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왜 '그리스학'을 꼭 배워야 하는가?

[프레시안 books]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

'큰 책은 큰 해악이다(μέγα βιβλίον, μέγα κακόν)'라는 그리스 속담이 있다.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관장을 맡았던 칼리마코스(기원전 310/305~240년)가 남긴 말이다.

세 권으로 이루어진 앙드레 보나르(1888~1959년)의 <그리스인 이야기>(김희균·양영란 옮김, 책과함께 펴냄)는 1400쪽이 훌쩍 넘는 상당히 '큰 책'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책만큼은 칼리마코스의 비난에서 빼 주어도 될 것 같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시작된 기원전 2000년쯤부터 완전히 몰락한 기원후 2세기까지, 2000여 년 동안 계속된 그리스 문명의 역사를 세세하게 다루다 보니 이 정도로 큰 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방대한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며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대가의 솜씨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이 정도의 분량이 적당했었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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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 이야기>(전 3권,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양영란 지음, 책과함께 펴냄). ⓒ책과함께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역사 이야기를 인물 중심으로 엮었다는 데 있다. 저자는 그리스 문명의 각 시대를 그리스 문명의 여명기에 활동했던 서사시의 대가 호메로스로부터 시작하여 헬레니즘 시기의 마지막 시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헤론다스까지 그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30여 명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우리에게 그리스 문명은 무엇인가? 지난 한 세기 이상, 우리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알게 모르게 그리스 문명이 남긴 위대한 인류 유산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왔다.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고, 지금까지도 자유와 평등, 정의는 우리 사회의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또 야구와 축구, 농구와 같은 스포츠를 즐기며 하루라도 경기가 없는 날이면 공연히 안절부절못하는 금단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연속극과 영화를 보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또 소설과 시를 읽기도 한다. 그리스인들의 올림픽 제전을 통해 스포츠를 만들어 놓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비극과 희극을 비롯한 연극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또 자유도 모르고 평등과 정의라는 개념도 없는 사회에 산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고되고 무의미할 것인가? 그런 삶은 상상도 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기원이 바로 그리스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인들은 인류의 선생이란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 문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직접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스 문명의 위대한 사상과 정신적 가치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서유럽과 일본이라는 머나 먼 길을 돌아 우리에게 도달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이런 사상과 개념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들은 피상적이고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조선보다는 그리스의 후예다. 다산 정약용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보다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 문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너무도 적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학'이란 이제는 한국인들에게 교양 필수로 가르쳐야 하는 과목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학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는 이런 입문서로서 이상적인 책이다. 물론 영국의 그리스 학자 키토의 책이 몇 년 전에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박재욱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지만 내용이 훨씬 간단해서 보다 깊은 지식을 갖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런 아쉬움을 느낀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귀한 대접을 받을 만하다.

이 책은 한 평생 그리스 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은퇴한 뒤에 심혈을 기울여 쓴 노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장이 아니고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심오함과 평이함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쉽게 읽히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깊은 전공 지식을 설명하면서도 문장이 난삽하지 않고 명쾌하다. 분량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 많지만 이 정도의 넓이와 깊이를 얻으려면 그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 백과사전적 지식을 다루고 있기에 한번 읽고 서가에 꽂아 둘 책은 아니다. 인문학자라면, 아니 교양인이라면 책상머리 한 구석에 놓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책장을 뒤적여야 할 책이다. 한 마디로 참으로 좋은 책이다.

번역자들의 문장도 좋은 편이다. 다만 제1권과 제2, 3권의 번역자가 달라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아쉽다. 또 그리스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가끔 초점이 안 맞는 부분들의 눈에 띈다. 드물기는 하지만 오타와 오자도 적잖이 책의 위신을 깎아 내린다. 이 정도의 역작을 번역하여 소개할 때에는 좀 더 철저한 교정 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스어의 음역에서 υ을 'ㅟ'로 표기한 것이 눈에 거슬린다. 국립국어원이 공표한 그리스어의 외래어 표기법을 따라 'ㅣ'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저자가 모든 독재와 독선, 폭력과 압제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항상 앞장서서 저항과 투쟁을 한 지식인임이 책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노예 제도에 대한 비판은 책의 여러 군데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민주주의의 몰락, 아니 그리스 문명 전체의 몰락이 바로 이런 빈부 격차에 따른 소외 계층의 양산에서 비롯되었음을 실감나게 보여 준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싼 임금에 의존하면서 빈부 격차를 벌여 나가는 현실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든다. 그런 문명은 망하게 마련이다. 한 문명의 쇠퇴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그리스학에 평생을 바친 대가답게 자신의 학문을 행동으로까지 옮긴 그의 정신이 이 수상한 시절에 새삼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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