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페미니스트' 힐러리의 '맨얼굴'!

[먼슬리 리뷰]오늘날 자본주의에서 파시즘의 귀환<1>

이 글은 <Monthly Review>(66권 4호, 2014년 9월)에 실린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The Return of Fascism in Contemporary Capitalism"를 번역, 정리한 글이다.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원문 보기)

이 글의 제목이 정치현장에서 파시즘의 귀환과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련 짓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시즘은 의회제 선거민주주의의 불확실성을 거부하는 권위주의적 경찰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은 자본주의사회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맞닥뜨린 도전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의 통일성과 다양성

마땅히 파시스트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운동들은 특히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 동안 유럽 여러 나라의 중심부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스페인의 프랑코(Francisco Franco), 포르투갈의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프랑스의 페탱(Philippe Pétain), 헝가리의 호르티(Miklós Horthy),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Ion Antonescu), 크로아티아의 파벨리치(Ante Pavelic) 등이 포함된다. 당시 파시즘의 피해를 입었던 사회들은 일부는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닿아있었고 일부는 패배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그 사회들은 상당히 발전한 주요 자본주의사회였든지 소수가 지배하던 자본주의사회였든지 간에 서로 꽤나 달랐으므로 우리는 그러한 사회들을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그러한 사회들 속에서 구조 및 국면(conjunctures)의 다양성이 산출한 다채로운 효과를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의 이면에는 모든 파시스트 정권이 보여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1) 앞서 언급한 파시스트 정권들은 모두 자본주의라는 근본원칙, 그 중에서도 근대적 독점자본주의라는 원칙을 포함하며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이라는 원칙을 문제 삼지 않는 식으로 정부와 사회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파시즘을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특정한 방법이라고 여기지 자본주의 자체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어떠한 정치형태라고는 보지 않는다. 아무리 파시스트적인 연설에서 “자본주의” 또는 “금권정치”를 통렬히 공격하더라도 말이다. 누군가가 다양한 형태의 파시즘이 제시하는 “대안”을 검토하는 순간, 이러한 연설의 본질을 감추고 있던 거짓말은 곧바로 민낯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파시스트적인 “대안”은 자본주의사회의 핵심, 즉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이라는 원칙에 관해서는 항상 침묵한다. 파시스트적인 선택은 자본주의사회의 정치적 운영이 도전에 맞닥뜨렸을 때 나타내는 유일한 반응은 결코 아니며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례에 불과하다. 다만 파시스트적인 해법은 폭력적이고 심원한 위기의 특정 국면에서 지배적 자본에게 최선으로, 또는 심지어 가능한 오직 하나의 해결책으로 보일 뿐이다. 따라서 분석은 반드시 그러한 위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다.

(2)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사회를 파시스트적으로 관리하려는 선택은 항상 그리고 심지어 파시스트적인 것의 정의(定義)상,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에 기반을 둔다. 파시즘은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고, 선거절차에 의거해 다수자를 정하며, 그러면서도 소수자의 각종 권리를 보장하는 등 근대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지탱하는 일반적인 원칙들을 항상 집단 규율 및 최고지도자와 그 대리인들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정반대의 가치로 바꿔치기한다. 이러한 가치의 전도(顚倒)는 항상 복종절차에 분명한 정당성을 제공할 수 있는 퇴보적인 사상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른바 “중세적”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언급하거나 국가종교, 또는 소위 “인종”이나 종족적인 개념의 “민족”이 지닌 특정한 성격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포하는 것 등은 파시스트적인 권력이 활용하는 이념적 담론자원이다.

근대 유럽사(史)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파시즘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특징을 공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1) 세계적 또는 적어도 지역적인 수준의 자본주의체제에서 지배적인 패권국이 되길 열망하는 “발전한” 주요 자본주의국가의 파시즘.

이러한 파시즘형(型)의 본보기가 바로 나치즘이다. 독일은 1870년대 이래 주요한 산업국이자, 동시대의 패권국(영국, 두 번째로는 프랑스) 및 패권국이 되길 간절히 바란 국가(미국)의 경쟁자로 거듭났다. 그러나 독일은 1918년의 패배 이후 패권적 염원을 달성하지 못한 결과를 감당해야만 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그의 계획을 명쾌히 정식화하였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와 그 너머를 염두에 두고 전 유럽에 걸쳐 “독일”의 패권적 지배, 즉 나치즘의 발흥을 뒷받침했던 독점자본주의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요 경쟁자들을 상대로 일종의 타협안을 관철시키고자 했는데, 유럽과 러시아는 히틀러가, 중국은 일본이,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영국이, 미주(美洲)는 미국이 각각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타협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오류를 저지르고 말았다. 영국과 미국은 히틀러의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독일을 지지하였다.

일본 파시즘도 이 범주에 속한다. 1895년 이래 근대자본주의적 국가로 거듭난 일본은 동아시아 전반을 지배하길 열망하였다. 그러나 흥기하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일본식 관리 형태, 즉 겉으로 보기에는 선출된 의회처럼 “자유주의적” 제도에 기반을 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근대화를 거치면 변형된 천황(天皇)과 귀족층이 전적으로 통제했던 “제국적인” 관리 형태는 군부의 최고사령부가 직접적으로 운영하는 잔혹한 형태로 전락(轉落)하였다. 나치 독일은 제정/파시스트적 일본과 동맹을 맺은 반면, 영국과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중국이 저항했던 것처럼 동경(東京)과 충돌하였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주의를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이 도운 결과 국민당군의 결핍을 메워줄 수 있었다.

(2) 이등(二等) 자본주의국가의 파시즘.

이 범주에서는 파시즘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사조(思潮)의 창안자이기도 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으뜸가는 사례이다. 무솔리니주의는 1920년대의 위기와 늘어나는 공산주의자의 위협에 대한 이탈리아 우파(구(舊) 귀족층, 신흥 부르주아지, 중산계급)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자본주의나 그 정치적 도구인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세계는커녕 유럽이라도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품지는 못하였다. 총통(Duce)이 로마제국을 재건(!)한다는 그 모든 찬사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체제의 안정성이 하위국가(subaltern)로서 지중해의 주인인 영국이나 독일과의 동맹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야까지 이탈리아는 영국과 독일이라는 잠정적인 두 동맹 사이에서 계속 머뭇거렸다.

살라자르와 프랑코의 파시즘도 이탈리아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양자는 모두 우파와 가톨릭교회가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적 공화주의자의 위험에 대응하여 세워준 독재자였다. 따라서 주요 제국주의열강은 두 독재자의 반(反)민주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반공을 구실로 대며 그들을 결코 도편추방하지 않았다. 1945년 이후 워싱턴은 그들을 다시 권좌에 앉혀주었다. 그 대가로 살라자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립에 동참하였고, 스페인은 미국에 군사기지 공여를 허락하였다. 이어서 본성상 반동적인 자본주의질서의 보증수표인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가 등장하였다. 1974년의 카네이션 혁명(포르투갈)과 1980년 프랑코의 사망(스페인) 이후 이 두 체제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저(低)강도 “민주주의” 진영에 참여하였다.

(3) 패전국의 파시즘.

이 범주에는 프랑스의 비시 정부와 함께 벨기에의 레옹 디그렐(Léon Degrelle) 및 나치가 지원한 “플랑드르(Flemish)” 의사(擬似) 정부가 포함된다. 프랑스의 상류층은 “인민전선보다는 히틀러”를 선택하였는데, 이 주제에 관해서는 라크루아-리즈(Annie Lacroix-Riz)의 책이 참조된다. “독일의 유럽(German Europe)”이라는 기획에 복종했던 이러한 유형의 파시즘은 나치의 패배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나야만 하였다. 프랑스에서 파시즘은 공산주의자들과 여타의 레지스탕스 투사들(특히 드골)이 잠시나마 연합한 레지스탕스 위원회(Resistance Councils)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프랑스 파시즘은 미국의 패권에 자발적으로 복종(유럽의 복구 개시와 마샬 계획 및 나토에 프랑스의 참여)하면서도, 보수주의 우파, 반공주의자, 사회민주주의 우파가 반파시스트적이고 잠정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레지스탕스 출신 급진 좌파와 영구히 결별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하였다.

(4) 동유럽의 종속적 사회에서의 파시즘.

동유럽의 자본주의사회(폴란드, 발트 제국, 루마니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폴란드 시기 동안의 서부 우크라이나)를 검토할 때는 분석의 수준을 여러 단계 내려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낙후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종속된 자본주의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동유럽 자본주의국가의 지배계급은 전간기(戰間期) 동안 나치 독일을 지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이 히틀러의 기획을 두고 어떠한 정치적 셈법을 가졌었는지는 개별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에서는 가톨릭과 교황의 인기에 힘입어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었고, 이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경우 폴란드를 비시 정부를 본뜬 독일의 속국으로 만들 터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폴란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에게 폴란드인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Roma) 등과 마찬가지로 절멸이 예정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폴란드 파시즘에게 베를린과 협력할 여지는 없었다.

폴란드와는 대조적으로 호르티의 헝가리나 안토네스쿠의 루마니아는 나치 독일로부터 하위국가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헝가리와 루마니아에서의 파시즘은 각국이 처한 특정한 사회적 위기의 산물 그 자체였다. 헝가리에서는 벨러 쿤(Béla Kun) 시기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고, 루마니아에서는 헝가리인과 루테니아인(Ruthenians)에 맞선 국가적이고 맹목적인 동원(動員)이 시행됐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히틀러의 독일은 “독립된” 크로아티아를 지지했고 이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독일의 뒤를 따랐다. 독일은 반(反)세르비아적인 우스타시(Ustashi)에게 가톨릭교회의 결정적인 지원을 일임한 반면, 세르비아인에게는 멸절의 표식을 내렸다.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 투쟁의 전망 및 반동적인 유산(有産)계급의 대응과 관련하여 1939년 소련 합병 이전의 영토에서뿐만 아니라 소련이 상실한 지역인 발트 제국 및 폴란드에서의 상황을 확실히 바꾸어버렸다. 1921년 체결된 리가 조약에 따라 폴란드는 벨라루스의 서쪽 지역인 볼히니아(Volhynia)와 이전에 오스트리아의 왕실소유지였던 남부 갈리시아 및 제정 러시아의 한 주(州)였던 북부 갈리시아를 포함하는 우크라이나의 땅을 합병하였다.

동유럽 전체에서 두 진영은 1917년, 심지어는 첫 번째 러시아혁명이 터진 1905년부터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한편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급진적인 농지개혁을 열망한 소농층 및 특히 유대인으로 구성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친(親)사회주의자(이후 친볼셰비키) 진영이 갖춰졌고, 다른 한편에서 종국에는 파시스트의 영향력 아래서 반민주적 정부의 뜻을 선뜻 따르게 된 모든 지주계급 내부의 반사회주의자가 뭉치게 되었다. 소련은 1939년 발트 제국, 벨라루스, 서부 우크라이나 등지를 재통합하면서 이러한 진영 간 대조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동유럽에서의 “친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 사이의 갈등을 다룬 정치지형도는 희미해졌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주식민지를 통해 병합된 벨라루스 및 우크라이나 지역을 “폴란드화(化)”하겠다는 기획을 고수한 폴란드 국수주의와 그것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인민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반폴란드적·반러시아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와 우크라이나 인민은 멸절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위국가로서 우크라이나와의 동맹을 생각지도 않은 히틀러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독자에게 올랴 오스트리츄크(Olha Ostriitchouk)의 권위 있는 작품인 『과거와 직면한 우크라이나인들(Les Ukrainiens face à leur passé)』을 거론하고자 한다.(각주 1번) 이 지역(오스트리아령 갈리시아, 폴란드령 우크라이나, 이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되는 소러시아)의 현대사에 관한 오스트리츄크의 철저한 분석은 지역적 파시즘이 점령한 장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갈등 속의 긴박한 문제에 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파시즘에 대한 서구 우파의 순종적인 시각

양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 의회 내의 우파들은 파시즘, 심지어는 더욱 혐오스러운 나치즘에 대하여 항상 고분고분하였다. 처칠은 자신의 극단적인 “영국성(性)”과는 상관없이 무솔리니에 대한 동조를 결코 감추지 않았다. 미국의 대통령 및 기성 정치세력인 민주당·공화당은 히틀러의 독일과 무엇보다도 제정/파시스트적 일본이 내비친 위험을 한참 뒤에 이르러서야 발견하였다. 미국 정계의 특징적인 냉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다른 이들이 조용히 생각한 것을 공공연히 떠벌렸다. 즉 전쟁을 통해 주역들인 독일, 소비에트 러시아, 패배한 유럽 국가들을 닳아빠지게 하고 미국은 가능한 한 늦게 개입하여 이득을 거두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규율이 잘 잡힌 반파시스트적인 입장 표현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1945년에 살라자르와 프랑코가 복권될 때 미국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게다가 가톨릭교회는 정책적으로 항상 유럽의 파시즘을 묵인하였다. 따라서 교황 비오 12세를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협력자라고 묘사해도 믿기 어렵지는 않을 터이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자체도 한참이 지난 후 살인마적인 광기를 보이는 단계에 도달해서야 비난을 불러일으켰을 따름이다. 히틀러의 연설이 불러일으키고 강조한 “유대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증오는 당시 많은 정치인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오직 나치즘이 패배한 이후에야 비로소 반유대주의는 원칙적으로 비난 당해 마땅한 것이 됐다. 그 작업은 한결 수월해졌는데, 자칭 “쇼아(Shoah)의 희생자”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로 변했고 그들은 유럽의 반유대주의 공포와는 결코 연루된 적이 없던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을 상대한 서구 제국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분명 나치와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붕괴는 서유럽(“장막”의 서쪽)의 우파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자기네들 안에서 파시즘의 공범이나 동맹을 구별하여 분리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파시스트적인 운동은 다만 뒷전으로 밀려나 무대 뒤에 숨어야 했던 것이었을 뿐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독 정부뿐만 아니라 그 후원자들인 미국·영국·프랑스는 서독에서 “화해”라는 미명 아래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거의 모두 그대로 놔두었다. 프랑스에서는 비시주의자들이 앙투안 피네(Antoine Pinay)와 함께 정계에 나타나더니 레지스탕스를 겨냥하여 “대독 협력에 대한 처형 남용”이라는 명분으로 소송 절차에 착수하였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은 일단 잠잠해졌으나 오늘날에도 그들은 여전히 기독교민주당과 가톨릭교회의 반열에 버젓이 존재한다. 스페인에서는 (이후 유럽연합이 되는)유럽공동체가 1980년에 “화해”라는 타협안을 강요했고 이후 프랑코 정권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어떠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그야말로 금기시됐다.

이후 파시즘의 귀환과 관련하여 애초에 보수주의 우파가 착수했던 반공주의 운동을 지지한 서부 유럽과 중부 유럽의 사회주의정당 및 사민주의정당은 책임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잊혀졌다. 이들 정당이 사회자유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고, 반동적인 자본주의질서를 보장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고안된 유럽의 복구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며 다른 여러 수단 중에서도 특히 나토를 통해 미국 패권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 결과,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우파와 사회자유주의자들이 뭉친 반동연합이 형성됐다. 그들은 필요 여하에 따라 새로운 극우파의 요람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으로 동유럽의 파시즘은 1990년도 이래 재빨리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 내의 모든 파시스트적인 운동은 정도를 달리하긴 하나 히틀러주의의 충실한 동맹이거나 협력자였다. 아직 그때까지 활동하고 있었던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패배가 다가오면서 서구에 붙었고, 결과적으로 미군에게 “항복”할 수 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연합국 협정을 위반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소비에트나 유고슬라비아, 또는 동유럽의 신민주주의체제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미국과 캐나다에 둥지를 틀었다. 더하여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그들의 맹렬한 반공주의를 칭찬하며 그들을 돌봐주었다.

『과거와 직면한 우크라이나인들』에서 오스트리츄크는 필요한 모든 것을 동원해 미국의 정책 목표(그 너머엔 유럽의 정책 목표)와 동유럽의 지역(특히 우크라이나) 파시스트들의 정책 목표 간의 반박할 수 없는 결탁을 다루었다. 예를 들어 드미트로 돈초프(Dmytro Dontsov) “교수”는 1975년 사망 직전까지 지독히도 반공적(“유대 볼셰비키주의”는 그에게 습관과도 같았다)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인 그의 모든 저작을 캐나다에서 출간하였다. 서구의 이른바 민주국가들의 정부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오렌지 혁명”(즉 파시스트 반혁명)을 지지했고 심지어는 자금을 댔으며 조직하기까지 하였다. 그 모든 일은 계속되고 있다. 캐나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찍이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시를 위한 길을 터주었다.

공언된 파시스트에 대한 지지를 대놓고 인정할 수 없는 “중도적인” 매체가 이러한 자기네들의 지지를 감추는 방법은 단순하고 현명하다. 바로 파시스트란 말을 “민족주의자”란 용어로 분식(粉飾)하는 것이다. 일례로 『르몽드』지가 쓴 대로 르 펜(Marine Le Pen)이 더 이상 파시스트가 아니고 민족주의자인 것처럼 돈초프 교수도 더 이상 파시스트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이다!

이러한 진짜배기 파시스트들이 앞서와 같이 단순히 그렇게 떠든다고 해서 정말로 “민족주의자”일까? 의심스럽다. 오늘날 민족주의자란 호칭은 오직 이 세계를 실제로 지배하는 세력의 힘, 즉 미국과 유럽의 독점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만이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데 소위 “민족주의자들”은 워싱턴, 브뤼셀, 나토의 친구들이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그들 불행에 대한 책임이 결코 없는 결백한 이웃 대다수에 대한 맹목적 증오에 가깝다. 그 이웃이란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짜르를 제외한 러시아인들이고,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세르비아인이며,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그리스, 여타지역의 새로운 극우파들에게는 “이민자들”이다.

미국(공화당과 민주당) 및 유럽(의회 우파와 사회자유주의자들)의 주요 정치세력과 동유럽의 파시스트들 간의 결탁이 불러오는 위험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은 몸소 이 결탁을 주도하는 대변자로 우뚝 서서 전쟁히스테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그녀는 심지어 조지 부시(George W. Bush)보다도 더욱 복수심에 불타, 냉전의 재림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 다른 여타 지역에 대한 더욱 공개적인 간섭을 바라며)러시아, 중국,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반기를 든 인민들에 대한 예방 전쟁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미국이 국가적 쇠락에 이렇게 황급히 대응하면서 동시에 힐러리 클린턴이 “첫 번째 여자 미국 대통령”이 되는데 충분한 지지를 건넬 수도 있다는 점은 실로 불행하다! 이 가짜 페미니스트 뒤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결코 잊지 말도록 하자.

오늘날 미국 및 오래된 “장막” 서쪽 유럽의 “민주적” 질서에서 파시스트의 위험은 분명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지배적 자본은 고전적인 의회 우파와 사회자유주의자들 간의 결탁을 거치면서 역사적 파시스트 운동에 뒤따라 나온 극우의 도움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선거에서 극우가 거둔 성공을 두고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유럽인들 또한 널리 퍼진 일반화된 독점자본주의의 피해자임이 분명하다.(각주 2번) 그렇다면 우리는 유럽인들이 우파와 소위 사회주의 좌파 간의 공모에 대면했을 때 왜 선거를 포기하거나 또는 극우에 투표하는 방식을 선택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잠정적인 급진 좌파의 책임은 어마어마하다. 만일 이들 좌파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분명한 진전을 제시할 배짱이 있었더라면 좌파에게 부족한 신용을 얻을 터였다. 오늘날 단편적인 시위와 방어적인 투쟁에 여전히 부족한 일관성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대범한 급진 좌파가 필요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운동”은 노동계급에게 유리하게끔 사회적 힘의 균형을 반전시킬 수 있고 진보적인 성취를 가능케 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의 여러 민중운동이 거둔 승리가 바로 그 증거이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극우가 선거에서 이룩한 승리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극우의 성공은 매체로 하여금 “극우파와 극좌파의 대중영합주의자들(populist)”에게 똑같은 비난을 던지게 한다. 그럼으로써 극우파는 극우라는 단어가 증명하듯 친자본주의적이고 따라서 자본의 잠재적인 동맹인 반면, 극좌파는 자본의 권력체계를 유일하게 상대할 수 있는 잠정적인 위험이라는 사실을 모호하게 한다.

미국의 극우는 결코 파시스트라고 불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슷한 국면에서 미국식 무타티스 무탄디스(mutatis mutandis, 필요한 부분만 약간 수정한다는 뜻의 라틴어-역자 주)를 본다. 어제의 매카시즘은 오늘날의 티파티 광신자 및 전쟁도발자(일례로 힐러리 클린턴)와 마찬가지로 “정부”를 상대로 체제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들의 요구에 응했다는 혐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가 독점자본의 주인과 마름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된다고 이해하며 그러한 “자유”를 “정부”로부터 공공연히 지킨다.

마지막으로 파시스트 운동에 관한 한 가지 관찰을 덧붙이자면, 그들은 언제, 어떻게 그들의 요구를 멈추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지도자 숭배와 맹목적인 순종, 광신을 담고 있는 의사민족 또는 의사종교 신화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지고한 믿음(valorization), 말보다는 주먹을 앞세우기 위한 민병대 모집 등은 파시즘을 통제하기 무척 어려운 세력으로 만든다. 실수, 심지어는 파시스트들이 추종하는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비합리적인 일탈 등은 불가피하다. 히틀러는 참으로 병든 정신의 인물이었으나, 그는 자신을 권좌에 앉혀준 대자본가들에게 광기의 극단까지 따르도록 강요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독일 인구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히틀러의 경우는 유독 특이한 사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솔리니, 프랑코, 살라자르, 페탱 등은 분명 정신이 병든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동료 및 심복 대다수는 범죄를 저지르길 망설이지 않았다.

각주
1. 올랴 오스트리츄크(Olha Ostriitchouk), 『과거와 직면한 우크라이나인들(Les Ukrainiens face à leur passé)』 (브뤼셀: P.I.E. Lang, 2013).
2. 자세한 설명은 사미르 아민의 『오늘날 자본주의의 내파(The Implosion of Contemporary Capitalism)』 (뉴욕: Monthly Review Press, 2013)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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