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 논란이 국정 교과서 논란으로 옮겨붙었다. 교육부가 나서 편수(편집·수정) 조직 강화를 시사했다. 새누리당은 한발 더 나아가 '국정 교과서 환원'을 직접 거론했다. 전국에서 단 한 곳만 교학사 교과서를 택하면서 사실상 식물 교과서가 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국정 교과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상황.
교과서의 자율성은 국정제(집필진 선정, 내용 감수 등을 모두 정부가 결정)-검인정제(민간 출판사가 집필진을 섭외해 교과서 제작 후 정부가 심사)-자유발행제(국가나 정부의 개입 없이 민간 출판사가 출판) 순으로 높아진다. 한국에서 국정 교과서는 유신 정권하에서 등장했으며 현재 북한, 러시아 등이 국정 교과서를 발행한다.
이에 11일 오후 2시 흥사단교육운동본부 등 7개 역사·교육 단체가 서울 종로구 흥사단 강당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이들은 교학사 교과서 사태를 짚어보고 국정 교과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국정 교과서, 교육이 아니라 정치프로젝트"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교학사 교과서를 저지하는 싸움에서는 시민사회가 성과를 거뒀다"며 "그러나 이번 사태로, 한국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고 말했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도 문제가 많지만 나머지 교과서도 좌파 교과서'라는 식의 생각이 퍼졌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통일된 교과서를 내놓아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버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교육부가 점점 교과서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건 교육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치 프로젝트"라고 우려했다.
이번 사태가 끝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는 "수백 건씩 수정하면서 발행한 이유가 뭘까. 이런 사태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반복될 것이라는 의미"라며 "연도나 명칭 등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교학사 교과서를 만든 쪽도 이번 사태를 통해 잘 배웠을 테니, 이제 아주 세련된 우익 사관의 교과서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부 간섭, 유신체제의 연장선"
편수 체제를 강화하면, 검인정 교과서의 모양을 갖췄더라도 국정 교과서나 마찬가지라는 지적도 나왔다.
양정현 부산대 교수(한국역사교육학회장)는 "교학사 교과서 사태는, 교과서에서 정치적 중립이 지켜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교과서에 대한 정부의 결정권이 한국만큼 강력한 나라도 거의 없다"며 "교과서 제도에 관한 한, 군국주의와 유신체제의 연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교육부 산하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며 "그러므로 편수 체제 강화는 국정제와 비슷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직 교사들은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소모적인 정치 논쟁을 접고 좋은 교과서 만들기에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부천여고 교사)은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의 채택률이 50%에 달했던 건, 교사들이 좌파라서가 아니다"라며 "기존의 국정 교과서가 보여주지 못했던 편집 방식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률이 사실상 0%인 것은, 외압 때문이 아니라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그런 교과서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신성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실 정책위원(고대부고 교사)는 "검정제의 내실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교과서 논란을 해결할 수 없다"며 "결국 자유발행제로 전격 이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 자치가 침해받고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소장)는 "교육 자치가 무르익어 가던 중에 다시 역행해 중앙집권화하는 것 같다"며 "교과서만 봐도, 교사가 결정권을 갖는 것이 선진국과 교육 민주화의 방향인데 한국만 다시 퇴행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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