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법 지키는 게 법치 본질"

[인터뷰] 법조 인생 55년 기념 선집 펴낸 한승헌 변호사

"한 시대가 끝나면 단락을 짓고 역사 청산을 시작해야 하는데, 우리는 1945년 해방이라는 엄청난 전환기를 겪으면서도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과정은커녕 제도적인 청산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지요. 4.19 때도 그랬고, 유신 뒤에도 그랬습니다. 프로그레스만 있지 프로그레시브가 없다고 할까요."

대한민국의 어두운 시절 속에서 후에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 1호'로 수식되는 삶의 궤적을 남긴 한승헌 변호사(80)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독재정권 하에서 핍박받고 외면당한 수많은 양심수를 변호했고 그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야말로 삶이 곧 시대인 인물 중 하나다. 권력의 전횡과 그로 인해 나온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동안 그가 가졌을 참담한 감회는 우리의 과거 청산이 이렇게나 미비한 만큼 여전히 강조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유별난 고생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인권변호사' 같은 수식이나 '정의롭다'는 평가에 손사래를 친다. 또 시대의 어두움에 분개하기보다, 그 어두움 속에서 역설의 맛과 희망의 싹을 보라고 권유한다. 유머를 사랑하고 다수의 유머 책을 내기도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에게 있어 유머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역사가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그늘 속에서 시대를 웃으며 감내하는 비법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법조 인생 55주년을 기념하여 네 권의 기념 선집을 발간했다. <피고인이 된 변호사>(범우사 펴냄)는 그가 살아온 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 법률가 한승헌, 인간 한승헌으로서 사고한 바를 담은 자전 에세이집이다. <권력과 필화>(문학동네 펴냄)는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 사건을 비롯하여 그가 변호를 맡아 온 필화 사건 열일곱 건의 개요와 재판 기록을 통해, 이 땅의 표현의 자유를 향한 싸움을 담은 책이다.

<日韓現代史-平和と民主主義を考える(한일 현대사-평화와 민주주의를 생각한다)>(일본평론사 펴냄)는 그가 일본 신문 등에 일본어로 발표한 글로 이루어졌으며, 한일관계를 고찰하는 한편 역사 문제에 있어서 일본의 도발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는 그가 쓴 글 가운데 법치의 본질과 한국 법치주의의 허점과 문제점을 다룬 글을 골라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들은 어두운 시대를 돌파한 한 개인의 기록이자, 여전히 법치주의의 본질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2014년의 한국 정권과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다. 스스로의 법조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최근 사법계를 둘러싼 사건과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정한 사법 독립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그에게 물었다. 다음은 지난 3월 31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한승헌 변호사와 나눈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는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 한승헌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 할 것"

프레시안 : 최근 법조 인생 55주년을 기념하는 선집 4권을 펴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지난 반세기간 법조인으로서의 활동을 정리하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한승헌 : 사실 저는 본디 법조인을 꿈꿔서 법조인이 되었던 것도 아니고, 법조인이 되고 나서도 아주 평범하고 평온한 법조 생활을 하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제가 법조계에 들어간 50년대 말 이후 곧바로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닥쳤고, 원하지 않게 그 광풍에 휩쓸렸던 것이지요. 그 역사의 한복판에 떠밀려 고생과 보람이 뒤엉킨 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 민주주의나 법치주의가 망가지는 과정 속에서, 죄 없는 사람이 죄인이 되고 풀려나야 할 사람이 징역살이를 하는 현실 속에서, 변호사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소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참담한 심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현장을 떠날 수 없어서 나대로 몰입했던 것은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무력감을 느끼거나 치욕스러웠던 경험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핍박받는 사람들 곁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를 이끌어온 원동력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자기 긍정의 일면을 굳이 숨기지 않겠습니다.

프레시안 : 어느 인터뷰를 보니,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한승헌 : 네.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변호사로서 다하고자 했던 소임을 다 이루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아쉬움입니다. 또 그나마도 변호사로 살 수 있었기에 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의인들과 고통을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자신에게 힘과 권능, 기회가 있어야지 남도 도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변호사 재수' 한 번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다시 태어나서 변호사가 되더라도 민주헌정을 짓밟고 인권을 유린한 그런 군사독재자들은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웃음)

생계 위해 걸은 법조인의 길

프레시안 : 선생님 약력을 보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려다가 나중에 다시 전주로 올라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다니셨어요.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법조 생활을 하게 되고요. 그 길을 걷게 되신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요.

▲ <피고인이 된 변호사>(한승헌 지음, 범우사 펴냄). ⓒ범우사
한승헌 : 그렇습니다. 애초에는 중학 진학도 준비하지 않고 아버지 농사일을 도와드리며 살려고 마음먹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중, 고, 대학 진학을 하게 되었지요. 사실 대학서도 법학 전공을 안 했어요. 전북대학교 법정대학에 들어갔는데 과가 정치학과, 법학과 딱 두 개 더라고요. 그 중 법학과는 별로 마음에 없어서 나머지 하나인 정치학과를 간 겁니다. (웃음)


1,2학년 때는 잡독에 몰두하느라 법률 공부는 안 했어요. 그러다 3학년 올라가면서 대학 졸업 후의 사회 진출, 취직 걱정이 밀려닥치는데 그걸 면하는 길이 고등고시 합격의 길밖에 없더라고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간 딱지 놨던 애인을 다시 찾아가듯이 전에 괄시했던 법률 책을 사 모아가지고, 소나기식 공부를 했습니다. 한 번 떨어졌고 다행히 두 번째에 합격한 뒤 대학을 졸업 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법조인이 된 것은 이처럼 생업을 갖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저 하나 믿고 사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신분이나 소득 면에서도 너무 취약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실패한 셈이지요. 입신양명하면 부귀영화가 따라야 한다는데, 변호사를 하면서도 축재는 못 했으니까요. (웃음)

프레시안 : 1957년 고등고시 8회 사법과에 합격하시고 군법무관으로 법조인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1960년 11월 부산지검 통영지청의 검사로 임명되었는데요. 검사가 된 것은 희망해서였습니까?

한승헌 : 마음속으로는 법관이 되고 싶었지요. 그런데 군에서 3년 반 근무하고 예편한 뒤 현직에 가려고 했더니 이상하게 4.19 직후인데도 법원 검찰에 빈자리가 나지 않았어요. 지금에 비해서 선택의 폭이 좁은 때였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동기들도 법원이나 검찰 쪽에 다 원서를 내고 채용 통지가 먼저 오는 데로 가자고 했지요. 그런데 법무부에서 먼저 임명 통지가 와서 검사 생활을 해보니 적성이나 기질상 잘 맞지 않아서 5년 근무하고 변호사가 된 겁니다.

프레시안 : 검사로 일하는 동안은 죽 통영에서 계셨던 겁니까.

한승헌 : 1960년 가을부터 통영에서 근무하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난 다음 해에 법무부로 옮겼지요. 그리고 1963년에는 서울지검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짧은 시일 안에 지방 근무, 법무부 근무, 서울지검 근무 등 다양한 체험을 한 셈이지요.

프레시안 : 그런데 그 당시 그렇게 빨리 '검사 졸업'한 경우가 없었죠?

한승헌 : 주변에서 모두 말렸어요. 검사 5년 경험 가지고는 어디 나가서 밥 먹기 힘들다고요. 사표도 바로 수리가 안 되었지요. 그런 경고를 뿌리치고 나와 보니까, 나 스스로 만용을 부렸다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았어요. 만약 검찰에 더 오래 있다가 간부급으로 올라가게 되면, 검사 체질이 굳어져 더욱 적응 장애를 겪게 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거든요.

편 없는 자들 편에 서다보니

프레시안 : 변호사 개업 한 달만인 1965년 10월, 소설가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 필화사건 변호를 맡으셨습니다. 이게 변호사님이 변호한 필화사건 1호인데요.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에 나온 당시 상황을 보니 대단히 살벌했던데요. 변호를 맡게 된 경위는 어떻게 됩니까?

한승헌 : 아마 실제 법정 활동, 즉 재판은 1965년이 아니라 1967년부터 시작됐을 거예요. 맡게 된 계기는 안동림 씨라고, 저하고 문단 친구인 소설가가 있었는데, 남정현 씨가 이 소설 때문에 검찰에 시달리고 있다며 돌봐주지 않겠냐며 절 찾아온 겁니다. 그래서 그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지요.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이게 내가 맡은 필화사건 1호, 시국사건 1호가 됐는데 그 당시엔 계속 그런 시국사건을 맡게 되리라는 건 생각조차 못 했죠. 그저 문단 친구가 걱정하니까 돕게 된 건데요. 그 뒤에 계속해서 필화사건을 포함한 시국사건이 계속 터지니까 도중에 발을 뺄 수가 없어 몇 십 년을 그 '판'에서 뛰게 된 거지요.

1965년 소설가 남정현은 <현대문학> 3월호에 '분지(糞地)'라는 단편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사망한 어머니를 둔 주인공 '홍만수'가 여동생의 동거남인 미군의 아내를 겁탈한다는 줄거리이다. 제목 '분지', 즉 '똥의 땅'은 강대국 미국에 의해 자주권을 잃은 남한의 현실을 상징한다. 북한은 이 소설을 조선로동당 기관지 <조국통일> 5월 8일자에 무단 전재했고, 이를 계기로 남정현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다. 재판은 표현의 자유와 국가 검열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게 되면서 이목을 끌었고, 소설가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선고유예로 끝났다. (위키백과 '분지 필화 사건' 항목 참조)

▲ <권력과 필화>(한승헌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프레시안 : 소설 발표 당시 남정현 씨는 촉망받는 작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는 뚜렷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은데요.

한승헌 : 안수길 선생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작갑니다. 아주 발랄하고 예리한 작가로 평판이 나 있어서 동인문학상을 받기도 했었지요. 그렇게 유망하던 작가가 이 사건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유죄 판결까지 받으니 아무래도 위축이 되어서인지, 그 후로도 작품을 쓰긴 썼지만 주목을 많이 받는 작품을 내지는 못했어요.

프레시안 : 사실 이 사건은 1965년의 한일회담 반대 정국, 즉 6.3사태를 덮기 위한 박정희 정부의 대책이랄까 반응 중 하나였지요?

한승헌 : 그렇습니다. 이 사건이 터진 1965년은 한일회담 반대 범국민투쟁, 베트남 파병 등 국내외로 박정희 정권에게 대단히 곤혹스러운 때였습니다. 분지 사건 같은 공안사건은 대부분 정권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나 위기를 덮기 위해, 사람들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나는 거거든요. 그 효과를 보더라도, 분지 사건으로 남정현 한 사람 개인이 피해를 입은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문단 내지는 지식인 사회에 두려움을 줬다는 점에서 정권으로서는 수지를 챙긴 일이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엔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독재정권을 독재정권답게 부각시키는 일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고 봅니다.

프레시안 : 이후로 김지하 오적 사건, 동백림 사건 등 또 다른 공안사건들을 연달아 맡게 됐습니다. 우연히 문단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며 시작된 거라고 하셨는데, 이후로는 자처한 부분도 있겠지요?

한승헌 : 어떤 사건은 변호를 자처한 것도 있었지요.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구속된 천상병 시인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누구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피고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건들도 내가 정의감이 남달라서라거나 그런 사건의 변호를 잘 해서가 아니라 당시엔 시국사건을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라도 나서자' 싶어서 맡았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또 자꾸 내게 의뢰가 왔던 거고요.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조용히 살고 싶었죠. (웃음)

출판사를 차린 사연

프레시안 : "공 잘 차는 축구선수처럼 동어반복"이라며 '인권변호사'라는 말이 달갑지 않다고 하셨는데, 어쨌건 운명적으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인혁당 조작 폭로 사건에서 김지하의 변호인으로 나선 일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각각 옥고를 치르셨고, 급기야 1976년 11월부터 1983년 8월까지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하셨습니다. 생업의 기반이 사라진데다가 기자가 기사를 쓸 수 없는 것보다 더 큰 고초였다고 생각되는데요. 그 8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프레시안(최형락)
한승헌 : 제가 반공법 전문 변호사로 알려졌는데 반공법으로 구속되었으니까, 누가 수상 안전요원이 물에 빠져 죽는 거라고 표현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웃음) 그래서 실업자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하면, 처음에는 아는 분이 하는 법률 잡지에서 주간으로 나가서 얼마간 일했어요. 그 다음에는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집사람 이름으로 등록해서 출판 일을 했죠. 자본금도 없고 하니까 전화 응대하고 교정보는 여직원 한 명하고 나하고 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 나온 책부터 판금이 되어가지고… (웃음)

프레시안 : 어떤 책이었지요?

한승헌 : 김동길 교수님 책이었어요. '삼민사'란 이름도 그분의 작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 교수님 글이 아주 인기가 있었거든요. 다른 출판사들이 이 분의 원고 한 번 받으려고 목을 빼고 기를 쓸 때였는데 우리 출판사에 주었지요. 그렇게 해서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책이 나왔고, 2쇄, 3쇄를 찍으며 아주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사들이 서점에 나타나서 법적 근거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팔지 말라고 했던 거죠.

어쨌든 1983년 복권될 때까지 7,8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좋은 저자의 좋은 책을 상당히 많이 냈어요. 김동길 교수 외에도 함석헌 선생님, 김재준 목사님 등이 우리 출판사의 대표 저자였고, 그 밖의 기독교 쪽이나 재야의 학자들, 해직 교수들의 저서도 여러 권 냈지요. 좋은 저자의 좋은 책을 만드는 단계까지는 잘 했는데, 다만 그걸 돈으로 만드는 과정, 요새 말로 '마케팅'이 서툴러서 고전을 했습니다.(웃음)

프레시안 : 83년의 복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한승헌 : 83년이면 전두환 정권 때인데, 8.15 특사 형식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복역한 사람들 일부를 사면해 준 겁니다. 원래 독재정권은 잡아가는 것도 무단으로 잡아가지만 풀어주는 것도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들 마음대로잖아요. 어쨌든 그렇게 복권이 됐지요.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우리 교회 목사님이 "한 변호사가 복권되었으니 참 기쁜 일이다"라고 말했더니, 어떤 여자 분이 "어머, 얼마짜리 복권이래요?"라고 했답니다. (웃음)

더욱 교묘해진 사법계 외부 압력

프레시안 :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상임공동대표를 맡으셨지요.

한승헌 : 그렇습니다.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고 노태우가 정권을 이어받는 것으로 되어있을 때, 그런 세상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해서 범국민적인 반대 투쟁을 했던 것이 6월 항쟁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국본이 결성되었고 각계에서 공동대표가 한 명씩 나왔는데, 법조계에서 제가 나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때 변호사 70여 명이 국본에 참여한다는 성명을 내고 6월 10일과 26일, 두 번에 걸친 시민 대행진에 참가했습니다.

프레시안 : 87년 민주화 이후 법조계는 물론이고 언론의 독립성과 자율성도 상당히 회복되었는데요.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 그 독립성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채동욱 검찰총장 사건이나 유우성 간첩 증거 조작 사건, 허재호 황제 노역 건 등 근자에 법조계가 다시 권력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보수 정부 속에서의 법조계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승헌 : 사실 사법의 독립성이라 하는 것은 권력의 횡포나 압력이 있을 때 진정으로 '본때를 보이는 것'이어야 하는데,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법부를 보면 독재 권력 앞에서는 늘 흔들리고 민주 정권이 들어서 무간섭 상태로 둘 때는 그런대로 독립을 유지하는 기현상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명박 정부 이후 우리 사법부는 다시 그 옛날 독재정권 시절로 회귀하는 듯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어요. 예전의 군사 독재정권 시절과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집권자의 간섭이나 압력이 물리적이거나 노골적인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지능적인 방식으로 그 영향을 떨치고 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재판에 대한 간섭이 정보기관의 대명사격인 '남산'으로부터 담당 법관한테 바로 미치기도 하는 등 대놓고 요구하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그에 비해서 언론 조작 등 압력의 형태가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법원이 완전히 자기 신념에 의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지요. 검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외풍과 내풍을 모두 견뎌내야 진정한 독립

프레시안 : 2012년 MBC 파업 당시 전 MBC 앵커였던 신경민 의원이 공영방송의 독립성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공영방송의 독립성은 방송인 스스로 쟁취하고 지킨 것이라기보다는 정부가 허용한 만큼 누려 온 것이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상대적으로 정부가 자율성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에 방송이 독립성을 확보한 반면, 이명박 정부 이후는 통제 일변도로 나갔기 때문에 지금처럼 공영방송이 망가지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죠.

한승헌 : 사법부나 언론이나 그 점에서 공통되는데, 무풍이나 무간섭 상태에서 누리는 독립은 참다운 독립과는 무관한 현상이지요. 외풍이 있을 때 그것을 배제하고 법관이 자기 양심과 신념에 합당한 판결을 관철하는 것, 그게 진정한 독립입니다. 그래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법원이 외부 간섭 없이 재판했다고 해도 그건 '사법부 독립'이라 자랑할 만한 게 아닌 겁니다. 가령 절도사건에 대해서 정권의 간섭이 없었다고 해서 재판부의 독립이 지켜졌다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문제는 정치적 사건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외부 간섭을 배제하는 것은 사법부 독립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사법부의 독립을 흔드는 것은 외부의 간섭뿐 아니라 사법부 내부의 사법관료적 위계질서나 정치적 파장에 민감한 영합이나 눈치 같은 것들입니다. 즉, '내풍'이지요. 이런 내풍도 없어져야 온전한 독립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의 사법부 독립이 어느 시기에는 지켜졌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부연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법부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독립이 아니라, 사법부로부터 죄인이라 선고 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그 사람들의 싸움에 의해 얻어진 것이었거든요. 이건 사견이 아니라 지난날의 사법파동에서 나왔던 판사들의 성명에도 명시된 겁니다. 사법부가 나서서 국민의 자유를 지켜줘야 할 때에는 사법부 독립이란 얘기도 못 꺼냈다가, 유죄가 되었던 사람들의 힘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나니까 반사적으로 사법부가 독립을 얻게 됐다고요. 법원이 유죄로 몰아넣은 사람들의 싸움에 의해 법원 독립이 얻어졌다니 역설적이고도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언제든지 외적인 여건이 달라지면 다시금 사법부 독립이 흔들릴 염려가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채동욱 총장 사건의 경우, 사법부 전체에 있어 나쁜 전례가 되지 않을까요. 몇 년 전부터 이루어진 검찰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검찰이 나름대로 독립성을 발휘해 중차대한 수사를 맡았다가 모종의 힘에 의해 수사팀이 다 갈아엎어졌다는 느낌입니다.

한승헌 : 채동욱 총장 몰아내기는 현 정권으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악수(惡手)였다고 봅니다. 물론 찍어내기에 '성공'은 했으니까 소기의 목성을 달성한 것처럼 여길 수는 있는데, 착각이지요. 거기에 동원된 권력의 수법을 보면 정말 추리 소설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는 정도거든요. 반복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국가 폭력이 물리력을 바탕으로 '나이브하게' 작용했다면 지금의 수법은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진화했다고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뒤에서 온갖 수를 쓰는 거지요.

프레시안 : 한 사회가 올바르게 나아가기 위해 독립성을 갖춰야 할 집단으로 법조계는 물론 대학과 종교와 함께 언론이 꼽힙니다. 신영복 선생은 이들을 '신뢰 집단'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 신뢰 집단이어야 할 언론계가 채동욱 총장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헤친 <조선일보> 보도에 한국 신문상을 수여했습니다.

한승헌 : 난 그 기사를 보고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악의 실체는 그것이 선명할수록 좋은 거거든요. 색깔이나 형태가 애매하면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고 혼란을 겪을 텐데, 그렇게 딱 부러지게 드러났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앞서의 시상(施賞) 역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매사에 화내고 분개만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나 할게요. 새 국방장관이 될 뻔했던 이 아무개라는 내정자의 위장전입 사실이 드러나면서, 하룻밤사이에 그걸 백지화시키고 전 정권의 국방장관이 유임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 뉴스를 보고, 다른 장관은 몰라도 국방장관은 위장전입을 성공시킨 실적이 있어야 작전에도 성공할 것 아니냐고 그랬어요. (웃음) 내 이야기의 핵심은 여러 가지 마땅치 않은 일에 매사 혈압만 올릴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오히려 역설적이라면 역설적인 의미들을 찾아내자는 거지요. 나아가 악의 현상 속에서 선의 싹을 찾는다고 할까요, 그런 여유도 좀 있어야 합니다.

▲ 3월 26일자 <조선일보>8면


법치주의의 본질에서 다시 시작하자

프레시안 : 법치의 본질은 일반 국민의 준법이 아니라 "권력자의 준법"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의 법치,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한승헌 지음, 범우사 펴냄). ⓒ범우사
한승헌 : 원래 법치라는 것이 '권력자의 자의나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닌 법의 '룰'에 의한 지배'라는 뜻이니까, 법치주의 역시 일차적으로 권력자의 지배 근거와 방식을 법으로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전혀 없거나 약한 시대일수록 오히려 '국민들의 준법‘만 강조되어 왔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법치주의는 지배자의 국민을 향한 하향적인 지배 수단이 아니라, 지배자에 대한 상향적인 견제를 통하여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만약 지금 대통령이 말하는 대로 '국민들이 법과 원칙을 잘 지키는 사회'가 법치주의라면, 히틀러 시대나 유신 시대야말로 법치주의가 가장 잘 관철된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불성설이지요.

이건 한승헌 개인 학설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법치주의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법조인 또는 법학자들 중에서도 법치주의가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생겨난 거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의 서문에 "법치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쓴 것도 그래서였지요.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 정치인입니다. 정치는 타협이 본령인데 법조인은 법적 논리를 중시하다 보니 정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호사 출신의 정계 진출이 두드러지는데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한승헌 : 언필칭 법치국가에서 법률 전문가가 법조계 안에서만 맴돌지 않고 정계를 포함해 법조계 울타리 너머 여러 분야로 뻗어나가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조인이 정계로 진출했을 때 법조인답게 나라의 모든 규범을 존중하고 올바른 법치 민주주의 국가답게 정치풍토를 바로잡았느냐 아니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법조인이 정계로 나가서 법의 논리에만 얽매여 있다면, 여기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법의 논리라도 제대로 존중해주었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실제로는 법의 규정이고 논리고 공약이고 다 팽개치고, 특히 여당의 경우에는 오로지 집권자만 쳐다보는 해바라기 내지 도구적인 존재로 전락해 있어요. 집권자의 의도가 법 이상의 법이 되어 있다고 할까요? 참 개탄스럽고 비참한 일입니다.

프레시안 : 결국 다시 법치주의의 본질적 정의로 되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법치주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거고요.

한승헌 : 국회의원 중 법조인 출신 비율이 상당히 높은데 왜 국회는 법을 안 지키고 난맥상을 드러내며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법조인이란 자신의 정계 진출, 권력과 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스펙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줍니다. 그러니 법조인의 신분에 따르는 책무나 헌신을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한 가지 더, 집권자가 법률가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은 올바른 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어떤 틀에 순응을 잘 하는 그들의 기질을 원해서가 아닌가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의 청문회를 거치는 자리라면 이들이 다른 분야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준 통과의 어려움이 덜하기도 하고요. 그런 이유에서 법조인을 중용들 하는데, 대단히 걱정스럽죠.

ⓒ프레시안(최형락)

로스쿨, 앞으로도 갈 길 멀어

프레시안 :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에 참여하셨고, 이후 사형제 폐지 등 인권 이슈에 있어서 앞장서 활동하셨습니다. 최근 한국의 인권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또 엠네스티가 한국 인권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한승헌 : 1972년 봄 한국 엠네스티가 출범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한 게 시작이었지요. 1979년, 그러니까 내가 실업자 시절이었을 때는 활동을 꽤 열심히 했어요. 아시다시피 엠네스티는 양심수나 정치범 구제, 사형이나 고문의 폐지, 공정한 재판과 수감자 처우 개선 등 인권의 중요한 거의 모든 분야를 관심사로 삼아 왔는데요. 엠네스티의 활동 목표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이건 대한민국에 맞춤으로 나온 목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목표들이 당시 우리의 급박한 인권상황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어서 초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엠네스티가 세계 여러 나라의 인권 문제를 감시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해 온 가운데, 한국의 중요한 문제 상황들을 빠트리지 않고 주시해 왔습니다. 특히 최근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 문제가 바로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젭니다. 국가보안법을 남용해서 표현의 자유를 억제시킨다는 거지요. 또한 노사분쟁에 있어서 정부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문제도 주요하게 지적되고 있습니다.

국제엠네스티가 한국 정부에 이런 문제들을 시정하라고 권고하는 활동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고 실제의 파급력도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성과였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언론 자유 순위를 보면 아프리카의 저개발 나라들보다도 뒤처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경제 문제든 인권 문제든 국경 안에 가두어 둘 수 있는 문제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나라의 국격을 생각해서라도, 엠네스티에서 구체적인 사례로 지적받는 문제는 시정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 당시 만들어졌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 위원장도 맡으셨습니다. 개혁 내용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승헌 : 사법개혁이라는 것은 개혁 주체와 개혁 내용을 준수해야 할 대상이 동일한 어려운 과제입니다. 예를 들어 공판중심주의는 법원이 개혁을 하고 동시에 그 적용을 받아야 합니다. 일종의 자기 개혁이죠. 결국 부담을 끌어안아야 하는 기관더러 개혁안에 찬성하라고 하니까 잘 안 됐던 겁니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 들어서 노무현 정부의 웬만한 정책과 성과는 많이 뒤집어졌는데, 그래도 사법개혁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된 개혁이었기 때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프레시안 : 그 주요한 내용 중 공판중심주의, 국민 참여 재판과 함께 로스쿨에 의한 법조인 양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로스쿨 학비가 과도하게 비싸다는 불평과 함께 사법시험제도가 폐지되면서 앞으로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워졌다는 불만도 있습니다만.

한승헌 :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는 걱정은 로스쿨 제도를 검토하던 당시에도 나왔습니다. 로스쿨 제도의 취지란 한마디로 몇 과목의 답안지 몇 장에 의한 한판 승부보다는 오랜 교육을 통해 법조인을 양성하자는 것이었는데요. 그 교육기간에 들어가는 학비 부담 얘기가 당연히 나올 만 합니다.

'개천'에서 난 사람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메우기 위해, 입안하는 입장에서 내놓았던 것이 장학금 제도였지요. 즉 모든 로스쿨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그 장학금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나를 인가 요건에 반영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학금 제도를 통해 웬만큼 성적이 좋은데 형편이 어려운 법조인 지망생에게도 면학의 기회가 상당 부분 보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현재 로스쿨 제도의 방향이 당초의 입안 취지에 맞게 잘 가고 있다고 보십니까?

한승헌 : 현실적인 문제점이 없지는 않겠지요. 특히 앞으로 로스쿨 합격자가 많이 쏟아져 나올 텐데, 그만큼 경쟁자가 많다는 얘기라서 한마디로 먹고 살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겠지요. 법조인구 과잉에서 오는 그들 각자의 생활여건상의 어려움과 여러 가지 난점은 우리 법조계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어려운 숙제라고 봅니다. 교육 내용에 있어서는 변호사 시험 과목에 너무 편중된 나머지 다른 과목의 공부가 소홀하지 않나 싶어 걱정입니다. '법조인구의 과잉'이라는 문제의 경우, 법조인들이 활동 분야의 시야를 넓혀서 법정을 드나드는 일만이 아니라 언론이나 기업, 시민단체나 공공기관 등으로 진출하는 것도 한 가지 타개책이라고 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힘이 있어야 남도 돕는다

프레시안 : 젊은 시절 시 창작 활동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유머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내셨는데요. 유머는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이며, 법조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한승헌 : 그냥 기쁘고 좋아서 웃는 것이 유머나 해학은 아닙니다.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과 반전을 통해 웃음을 터트리게끔 하는 것이 유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내가 살아온 삶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난 지금까지 양지에서 살아왔다기보다 그 반대편에서 살아왔어요. 그리고 유머는 삶의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자라나는 언어 현상입니다. 가난으로 고생할 때, 징역살이로 고생할 때, 혹은 외로울 때 오히려 유머가 많이 나옵니다.

▲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기행>(범우사 펴냄). ⓒ범우사
유머는 답답하고 속상한 일 많은 세상에서 잠시라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고, 서로 간에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데 좋은 명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유머가 특히 생동감 있고 독창적이라서 좋지요. 또한 유머는 원가가 별로 안 드는데다 세금도 안 붙습니다. (웃음) 얼마나 좋은가요?

왜 우리는 사석에선 이런저런 재담을 나누면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다른 이들과 공감을 나누고 일체감을 높일 수 있는 유머 활용에 무심할까요? 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그의 배우자들까지도 재담이 유려하고, 유머의 스피치 라이터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그건 그만큼 서로 간의 교감에 유머가 유효하기 때문이지요.

우리한테도 그런 풍토가 좀 조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의 언어 습성이 일반인들의 언어생활과 사고, 인생관에 미치는 영향이 참 큰데, 우리 정치인들의 말솜씨는 막말 중심이고 유머나 해학은 구경도 못해 본 사람들 같아요. 그런 막말 대신 분위기 있는 유머를 활용한다면 정치 그 자체의 품격이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프레시안 : 앞서도 말씀하셨지만 요즘 변호사의 숫자가 많아져서인지 변호사의 위상이 옛날 같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또 취업의 문턱이 어려운 현실도 있지요. 생업을 위해서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든 변호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한승헌 : 각자의 진로랄까 사적인 목적도 참 중요하죠. 장래의 신분 상승이나 수입을 염두에 두고 법조인을 지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탓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생업을 얻기 위해 고시에 뛰어든 사람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멸사봉공의 뜻이나 정의감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본인의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열망을 갖고 입신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엔 개인 차원을 넘어서 이 사회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머리에 먹물 든 사람, 사회적 지위를 갖거나 입신한 사람이 다해야 할 사회적 책무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변호사는 인권과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냥 예쁜 리본 같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힘과 권능,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법조인이라는 업의 큰 장점입니다. 그 자원과 성과를 혼자서만 누려서는 안 되겠지요. 세상은 그래도 남을 위해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만큼이라도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 스스로 힘을 갖춰야만 사랑도 인정도 남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의 직업이니까, 입신에서 화살표를 친 다음, 헌신으로 나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너무 과한 주문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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