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 학살,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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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학살 책임과 관련해 미국을 지목하는 의견이 적잖다. 미국에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미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서중석 : 학살을 지시하는 위치에 있었던 군경 책임자 문제에 대해 앞에서 부분적으로 얘기했는데, 그런 참혹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데는 더 커다란 배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한다. (여러 사람이) 그런 지적을 많이 하고 있고 거기서 미국이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얘기도 빠지지 않고 한다.

프레시안 : 미군에 의한 학살은 주로 한국전쟁 초기에 이뤄졌다. 노근리(충북 영동), 왜관교(경북 칠곡)에서 벌어진 학살 사실이 드러난 것은 물론 전북 익산, 충북 단양, 경북 예천·구미, 경남 의령·함안·마산·사천·창녕 등에서 미군의 폭격 등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서중석 : 미군에 의한 학살 중 규모가 큰 건 피란민을 상대로 발생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민들이 뿌리내리고 사는 한 마을에서가 아니라 피란 도중 폭격으로 학살이 일어난 경우에는 그 피해를 증언하기가 더 어렵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침묵을 강요당한 '노근리들'

프레시안 : 미군에 의한 그러한 참극 중 대표적인 것이 노근리 학살이다. 노근리 학살은 1999년 에이피 통신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서중석 : 그 보도는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99년 하반기에 에이피 통신 보도로 노근리 학살이 널리 알려지고 곧이어 이도영 씨가 골령골 학살(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자료를 찾아냈다.

그걸 계기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에이피 통신이 노근리 학살을 보도하자, 그간 학살 진상을 은폐하는 데 일조해온 보수 언론조차 '진실은 만천하에 밝혀져야 한다'는 식으로 쓸 정도였다. '이것도 일종의 사대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그러면서 이듬해 1월, 4.3특별법이 만들어진 거다. (노근리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유족들은 1960년 4월혁명 후 미군 측에 소청을 제기하지만 기각된다. 잊혀가던 이 사건은 1994년 다시 세상에 알려진다. 노근리 학살을 증언한 책이 출간되고 <말>과 <한겨레>에서 유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기까지는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99년 에이피 통신 보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자, 대다수 한국 언론도 이 사건을 크게 다뤘다. 한국 언론이 피해자 증언을 무시하다가 외국의 유력 언론이 다룬 후에야 따라간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았다. <편집자>)

노근리 사건에 대한 에이피 통신 보도 중 눈길을 끈 게 있었다. 노근리 사건에서 총을 쏜 병사들 중 일부가 그 참혹한 행위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일을 내가 어떻게 저지를 수 있었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나' 하는 것을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보고 상당히 감격했다.

프레시안 : 무엇 때문인가.

서중석 : 왜냐하면 보도연맹원 학살이나 4.3사건 학살에 관여한 한국의 군경 가운데에는 그렇게 '학살 때문에 양심에 크게 가책을 느껴 정신 질환을 심각하게 앓았다. 지금도 정신이 평안치 않다'고 얘기한 사람을 거의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주 드물게 있긴 하다. (그런데 미군 중에서) 노근리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중엔 그런 사람이 여러 명 나오더라.

이 내용이 보도됐을 때 마침 충남대에서 학살을 중심으로 현대사에 대한 강연을 할 일이 있었다. 그때 '그래도 미군 병사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 사이의 근대의 문화라고 할까 하는 것들이 영향을 끼친 것 아니겠느냐. (학살에 가담한) 일본 혹은 한국 사람 중에서 과연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고 정신 질환을 앓은 경우가 얼마나 될까. 참 걱정이다'라고 했다. (청중은 이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했지만, 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일부) 미군 병사는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정신 질환을 앓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결국 에이피 통신을 타고 진실 보도로 나타날 수 있었다고 본다.

프레시안 : 명령을 내린 장교 중에도 그런 사례가 있나.

서중석 : 그렇지 않다. 다른 대부분의 병사, 그리고 그 지휘관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교들도 그랬느냐 할 때,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노근리 사건과 직접 관련돼 있는 미군 제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의 명령서에는 '전투 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고 돼 있다. 발포를 지시한 거다. 이게 병사들로 하여금 있을 수 없는 행위를 하게 한 것이고, 그래서 그런 정신 질환을 앓게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군 장교들 가운데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정신 질환을 앓았다든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든가 하는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에이피 통신 보도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들은 여전히 변명하는 위치에 서 있더라.

▲ 노근리 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의 한 장면. ⓒ노근리 프로덕션

작전권, 고문관, 친일파 비호와 미국의 학살 책임

프레시안 : 미군이 직접 죽인 사례 외에도 학살 책임과 관련해 짚을 대목이 더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작전권이 미군한테 있었다. 우리 정부가 수립됐는데도, 미군이 작전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사실 주한 미군 손에 작전권이 없었던 건 1949년 6월 (한국에서) 철수해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작전권을 다시 인수해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역할을 할 때까지, 그 사이뿐이다. 1년하고 한 달만 미군에 작전권이 없었던 거고, 4.3사건 학살 대부분이 일어난 시기인 1948년 11월에서 1949년 3월엔 미국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고문관이 배치돼 있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맨 처음 여순으로 한국군 장교를 이끌고 온 사람이 하우스만 대위다. 한국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사람이다. 하우스만 대화록을 보면, 자신들이 주도해 (진압) 작전을 펼쳤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프레시안 : 미군은 한국 군경 등에 의한 학살에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미군이 그런 학살을 막으려고 했다', 이런 게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를 않는다. 사실 4.3사건 때 한 지역에서 끔찍한 대규모 주민 집단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던 제일 큰 이유는 제주가 고립무원의 섬이라는 것이다. 외부에서 (제주도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와 달리)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땐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세계 뉴스를 탔다. 제일 크게 세계 뉴스를 탄 건, 국군이 초기에 진입하다가 패배하면서 '한국 정부 위태롭다'는 식으로 보도된 것이었다. 여긴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외신 기자들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내 언론 보도뿐만 아니라 세계 뉴스로도 나갔다.

그런데 제주도 쪽은 (제대로 된) 보도를 초기에 차단했다.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외부에서 알 수 없게 한 거다. 학살에 관한 보도를 막은 거다. 1948년 10월, 11월에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 난 이것에 의도가 있다고 본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고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이 숨죽이고 살아야 했는데도 바깥엔 거의 안 알려졌다. 육지 사람들은 (4.3사건의 실상을) 오랫동안 잘 몰랐다. 바로 그 4.3 때 해상을 딱 차단한 게 어느 나라 군대냐. 그런 걸 볼 때 미군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거창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11사단은 거창뿐만 아니라 함평, 산청, 남원 등 여러 지역에서 큰 규모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연대별로 미군 고문이 파견돼 있었다. 이 사람들이 학살을 몰랐겠나. 이건 방조한 것 아니냐, 한국군이 (학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한 것 아닌가, 이렇게도 얘기할 수가 있는 거다.

프레시안 :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친일 경찰 등을 비호하고 우익 단체를 지원한 것도 생각해볼 대목이다. 친일 경찰, 우익 단체 등이 학살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다. 다른 문제를 더 짚어봤으면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영국군이 한국 측의 이른바 '부역자' 총살형을 문제 삼은 사례도 있다.

서중석 : 9.28 수복 후에 '부역자' 총살을 많이 한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사진으로 봐선 수색 정도의 서울 북부로 보인다. 영국 군대가 그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저런 식으로 하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며 (처형을) 제지하고 미국 쪽에 항의 비슷하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면 미국은 다른 데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어야 하는데, 그런 뚜렷한 자료가 나오지를 않는다. 납득이 잘 안 되는 일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고맙기만 한 미국? 외면해선 안 되는 학살의 진실

프레시안 : 사진 이야기를 하니,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이 떠오른다. 그 학살 사진은 미국 측에서 찍은 것이었다.

서중석 : 전쟁이 난 직후인 (1950년) 7월 초순, 1800명에 이르는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골령골(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집단 학살했다. 그 장면을 담은 사진과 기록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다 발견됐다. 미국 극동군 사령부 소속이던 에버트 소령이 주한 미국 대사관 육군 무관으로 있던 에드워드 중령의 라이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여기서도 그것(한국 측의 학살)이 잘못된 것처럼 기록이 남아 있는데, 미군이 제지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훗날) 베트남에서 (미군에 의한) 미라이 학살 같은 게 일어나는데, 여러 자료를 볼 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주한 미군이 져야 할 책임이 많으며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그 책임을 어느 선까지 물을 수 있나. 주한 미군까지인가, 아니면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 혹은 미국 정계의 최고위층까지인가.

서중석 : 그건 잘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자료의 한계이기도 한데, 그런 부분을 (명확히) 밝히고 분석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래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참 힘들지만,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한 미국 대사관이나 극동군 사령부, 유엔군 사령부에서 몰랐겠나. 알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면 그 침묵이 뭘 의미하는 것이겠나. 방조 말고 다른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미국의 학살 책임 문제가 거론되면, '한국전쟁 때 북한을 막아내고 우리를 구해준 고마운 미국에 대한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라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중석 : 인간의 양심과 양식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그렇게 큰 학살을 미국이 방조했다는 건 미국 스스로 내세우는 민주주의, 자유, 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 미라이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자,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분노하지 않았나. 그런 미라이 학살의 수백 배 규모의 학살이 한국에서 벌어졌고 미국이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것에 분노하고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거다. 이건 한국전쟁 때 미국이 북한을 막은 것과는 구분해서 봐야 하는 문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열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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