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결국, 고양이는 사랑의 인질인가?

[프레시안 books] 피터 트라튼버그의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서>

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검은색의 얼룩 고양이가 앞발을 쭉 뻗은 채 엎드려 있다. 편안하지만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이다. 그 주변으로 쥐만한 크기의 남녀 인간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양이 등 위에 드러눕거나 꼬리에 얼굴을 묻은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표지에 등장하는 스노우캣의 그림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섣부른 예견으로 책장을 넘긴다. 아마도 고양이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다정다감한 에세이겠지. 몇 장을 넘긴 후 아뿔싸, 나는 다시 표지를 들춰본다. 제목을 다시 확인한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서>(피터 트라튼버그 지음, 허형은 옮김, 책세상 펴냄). 그건 비유가 아니었다.

▲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서>(피터 트라튼버그 지음, 허형은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논픽션 작가 피터 트라튼버그는 원래 뉴욕 주 북부에서 부인과 함께 살았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점에 노스캐롤라이나의 대학에서 강의 제안이 들어왔고, 다행으로 여기며 집을 떠났다. 그의 부인 역시 유럽에서 아티스트 에이전시로 일하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그 오렌지색 고양이 이름이 뭐죠?" 집에 머물며 고양이를 봐달라고 부탁했던 청년 브루노였다. 화가 났다. 두 주 동안 함께 지낸 동물, 아니 자기가 얹혀살던 집의 진짜 주민의 이름을 모른다니.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문제는 바로 그 고양이, 비스킷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집을 나간 지 사흘이나 지났다고 한다. 가벼운 에세이로 생각했던 책은 이제 서스펜스 스릴러가 된다.

함께 살던 고양이, 개, 아이가 사라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묻어둔 상처가 욱신거리며 되살아나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나의 심장에도 그런 종류의 발톱 자국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서초동의 월세방에 살 때는, 집주인이 태연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새로 올 세입자에게 방을 보여주었으니 언제까지 빼주면 된다고. 그리고 문을 열 때 뭔가 시커먼 게 튀어나갔는데, 집 뒤에서 울고 있는 것 같다고. 명륜동의 반지하 방에서 살 때는 창밖을 얼씬거리던 길고양이 새끼를 꼬드겼다. 겨우 입양처를 찾아 3층 사무실에서 전해주려고 했는데, 동료의 팔을 피범벅으로 만든 뒤 날다람쥐처럼 창밖으로 날아서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돌아올까? 무엇으로 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왼손에는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참치 캔을 까서 들고, 오른손에는 쥐 낚싯대 장난감을 딸랑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자책한다. 물리적으로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망령을 부르는 헛된 몸짓 같기도 하다.

상실의 즙으로 가득 차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든 인간은 그래도 뭔가를 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머리를 짜낸다. 동네의 고양이 집사들을 소집하고, 수배 전단을 붙이고,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하며 녀석의 맛동산(고양이의 건강한 변이 적당한 모래를 묻혔을 때의 상태)을 집 주변에 뿌려놓는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덜 쌌지? 밥도 덜 먹었다는 거 아냐. 입도 까다로운 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래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다행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가장 괴롭다. 이 불행한 작가의 처지가 딱 그렇다. 없는 살림에 비행기 티켓을 끊으려니 저가항공이 2250킬로미터를 돌아서 간다. 기껏 마우스를 굴려 '고양이를 찾습니다' 전단을 만들었지만, 저 불성실한 브루노가 이걸 동네에 붙여줄지도 알 수 없다. 행동은 할 수 없고 고민만 깊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뜻밖의 행로에 접어든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조각에 이끌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거대한 의식의 흐름에 빠졌듯이, 그는 고양이에 얽힌 상념의 대양으로 표류한다.

작가는 비스킷을 키우기 1년 전 바이티라는 고양이의 죽음을 겪었다. 그의 삶에 다른 고양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이티와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은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복잡했던 자신의 인생이 고양이라는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면서 어떤 변화를 이룰 것이라 기대했고, 어느 정도는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 결과 바이티를 잃은 슬픔은 그가 이전에 겪은 '어떤 슬픔보다 더 꾸준하고 강력했다'고 말한다. 이제 비스킷이 집을 나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된 이 사건은, 그에게는 분명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 조엘&에단 코언 형제의 최신작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에선 잠깐 맡아서 보살피던 고양이 율리시스가 도망치는 바람에 애태우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CBS Films

저명한 논픽션 작가답게 그는 동서고금의 고양이에 대한 저술, 이론, 역사를 끄집어내며 자신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한다. '세 개 대륙에 사는 집고양이와 야생고양이 979마리의 DNA 샘플을 채취해' 고양이의 조상이 어디에서 처음 살았는지, 인간과는 언제부터 함께 살았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그들이 어떻게 인간의 곡물창고로 들어와 행동을 수정하며 인간과 함께 사는 법을 터득했는지도 설명한다. 그리고 이질적인 두 존재의 만남이라는 공식에 자신의 과거를 대입한다. 비스킷을 처음 집에 들이며 다른 고양이들과의 접촉에 긴장했던 일을 떠올리다가, 이어 자신이 부인 F와 사랑에 빠질지 모른다는 예감을 얻었던 순간을 생각한다.

이 책은 이렇게 잃어버린 고양이, 일반적인 고양이, 사람과 동물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겹겹이 들여다보는 다층적인 책이 되어 간다. 그리고 점점 고양이에 대한 책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랑에 대한 책이 되어간다.

"나는 F와 연인이 되기 바로 직전에 머뭇거렸다."

그는 피렌체에서 마사초가 그린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추방>을 보며 인간의 프라이버시에 대해 생각했던 일을 떠올린다. 왜 이브는 가슴과 성기를 가리고, 아담은 얼굴을 가리고 있을까? 무엇이 더 부끄러운 건가? 그는 자신이 처음 F의 얼굴을 만지려 했을 때 그녀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던 때를 떠올린다. 그는 F와의 결혼이 만들어낼 상실에 대해 고민했다.

"결혼은 어떻게 보면 배신을 위해 만들어진 환경이다. 결혼이란 하이힐 구두나 넥타이 핀, 이쑤시개 같은 승객이 지닌 어떤 뾰족한 액세서리에도 쉽게 터져버리는 열기구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맞이하게 된 무력감의 원인이 단지 고양이의 가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F와 자신의 관계가 결정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자각한다.

▲ <왓츠 마이클?)(고바야시 마코토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학산문화사
누군가 사라지면, 그의 모습이 어떤 고정된 위치의 습관적인 자세로 떠오른다. 저자도 비스킷이 특별히 좋아했던 자리, 낮잠을 청하던 장소를 생각한다. 빨간 소파 위, 전날 던져놓은 리모컨 옆, 손님용 의자, 라디에이터 나무 위, 침실 벽장 맨 아래 칸…. 이러한 선호가 사랑일까? '비스킷이 빨간 소파를 사랑했을까? 부엌 조리대를 사랑했을까?' 그것이 단순한 사물이라면 큰 상관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고양이가 굳이 누구 곁에서 잠을 청한다면. 부부의 침대 중에서 한쪽만을 차지한다면. 만화가 고바야시 마코토가 <왓츠 마이클?>(학산문화사 펴냄)에서 예리하게 표현하듯, 그 작은 선택은 커다란 질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고양이라면 다른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 고양이가 특정한 집을 더 사랑할까? 나와 길에서 만났을 때 아는 척을 해줄까? 나를 주인, 동거인, 아니 더 내려가서 집사나 하인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최소한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여길까? 작가는 동네의 어느 수풀에서 비스킷을 발견하고 "이야, 이게 누구야."말을 걸었을 때를 떠올린다. 고양이는 다가와 발치에 앉은 다음 쓰다듬어 달라고 몸을 쭈욱 폈다. 그리고 그의 손길을 한껏 받은 뒤에야 엉덩이를 들고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그 만족감을 무엇에 비유하랴?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렇게 많은 지식과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히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말하자면 이 책은 납치극이고, 납치범은 작가 자신이다. 아니, 지금 고양이가 나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 속이 타 들어가는데, 사랑의 존재론적 고찰 타령만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이 상황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언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비스킷에게 자신을 부르는 '비스킷'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지만 우리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만 고양이의 생사를 알 수 있기에, 그의 온갖 고급스러운 푸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의 술책을 분쇄하기 위해 '과연 비스킷은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스포일러를 터뜨려버릴까도 생각했다만 참기로 했다. 다만 내가 책을 다 읽기 전에, 작가의 페이스북을 염탐해 거기 있는 오렌지 빛깔의 고양이 사진을 찾아냈다는 정도만 알려주겠다.

▲ 피터 트라튼버그와 고양이 '비스킷'. ⓒhttp://www.petertrachtenber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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