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共和主義)란 일반적으로 군주 독재에 반하는 인민주권(人民主權)에 의한 공동의 정치형태를 이른다. 공화주의는 국민을 더 이상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군주가 더 이상 나라의 주인이 아니듯이 국민도 무분별한 자유와 사익을 추구하는 개체가 아니다. 공화국에서의 국민은 사회공동체에 참여할 책임을 지닌 자주적 공민(公民)이다.
그런 공민으로서의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고 필요한 정치제도를 구비하면 민주공화국이 되는 것이다. 인민주권의 공동체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사회에 합의된 공공질서가 있고 공정한 룰이 통하면 된다. 어떤 계급에 의해 다른 계급이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으면 된다.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에 담긴 의미는 이러하다.
KBS의 행태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이다
KBS가 민주공화국의 공영방송으로서 지니는 지위와 책임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리 서두를 시작했다. KBS의 주인은 마땅히 공화국의 주체이자 시청료까지 납부하는 국민이다. 시청료는 소비자로서 내는 요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기도 물도 쓰는 만큼 내지만 수신료는 KBS 시청여부에 관계없이 법령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납부하고 절대의 몫을 KBS가 가져가니 그렇다.
따라서 KBS는 KT나 수자원공사 등 다른 공기관과는 비교불가한 공적형태이고 그렇게 공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 KBS만큼은 국민이 소유주체이자 운영주체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기구가 선임한 사람들로 이사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현 KBS의 실질적 통수권자는 누구인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사장도 이사회가 선임한 사장도 아닌 대통령이다. 임명도 대통령이 측근을 불러 앉힌다. KBS가 방송을 통해 지향하는 바도 대통령과 그의 권력의 안정적 유지와 정치적 홍보이다.
가장 왜곡된 기업구조를 갖고 있는 이 나라 대기업을 살펴도 이런 예는 없다. 기업 총수와 임직원이 주주총회와 대주주로 구성된 이사회의 총의를 팽개치고 회사 밖 지배집단을 위해 굴종하는 일은 없다. 전경련을 추종하지도 않고 경영자총협회를 섬기지도 않는다. 봉건군주인 왕이 지배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다.
따라서 KBS가 정치적 중립이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포기한 채 대통령의 지배 아래 놓이고 순응하는 것은 그저 KBS의 타락이라 부를 게 아니다. 이것은 민주공화국의 국민공영방송의 체제가 아니다. 지금 KBS의 행태는 공화국민과 공화주의, 즉 '대한 국민'과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배신이자 반역인 것이다.
'시청료 거부 범국민 운동'의 역사를 잊었나
그리고 역사에 대한 반동이다.
1984년 봄까지 국민은 KBS가 독재 권력에 굴종해 관제 왜곡보도를 일삼거나, 퇴폐저급한 3S 우민화 프로그램을 쏟아내도 제어하거나 견제할 힘과 수단이 없었다. '땡전 뉴스'에 대한 불만은 개인적인 울분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84년 4월 28일 전북 완주의 가톨릭 농민회와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KBS 시청료는 여당인 민정당과 정부만 내라"고 구호를 내걸고 시청료 거부운동을 개시한 것이 조직적 저항의 시작이었다. 정권의 나팔수가 된 공영방송에 대해 야당도 시민단체도 언론학계도 아닌 가난한 농민들이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이다. 가톨릭의 시청료거부운동은 곧 개신교로 옮겨져 기독교범국민운동이 되었고 다시 여성단체와 청년단체들이 합류해 명실상부한 범국민운동으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1986년 2월 11일 결성된 'KBS 시청료거부 범국민운동본부'이고 곧 이어 전국 곳곳에 지역조직이 결성된다.
1984년 4월에 시작된 KBS시청료 거부운동은 5공 군부 시절 정치권을 벗어난 반독재 시민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시민들을 규합했고, 여기에 힘입어 야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쾌거를 거둔다. KBS 시청료 거부운동에서 만난 야권과 시민세력, 종교세력, 노동자농민 세력은 여세를 몰아 시청료 거부범국민운동에서 직선제 쟁취로 나아갔다. 그래서 1986년 9월에는 이름을 'KBS 시청료 거부 및 자유언론 쟁취'로 확대해 거의 모든 세력들이 총집결한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발전한다. 그 흐름을 바탕으로 '민주화쟁취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국민은 1987년 6월의 시민혁명을 이루게 된다.
과거사를 길게 늘어놓는 까닭은 'KBS와 KBS 시청료'가 갖는 시대적, 사회정치적 의미가 간단치 않음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KBS 시청료는 공화국의 시민세력이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바로미터이자 시민불복종의 도구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무시한 채 KBS는 시대적 책임을 망기하고 정치적 굴종으로 국민을 실망시켜왔다. 또 수신료 인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회 도청 사건 의혹에 대해서도 해명을 거부한 채 의혹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미디어렙 입법 과정의 소요를 이용해 한나라당과의 거래를 성사시키려 하고 있다. 대통령을 통수권자로 방송을 운용하고 집권여당을 내세워 수신료 인상에만 목을 매는 KBS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얼마나 될까? 수신료를 지금 올려주고 싶은 국민은 얼마나 될까? 수신료 인상분에서 KBS가 아닌 교육방송과 공공방송 발전을 위한 재원으로 분배비율을 조정할 안은 합리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것인가?
영국의 BBC는 2005년 4000여명의 인원을 줄이고도 올해까지 전체 직원의 12%인 2800명 감축을 추진하고 있다. 600여명의 간부 직원은 18%가 감축될 예정이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도 2007년 직원 10% 감축과 조직 통폐합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시행했다. 수신료는 인상 대신 오히려 10% 깎았다. 그럼에도 NHK의 2008년 수신료 수입이 자발적 납부의 증가로 전년도보다 늘어난 것을 누구보다 KBS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는 결코 수신료를 올려 줄 수 없다.
'KBS 바로세우기'는 시민사회의 책무
마지막은 시민단체와 언론노조에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미디어렙법 입안 과정에서의 입장 차이와 논란이 안타까웠고 해소되지 않은 상태임을 안다. 그러나 국민의 공영방송 KBS 문제에서는 양 측이 연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KBS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과 합당한 구조조정의 촉구, 이에 상응하는 수신료 재원의 확대와 재배분은 KBS와 한나라당이 미디어렙법과 연계해 변칙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과거 민주화 시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듯이 KBS 바로 세우기 운동은 시민사회세력이 역사적으로 짊어진 책무이기도 하다. 대승적 만남과 연대를 통해 KBS 바로 세우기 운동이 다시 한 번 2013 새로운 민주 언론 회복의 시발점이 되어 주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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