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김부선이 되자

국가 기본의 재구축을 위하여 <20>

탐욕과 혼돈의 패거리 작당

“가장 나쁜 놈이 가장 꼭대기에 올라간다”는 하이에크의 말은 야당 내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관철되어 왔다.
국회의원은 우리 사회에서 입신양명, 최고의 출세 목표가 되었고, 야당은 그 지름길이요 통로였다. 야당에 줄을 댄 모든 사람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원 자리와 그 떡고물에 승부를 걸었다. 대리기사에게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호령했던 어떤 의원나리처럼, ‘완장’ 차고 한번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살고자 한 그 천박성과 탐욕, 바로 그것이 오늘의 절망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낸 기원이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패거리, 작당(作黨)의 혼돈이었다.
본래 ‘정당’이라는 말의 영어 단어는 ‘party’이다. 그런데 사실 ‘당(黨)’이라는 한자어는 예로부터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실제로 <논어>에도 “君子, 群而不黨(군자 군이부당)”이라 하였다. 즉, “군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무리를 이뤄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사서집주(四書集注)>에서 ‘당(黨)’에 대하여 “相助匿非曰黨(상조닉비왈당)”, 즉, “서로 잘못을 감추는 것을 黨(당)이라 한다”라 해석하고 있다. <설문(說文)>에는 “黨, 不鮮也(당, 부선야)”라고 풀이되어 있다. ‘당(黨)’이란 ‘흐릿하여 선명하지 못하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듯 ‘당(黨)’이라는 글자는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함께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공(公)’은 실종되고 오로지 ‘사적(私的) 이익’과 패거리 ‘당(黨)’의 탐욕만 존재하는 곳. 참으로 “입으로는 온갖 감언이설 미사여구 늘어놓으면서 실제로는 멸공봉사(滅公奉私), 패거리를 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누가 뭐라 하든 끈질기고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우리의 정당 모습을 촌철살인 그대로 표현해주는 기가 막힌 조어(造語)가 아닐 수 없다.
야당, 차세대로 마지막 승부해야

무려 500만 명의 국민 서명을 받은 세월호 특별법이 한낱 휴지조각으로 되어버린 것은 이 땅의 대의 제도 자체에 대한 철저한 파산 선고이다. 모든 것이 장군을 잘못 세운 국민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슬픈 현실이다. 불통의 끝을 보여준 정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국회가 가장 문제이고, 야당이 특히 문제이다.
다만 지금의 야당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구 체제 안에 새로운 세력이 태동하는 성장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계속 봉합하고 임기응변 임시변통으로 위기를 타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연명 치료에 불과할 뿐 종국에는 강제로 비극적으로 퇴장 당할 수밖에 없다. 현재 ‘계파 내에서만’ 원로급인 분들이 지휘, 관리하는 ‘식물 야당’을 살리려면, 차세대로 대폭 연령을 낮춰 예를 들어 우원식 의원이나 안희정 지사 등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새로운 얼굴을 내세워 한 판 승부를 해보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
만약 그러고도 또 실패한다면 깨끗이 당을 깨고 각자도생하는 것이 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유일하게 남은 명예로운 길이다.

모두 김부선이 되자

프랑스에서는 공익단체가 기소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국가와 사회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활동이 일상화되어 있다.
민주주의란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부터 시작하여 시민 스스로 사회의 정상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결국 민주주의를 완성해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고발자가 되어야 한다.

몇 년 전 한 지인이 진보 진영에서 상당히 알려진 한 인사에게 필자 얘기를 하자 그 인사는 “그 친구는 조직 내 분란을 일으켰다고 알고 있다”고 일언지하에 비판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DJ, 노무현, 김근태는 그 당시 정치 상황에서 ‘분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던가? 과연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진보와 개혁 그리고 민주가 성취될 수 있다는 말인지…. 그리고 민주 진영은 지금 왜 정부에 순종하지 않고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가?
마치 방미 씨께서 김부선에게 “조용히 지내라”고 점잖은 척 충고한 것과 똑같은 논리다. 진리는 그리고 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 모름지기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실천되어야 한다. 자기의 삶터와 일터라는 가까운 곳에서는 전혀 실천하지 않고 그저 침묵하고 방관, 동조하면서 오로지 멀리 열매와 자리만 추구했기 때문에 오늘의 총체적인 난장판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초래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조용히 있지 않은’ 그리고 ‘가만히 있지 않은’ 김부선이 훨씬 많아져야 한다. 우리 모두 김부선이 되어야 한다.
그간 시민운동 또한 이른바 시민정치를 표방하면서 결국 야당의 2중대화하고 소수의 명망가만 ‘출세’시켰다. 그리고 정작 시민들에게 권리 주기에 앞서 자신들의 권리와 권력만 추구하는 결과를 빚지 않았는지. 먼저 내 안에 존재하는 출세욕 그리고 권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도무지 한 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은 절체절명의 현실, 그러나 출로가 꽉 막힌 바로 혼돈의 그곳에서 종국에는 빅뱅의 폭발이 발생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은 시작된다.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끝에 비로소 희망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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