유주의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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