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2월 신한촌 입구에 새로운 목조 건축물이 세워졌다. 3.1 항쟁 1주기를 기념하여 신한촌 사람들이 세운 독립문이었다. 3월 1일 태극기가 계양되고 조선독립만세소리가 울려퍼지는 기념식이 열렸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4월 4일 새벽, 일본군이 신한촌에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둘러 조선인들을 죽였다. 한민학교에 사람들을 몰아 넣은 뒤에는 벤젠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에 걸쳐 벌어진 일본군의 대학살은 5일간 계속됐다. 이름하여 4월 참변 사건이다.
일본군의 연해주 학살 사건은 북간도에도 전해졌고 항일 무장 부대원들은 이를 갈았다. 6월 4일 홍범도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반일 연합부대 신민단부 독립군 30여명이 두만강을 건넜다. 독립군은 함경도 남양 강양동 일본 헌병 초소를 습격한 뒤에 다시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넘어왔다. 졸지에 본진을 습격당했다고 판단한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소대 병력을 파견해 독립군을 쫓았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에 조선 주둔 19사단 사령부는 야쓰까와 소좌에게 300여명의 대대병력을 인솔해 반일 세력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함경도 남양에서 두만강을 건넌 야쓰까와 부대는 먼저 도착해있던 남양수비대를 흡수해 독립군의 은거지인 왕청현 봉오동으로 향한다.
남양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 도문(투먼)시다. 현재의 도문시는 북중국경을 보기 위해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강폭이 좁아 강 건너 북녘땅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두만강 위로 다리가 연결되어 북한과 중국을 잇고 있다. 다리 한가운데는 막혀 있어 보통의 다리가 아니라 국경선을 품고 있는 특별한 다리임을 알 수 있다. 자동차 및 도보 용 다리 서쪽에는 철교가 놓여있다. 철교를 건너면 바로 북한의 남양역 건물이 도문 쪽을 향해 서있어 강건너 편에서도 역사 벽에 내걸린 북한의 옛 두 지도자 초상화가 보인다.

일제는 회령에서 길림으로 가는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한 끝에 만주국 시절에 이르러서야 남양과 도문을 잇는 철교를 건설했다. 비로소 일본은 동해를 거쳐 만주를 잇는 주요 교통로를 확보했다. 남양에서 두만강을 넘어 도문에 닿으면 동북쪽으로는 훈춘과 러시아 하산까지 서북쪽으로는 연길, 용정, 길림, 장춘까지 철도로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다. 남양은 북만주 진출의 주요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1920년 6월 7일 늦은 아침 일본군은 산봉우리들이 둘러싼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는 수남촌 봉오동에 들어왔다. 일본군 대열 후미까지 봉오동 마을에 진입한 것을 확인한 홍범도 장군은 하늘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봉오동 동산, 서산, 남산에 매복해 있던 홍범도 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봉오동 전투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기 위해 노력했지만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은 견고하게 일본군을 몰아부쳤다. 전투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4시가 지나고 앞을 볼 수 없는 폭우가 내리자 홍범도의 퇴각 명령에 따라 홍범도 부대는 유유히 사라졌다.

큰 손실을 입은 일본군은 남은 병력을 수습해 퇴각을 했다. 만만히 봤던 독립군에 일격을 당한 뒤 공포에 질려 퇴각하던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 소식을 듣고 지원 나온 일본군 병력을 만났다. 해가 저문 뒤 어둠 속에 마주친 일본군은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알고 또 한 번의 전투를 벌였다.
2025년의 봉오동은 빽빽이 들어선 나무로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모습을 한 봉오동 산자락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그 연합부대가 일본 제국주의의 정규군과 맞서 승리한 전투가 언제 있었냐는 듯 고요히 서있었다. 하지만 그 산봉우리에는 해방을 꿈꾸며 능선과 사면을 달렸던 항일 전사들의 혼이 남아있을 것이다.
봉오동의 참패는 일본군을 패닉에 빠지게 했다. 대일본제국의 정규군을 막아서는 세력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없어야 했다. 일본군은 간도 대토벌 계획을 세웠다. 또 이를 실행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훈춘사건을 조작한다. 10월 2일 일본이 매수한 중국 마적단과 마적으로 위장한 일본 칼잡이들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해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다. 일제는 마적단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며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북간도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다.
일본군은 대토벌 작전에 따라 간도 곳곳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다. 일본군의 목표는 조선독립을 꿈꾸는 항일 무장세력의 제거, 경신년 대토벌의 시작이었다.
거대한 전운이 임박해 오고 있음을 간파한 북간도의 독립군들은 힘을 모았다. 10월 13일 독립군 지휘관들이 모여 대연합 결성을 결의하고 총사령관이자 제1연대장에는 홍범도, 제2연대장은 김좌진을 추대하고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백두산은 천지를 둘러싼 땅이 아래로 퍼져 한없이 넓게 그 자락을 드리운다. 수십 갈래 능선과 계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빽빽한 나무들이 거대한 밀림을 이뤄 호위무사처럼 백두산을 감싸고 있다. 이 백두산 자락 마을 이도백하에서 연길로 향하는 길 중간 어스름에 청산리가 있다. 독립군 총사령부는 유리한 지형에서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백두산 자락 천지의 기운이 담긴 곳 청산리였다.

일본군은 훈춘, 왕청, 용정 일대에서 독립군을 소탕한다며 대병력을 동원했다가 허탕을 치자 청산리로 집결해 항일 독립군을 포위했다. 청산리전투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였고 역사가 말해주듯 일본군은 참패를 당했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의 빛나는 승전 역사이지만 한편으로는 북간도 조선인들이 겪어내야 했던 참혹한 시간 속에 있던 사건이었다.
<경신년대토벌>이 연변 항일 독립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참패를 당하게 되자 일본군은 조선인 마을에 분풀이를 했다. 일본군이 조선인 마을에 들이닥치면 주민들을 끌어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작두로 참살하고 일가족을 집안에 가둔 채 불태우는 행태를 반복했다. 철사로 코를 꿰고 손발을 묶은 뒤 땅에 끌고 다니다 죽이거나 사람들을 사격 연습용 과녁으로 삼기도 했다.
이른바 경신참변 또는 경신학살이라고 부르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만행이었다. 청산리 부근 마을 1,000여호가 불탔고 용정 장암동 36개 마을도 소각됐다.
가자지구 - 연변
경신학살은 청산리 전투가 시작되기 12일 전인 1920년 10월 9일 시작 됐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이었다. 일본군은 항일무장세력을 지원할 수 있다는 구실로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고 학살은 4개월 동안 지속됐다.
1919년 3.1 항쟁 – 3.13 용정 만세 시위와 학살 – 1920년 1월 15만원 탈취 사건 – 4월 연해주 참변 – 6월 봉오동 전투 – 10월 청산리 전투 – 경신참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간도와 연해주의 뜨겁게 연속된 항쟁의 시간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학살의 참상이 반복되는 과정에서도 북만주 조선인들은 해방의 꿈을 잃지 않았다.
80년 전 간도의 도시들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다를 바 없었다. 훈춘, 도문, 연길, 용정 할 것 없이 갑자기 무장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과 식량을 불태웠다. 일본군은 저항 세력을 찾는 다는 구실로 또는 저항 세력을 지원할 자원 자체를 소멸시키겠다는 이유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마적단의 횡포와 중국 관헌들의 무자비한 대우가 여기에 더해졌다.
1932년 만주국이 탄생한 이후로는 만주국군과 일본군, 중국 비적의 횡포 아래 간도 조선 민중의 고통은 더 심화됐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은 일제에 충성을 바친 조선 젊은이들을 모아 간도특설대를 구성해 독립군을 사냥하는 사냥개로 삼았다.
이 끔찍한 환경속에서도 조선인들은 항일 투쟁에 몸을 던지거나 가진 것을 내어 독립군에 전달했다. 만주의 조선인들은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짧았던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닐것이라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항쟁의 뜨거운 불길이 일었던 용정 명동촌 시인의 마을은 고요했다. 단층 한옥에 마련된 윤동주 생애관 속에 전시된 사진 하나가 가슴을 울렸다. 윤동주의 가족사진이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 끝에 숨을 거둔 동주 유골은 용정으로 돌아왔다. 사진 속에는 동주의 동생들과 친척들이 비석을 둘러싼 채 쓸쓸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다. 27살,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숨진 시인은 돌이 되어 가족의 품에 안겼다.
80년의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연변의 조선인들은 조선족으로 불리운다. 소수 민족의 문화와 자치를 인정하는 중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학교에서는 역사와 문화와 언어까지 독자적으로 배웠다. 한때 조선인 천지였던 연변의 도시들은 갈수록 조선족 인구가 줄어든다고 한다. 자본력 있는 한족들이 연변 조선족의 빈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다. 줄어든 인구와 그에 따른 영향력 저하로 시간이 더 지나면 조선족 자치주의 지위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한다. 조선족 이민 4세 정도 되면 우리말을 아예 쓰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국은 빛나는 선진국이 되었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연변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말도 들린다. 연변의 조선 사람들은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온 동포들을 만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연변 동포들을 중국인이라며 혐오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돈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들은 영미권 사람이나 동포는 우러러보면서 연변이나 아시아권 사람들은 깔보고 있다. 이른바 GDP민족주의다.
그러나 3.1 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힌 한국의 헌법정신을 따른다면 연변 동포들은 수많은 박해와 고통을 뚫고 독립운동에 나선 선열들의 후손들이다. 특별히 더 존중받지는 못할망정 멸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광복절 기념식의 중요한 자리들은 이들을 위해 마련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딛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성찰하기 위해서다. 연민과 연대로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혐오가 넘치는 시대를 조금이나마 정화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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