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景福宮)의 숨은 이야기"

[알림] 서울학교 8월 답사 참가 안내

"서울의 뿌리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울학교>로 오세요."
지난 4월 개교한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 해설가)가 8월, 제5강을 준비합니다. 주제는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 둘러보기>입니다.

서울학교 제5강은 8월 19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30분 당겨졌습니다), 서울 경복궁 정문 광화문 앞에서 모입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북궐(北闕) 경복궁(景福宮) : 광화문→흥례문→금천→기별청→조정→근정전→사정전→강녕전→흠경각→함원전→교태전→자경전→동궁→건춘문→함화당→집경당→건청궁→열상진원→향원정→집옥재→태원전→경회루→수정전→궐내각사 터→영추문
점심식사(옛날민속집-생선구이와 찌개요리) 후 : 궁정동→육상궁→신무문→종친부 터→감고당길→인사동거리→탑골공원


☞경복궁 바로 보기

▲ 건청궁과 향원정Ⓒ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 둘러보기>에 대해 들어봅니다.

경복궁의 발자취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에 고려 남경(南京)의 이궁(離宮) 터에 왕도(王都)를 정하고 같은 해 10월에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를 하였습니다. 이 때 창건한 조선의 정궁(正宮)이 경복궁(景福宮)입니다.

고려 숙종 때 지은 남경 이궁인 연흥전(延興殿) 터는 고려 때부터 명당(明堂)으로 지목되어 오던 곳으로 북으로 주산(主山)인 북악(北岳)이 서쪽으로 좌청룡(左靑龍) 인왕산(仁王山)이, 동쪽으로 우백호(右白虎) 낙산(駱山)이, 남쪽으로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이 둘러싸고 있는 좋은 지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터가 협소하여 이궁으로서는 적당했으나 새로운 나라의 정궁(正宮)의 터로서는 너무 협애하여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었습니다.

궁궐이 완성된 뒤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궁궐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詩經)>의 한귀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만년에 큰 경복일레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경복'을 따서 경복궁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한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定宗)이 한양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경복궁은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개경에서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讓位) 받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다시 6년 8개월 만에 재천도(再遷都)를 단행하여 비로소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정궁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태종은 창덕궁(昌德宮)을 건립하여 주로 그곳에서 거처하다가 태종11년이 되어서야 경복궁으로 옮겼는데 이는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이복동생들인 방석(芳碩), 방번(芳蕃)과 정치적 동지였던 정도전(鄭道傳) 등의 개국공신들을 살육한 현장이 경복궁이었기 때문인 조금은 기피하고 싶은 심정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 됩니다.

세종(世宗) 대에 들어와서 궁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건립함으로써 남문 광화문(光化門), 동문 건춘문(建春文), 서문 영추문(迎秋門)의 4문(四門) 체제를 완성하고 각 문과 다리의 이름도 이때 지었는데 이로써 경복궁이 390여 칸의 명실상부한 조선 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은 완성된 후에 크고 작은 화재가 빈번이 발생하였으나 많은 개축과 증축으로 그 규모가 오히려 차츰 커져 갔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되면서 폐허가 된 채로 방치되어 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몽진(蒙塵)에서 돌아온 선조는 갈 곳이 없어 지금의 경운궁(慶運宮)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를 행궁(行宮)으로 삼아 정사를 살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뿐만 아니라 창덕궁과 창경궁까지도 모두 불타버렸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하자 바로 창덕궁을 중건하여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봤으므로 경복궁은 폐허가 된 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여 고종이 이어(移御)하기 전까지 273년간 방치되며 창덕궁에게 조선의 정궁의 역할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자존심만이라도 살리고자 1865년(고종2년)에 대원군(大院君)의 강력한 의지와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 조대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경복궁 중건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 근정전 Ⓒ서울학교

그런데 문제는 재정의 조달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각계각층으로부터 원납전(願納錢)이라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았고 사대문을 통과하는 우마차(牛馬車)에 통행세(門稅)를 부과하기도 하고 결두전(結頭錢)을 신설하여 혼인한 모든 백성에게 인두세(人頭稅)를 징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화폐 가치보다 백배나 되는 당백전(當百錢)을 찍어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화폐의 유통질서를 문란케 하여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백성들의 참혹한 고통을 대가로 마침내 1867년(고종 4년) 11월에 경복궁의 복원은 완료되는데 그 총규모는 7,481칸이고 공사 비용은 모두 770만 냥이 들었다고 합니다.

궁궐 안의 궁궐이라는 건청궁(乾淸宮)도 이때 새로 지어졌으며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경복궁의 모습도 이때 중건된 것입니다. 그러나 건청궁에 거처하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 낭인들에게 비참하게 시해(弑害)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자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한지 28년 만인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俄館播遷)하면서 경복궁은 다시 주인을 잃어버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반포하고 주로 경운궁에 거처하였고 순종은 즉위 후 주로 창덕궁에 거처함으로써 1911년 일제는 주인 없는 경복궁의 부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탈취하고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헐어서 팔아버렸는데 이때 무려 4,000여 칸이 훼멸되었답니다.

경복궁 훼절의 결정판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흥례문(興禮門)과 좌우 행각, 유화문(維和門), 용성문(用成門), 영제교(永濟橋)를 철거하고 그곳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를 지은 것으로, 이때 광화문의 좌향도 기존의 관악산을 향하던 것을 조선신사가 들어선 목멱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동쪽으로 약간 틀어놓았습니다. 2001년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리고 흥례문 일원이 복원되고 광화문도 본래의 좌향(坐向)으로 바로 앉혀짐으로써 부족하나마 비로소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법궁으로서의 경복궁에 대한 이해

조선 건국 초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함께 축성하여 이 두 궁궐이 시기별로 정궁의 역할을 달리 하였지만 법궁(法宮)으로서 위치는 여전히 경복궁의 몫이었기에 그 축성에 있어서 당연히 중국의 전범(典範)에 따라 많은 부분을 그 원칙에 맞게 궁궐을 지었습니다.

첫째는 대칭의 원칙입니다.
광화문(光化門)-흥례문(興禮門)-근정문(勤政門)-근정전(勤政殿)-사정문(思政門)-사정전(思政殿)-향오문(嚮五門)-강령전(康寧殿)-양의문(兩儀門)-교태전(交泰殿)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은 세자의 영역인 동궁(東宮)과 종친(宗親)들의 영역이고 오른쪽인 서쪽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영역인 경회루, 집현전 그리고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았습니다.

둘째는 삼문삼조(三門三朝)의 원칙이다.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를 이름입니다. 외조는 신하들이 집무하는 공간으로 흥례문에서 근정문까지, 치조는 정전과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편전(便殿)을 포함한 공간으로 근정문에서 향오문(嚮五門)까지, 연조는 임금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침전과 생활공간으로 향오문 뒤의 임금의 침소인 강령전(康寧殿)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 그리고 대비의 생활공간인 자경전(慈慶殿) 일원입니다. 따라서 고문은 외조의 정문으로 흥례문이고 치문은 치조의 정문으로 근정문이고 노문은 연조의 정문으로 향오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외조의 정문인 흥례문 사이의 공간은 무엇일까요? 이곳은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군사가 머무르는 곳입니다.

궁궐(宮闕)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가 살고 있는 궁(宮)과 궁을 지키는 궐(闕)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궁은 외조와 치조와 연조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고 궐은 경복궁의 사대문과 궁을 둘러친 담장(宮城)과 망루(望樓)로서의 동십자각(東十字閣)과 西十字閣(서십자각), 그리고 수비 군사들이 기거하는 광화문에서 흥례문 사이의 공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도의 길 중에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 있는데 이곳을 특히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고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이,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길인 폐도는 임금만 다닐 수 있어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고 불렀습니다.

▲ 경회루 Ⓒ서울학교

삼도와 마찬가지로 대문(大門)도 동쪽의 문에는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문신(文臣)들이 드나들고 서쪽의 문에는 달을 뜻하는 월(月)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드는데 근정문 동쪽의 일화문(日華門),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을 말함입니다.

또한 중심축의 건물들 좌우로 배치된 부속건물들도 동쪽에 있는 건물과 대문들은 봄 춘(春)자가 들어 있고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과 대문에는 가을 추(秋)자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는 천추전(千秋殿)이, 경복궁의 동쪽 문을 건춘문(建春文)이라 하고 서쪽 문을 영추문(迎秋門)이라 합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궁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돌아서서 바라보면 세종로와 태평로가 숭례문까지 시원스럽게 뚫려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조선일보사 앞에 황토현이라는 언덕이 있어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에 가기 위해서는 세종로를 지나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종루까지 가서 다시 남쪽으로 남대문로를 따라 숭례문에 이릅니다.

세종로 길을 조선시대에는 주작대로(朱雀大路) 또는 육조(六曹)거리라고 불렀습니다. 궁궐의 좌향(坐向)이 남향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 궁궐 앞 도로는 오행(五行)에 따라서 남쪽은 주작(朱雀)이니 주작대로라 하고 또한 그곳에 조선시대의 관청인 육조(六曹)가 자리 잡고 있어 육조거리라고도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은 건국 후 도읍을 형성할 때 중국의 방식에 따라서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을 적용하였고 임금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를 해야함으로 궁궐은 당연히 남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궁궐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궁궐의 왼쪽(東)에 종묘(宗廟)를, 오른쪽(西)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궁궐의 앞쪽(南)에는 관청(官廳)을 배치하고 뒤쪽(北)에는 시장(市場)을 배치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이 원칙에 따랐으나 시장은 궁궐 뒤가 그 터가 너무 협소하여 지금의 종로거리 즉 운종가(雲從街)로 옮겨 육의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전조후시가 아니라 전조전시(前朝前市)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주작대로는 제후7궤(諸侯七軌)의 원칙에 따라 제후국가에서는 칠궤, 즉 마차 일곱 대의 넓이를 넘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육조거리에는 경복궁의 정문(正門)인 광화문 앞 왼쪽, 즉 동쪽으로는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한성부(漢城府), 호조(戶曹), 기로소(耆老所), 포도청(捕盜廳)이 차례로 자리 잡았고 광화문의 오른쪽, 즉 서쪽으로는 예조(禮曹), 사헌부(司憲府),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이 차례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들 육조거리의 관아(官衙)들을 통칭하여 궐외각사(闕外各司)라고도 불렀습니다.

돌아서서 광화문으로 들어서려고 하니 커다란 해태 두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속설(俗說)에 의하면 관악산이 화산(火山)이어서 그 화기(火氣)가 경복궁에 미치어 화재를 발생시킬 염려가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을 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광화문 앞에 세웠다는 것인데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이름부터 '해태'가 아니라 '해치'로 최근에는 서울시의 상징동물로 해치라고 올바르게 부르고 있어 다행입니다.

해치는 중국 요(堯) 임금 때 출현한 상상의 영물(靈物)로서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정수리엔 외뿔이 있고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몸은 비늘로 덮여 있으며 매우 영리하여 선악(善惡)을 구별하는 능력과 사람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신령(神靈)서러운 재주가 있습니다. 중국의 <이물지(異物志)>에는 해치에 대해 "성정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툴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해치는 인간의 죄를 다스리는 사헌부(司憲府)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헌부 수장(首長)인 대사헌(大司憲)의 흉배(胸背)에는 해치가 그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문반(文班)의 흉배에는 학(鶴)이 그려져 있고 무반(武班)의 흉배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당상관(堂上官)인 정삼품(正三品) 이상은 두 마리가 당하관(堂下官)인 종삼품(從三品) 이하는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경복궁 둘러보기

이제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가 봅시다.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은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따왔는데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만방에 보여준다"라는 뜻입니다.

광화문은 달리 정문(正門)과 오문(午門)으로도 불렸는데 정문(正門)이란 의미에 대해서 정도전은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라고 태조께 아뢰었고 오문(午門)이란 궁궐의 좌향(坐向)이 배북남면(背北南面)이니까 그 정문은 오행(五行)으로 봐서 남쪽인 오시(午時) 방향임으로 오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 명성황후가 시해된 옥호루 Ⓒ서울학교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闕門)의 형식을 갖추었는데 돌로 육축(陸築)을 높이 쌓고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을 내는 삼문형식(三門形式)으로 가운데 칸이 양쪽 옆 칸보다 조금 더 높고 넓습니다.

이러한 양식을 고설삼문(高設三門)이라고 하고 가운데 칸은 어칸(御間)으로 임금과 왕비만이 드나들고 동쪽 칸으로는 문신(文臣)들이, 서쪽 칸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광화문의 현판 글씨는 고종 때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서 영건도감 제조를 맡았던 임태영(任太瑛)이라는 무인(武人)이 쓴 것입니다.

광화문은 남문이라서 천정에 주작(南朱雀)이 그려져 있고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무(北玄武)가, 동문인 건춘문에는 청룡(左靑龍)이,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右白虎)가 그려져 있습니다. 광화문 안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 이곳에는 삼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궁이 아니라 궐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수비군인 교대식이 열리는 곳입니다.

바로 앞에 흥례문(興禮門)이 회랑을 좌우로 둘러치고 위엄 있게 서 있습니다만 흥례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으로,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이 홍력(弘歷)이므로 그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홍(弘)을 흥(興)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광화문에서 흥례문에 이르는 구간은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곳은 삼도(三道)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병사들이 훈련할 수 있도록 평평한 광장(廣場)으로 되어 있으며 군사들이 숙직할 수 있는 건물들도 있습니다.

흥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근정문이 보이고 좌우로 행랑이 둘러쳐 있으며 바로 앞에는 영제교(永濟橋) 라는 돌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는 명당수(明堂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궁궐의 최북단인 열상진원(列上眞原)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향원정(香遠亭)에서 연못을 이루고 전각들의 밑을 흘러 경회루 연못에 잠시 쉬었다가 영제교 아래로 흘러 동십자각 못 미친 곳에 있는 궁궐담장 아래 이간수문(二間水門)을 통해 궁궐을 빠져나가 중학천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갑니다.

이 물길은 서류동입(西流東入) 또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명당수로서 금천(禁川)이라고 하는데 임금의 공간과 바깥공간을 구분 짓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천록(天祿)이라는 뿔 하나 달린 서수(瑞獸) 네 마리가 매서운 눈초리로 모든 사악(邪惡)한 것들이 금천을 건너지 못하도록 납작 엎드려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금천 위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고 하는데 조선의 모든 궁궐에 놓여 있으며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敎)가 그것입니다.

흥례문에서 바라볼 때 동쪽인 오른쪽 행랑에는 덕양문(德陽門)을 냈고 서쪽인 왼쪽 행랑에는 유화문(維和門)을 내고 그 옆에 기별청(奇別廳)을 두었습니다. 유화문은 신하들이 집무를 보던 장소인 빈청(賓廳)으로 통하는 문(門)으로 궁 밖의 관료들은 광화문, 흥례문, 유화문을 거쳐 빈청을 드나들었습니다.

유화문 옆에 자그마하게 붙어 있는 기별청은 아침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일들을 기별지(奇別紙)로 작성하여 배포하던 곳으로 관청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있을 때 기별(奇別)이 왔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동쪽에 일화문을, 서쪽에 월화문을 거느리며 회랑으로 둘러쳐진 근정문을 들어서니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전(正殿)이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습니다. 근정전 앞 넓은 뜰에는 삼도(三道)의 양 옆으로 품계석(品階石)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주위로는 다듬지 않은 돌인 박석(薄石)이 깔려 있는데 가공하지 않은 박석을 사용한 것은 햇빛의 반사를 막고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섭니다.

박석이 깔린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부르는데 내각(內閣)이나 정부(政府)를 뜻하는 권력기관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한 달에 네 번씩 열리는 조회(朝會)인 조참(朝參)의식과 삼명절(三名節)인 정월초하루, 임금 및 왕비의 생신날 그리고 동짓날에 하례(賀禮)를 드리는 조하(朝賀)의식이 열렸던 곳입니다. 그리고 임금의 즉위식도 거행되어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등 여덟 분이 이곳에서 등극하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조정은 북쪽보다 남쪽이 1미터 정도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태로 경사(傾斜)져 있는데 이는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정전 구역은 조정은 박석과 품계석으로 월대는 이중의 화강암 기단으로 모두 석물로 이루어졌는데 딱 세 종류의 쇠붙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박석에 박힌 쇠로 만든 고리인데 이것은 차일을 칠 때 사용하던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근정전의 이중월대 상단에 놓여 있는 청동항아리로서 이는 향로가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정(鼎)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중월대 하단 동쪽 귀퉁이에 있는 가마솥 같은 커다란 철물로 순우리말인 '드므'라고 하며 이곳에 물을 담아 놓아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 형상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인 소박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기물입니다.

그래서 왕권의 상징인 정(鼎)은 조선시대의 법궁,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의 정전 중화전(中和殿)에만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근정전 뒤편에 사정문과 사정전(思政殿)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편전(便殿)으로서 임금이 집무를 보던 곳입니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사정전 동쪽에는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는 천추전(千秋殿)이 있어 계절에 따라 집무를 보는 장소를 달리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정전은 온돌로 되어 있지 않고 마루로 되어 있어 겨울에 거처하기엔 불편함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돌로 되어 있는 두 개의 부속 건물을 배치하였습니다.

사정전 뒤에는 향오문(嚮五門)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는 왕의 침전(寢殿)인 강령전(康寧殿)이 있습니다. 향오는 오복(五福)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 오복이라 함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일컫는 것입니다. 수는 오래오래 천수(天壽)를 다해 사는 것이고, 부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고, 강령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유호덕은 덕을 쌓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항상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고, 고종명은 마지막 죽음에 임해 고통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오복 중에서 세 번째 강령을 따와서 침전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강령전 건물은 용마루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잠을 자는 사람이 바로 용인데 또 다른 용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령전은 전각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월대(月臺)가 무척 높고 넓습니다. 임금의 침소 앞뜰에서도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증좌일 것입니다. 왕비와 세자가 석고대죄를 청하던 곳이기도 하고 임금의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조정대신들이 그 부당함을 목숨을 내놓고 바로잡기 위해 읍소하던 곳도 바로 강령전 월대였습니다.

경복궁 순례를 반쯤 밖에 하지 않았는데 원고는 넘치고 할 말은 태산 같고 할 수 없이 남은 부분의 얘기는 현장에서 나누기로 하고 글은 여기서 마치렵니다.

경복궁을 둘러보고 나와서는 영추문 건너편에 있는 생선구이와 찌개를 잘 하는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청와대 옆에 있는 칠궁(육상전)을 담장너머로 슬며시 지나쳐 보고 '그때 그 사람들'의 역사 현장인 궁정동 안가 터를 둘러보고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로 난 청와대 앞길에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앞에서 경찰의 온갖 간섭을 받아 가며 사진 한 장 찍고 삼청동 골목길을 둘러보고 옛 경기고등학교 터(지금은 정독도서관)에 옮겨놓은 종친부를 거쳐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사저(私邸)로 사용했던 감고당(感古堂) 길을 거쳐 인사동에서 아이 쇼핑을 즐긴 후 원각사 터였던 탑골공원에서 기행을 마감하려 합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우의,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5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1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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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 1년간의 일정으로 12코스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12코스의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오전 9시 30분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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