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가 약해서 못이 솟는 건 아니다

[기자의 눈] 두 청와대 수석의 '할 말 못할 말'을 보고

청와대의 전해철 민정수석과 박남춘 인사수석이 16일 오후 나란히 청와대 기자실을 찾았다. 수석비서관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기자들 앞에 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기자들의 이어지는 질문 범위를 넘어서까지 상세히 답변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두 수석과의 문답에서는 이른바 '유진룡 파문'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청와대의 의지가 짙게 엿보였다.

언제는 낙하산이 없었냐마는

사실 현 정권에서건 과거 정권에서건 혹은 공공기관이건 민간 기업이건 '낙하산 논란'은 끊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 점에서는 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이나 야당에서도 '또 낙하산이냐'고 열을 올리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곧 수그러들곤 했다.

지난달 말 강금실 캠프에 있던 386 출신 회계사에 대한 증권선물거래소 감사 추천, 이달 초 골프파동으로 물러났던 전 청와대 비서관의 전기안전공사 감사 임명으로 또 다시 촉발된 '낙하산 논란'의 경우도 그 정도가 좀 심하긴 했지만 역시 곧 잠잠해질 기미였다. 다만 점증하는 비판에 인사비서관, 인사수석, 대통령이 차례로 "낙하산이 뭐가 문제냐? 정치인 출신 낙하산이 일 더 잘하는 경우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논란이 좀 길어진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 8일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이 승진 6개월 만에 경질되면서 또 한 차례 이어진 '낙하산 논란'은 단순한 '인사 잡음'을 넘어서서 청와대 비서진과 정무직 관료의 힘겨루기, 레임덕 우려, 개혁 법안에 대한 논쟁 등이 두루 뒤섞여 대단히 복잡한 진실게임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직은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한 것이었다. 옷을 벗어 홀가분해진 유 전 차관은 "낙하산 인사를 거부해서 내 목이 날아간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고, 행정고시 출신으로 문화부에서 붙박이 관료 생활을 하며 차관까지 진급한 사람답게 문화부 내에서도 동정론이 높아졌다.

'신문법'이 불에 기름을 붓다

이에 청와대는 유 전 차관의 주장이 '사실무근'이라며 '(개혁법안인) 신문법 관련 업무를 해태해서 경질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안 그래도 경질의 전말이 석연치 않던 마당에 이같은 청와대의 해명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계륵' '약탈정부' 기사 등으로 정부를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고 있던 보수언론들로서는 눈엣가시였던 신문법이 논란거리가 되니 신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신문법은 일단 뒤로 돌려놓고 지하철, 자택 등까지 따라붙은 결과 유 전 차관으로부터 이백만 홍보수석, 양정철 홍보비서관의 실명을 이끌어 냈다. 이 와중에 '급도 안 되는 인사' '배 째 드리죠' 등의 자극적 발언 들은 덤으로 따라왔다.

이때부터 한동안은 유 전 차관과 언론의 페이스였다. 언론과의 댓거리에서 빠지지 않던 청와대 홍보라인의 두 인사는 '홍보수석' '홍보기획비서관'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기자들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간 조간, 석간 할 것 없이 추가 의혹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L씨, K씨 같은 이니셜이 횡행하고 퍼즐 맞추기 게임이 진행됐다.

그 와중에 들린 청와대 측의 목소리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간간이 일부 언론을 통해 익명으로 대꾸하는 정도였다. "유 전 차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청와대에서 추천한 인사 때문에 기관장 후보들이 탈락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원래 문제가 많았다"는 등의 볼멘 소리도 그렇게 익명으로만 전해졌다.

"원래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이런 논란이 늘 그렇듯 한나라당이 언론의 논란을 받아 "진상조사단을 꾸리겠다"고 정치공세를 펼치고 시중의 여론도 청와대 홍보라인의 두 관련인사들에게 썩 유리한 쪽으로 돌아가지 않자 드디어, 그러나 대단히 이례적으로, 청와대의 민정과 인사 수석비서관이 실명을 걸고 정면대응에 나서게 된 것이다.

16일 두 수석비서관 동시출연의 경위는 이런 것이었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오죽 급했으면 이렇게 두 수석비서관이 함께 나서게 됐을까 싶기도 하다.

정말 이 두 수석비서관의 말에는 '다급함'이 배어났다. 평소 같으면 전혀 들을 수 없는, 아니 공개적으로 얘기되기에는 부적절해 뵈는 말들이 마구 쏟아졌기 때문이다.

"유 전 차관이 정책홍보실장 때부터 문제가 많았다." "사실 차관 승진 2순위였는데 1순위자가 도덕성에 문제가 있어서 진급시켰다." "영상자료원장 최종후보자들은 뇌물 수수, 부하 여직원에 대한 성적 발언 등이 문제가 돼서 탈락한 것이다." "유 전 차관이 청와대 비서실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을 인사 데이터베이스에 남겨놓았다." 이런 식으로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되거나 그야말로 내사자료에나 남겨두어야 하는 내용들이 여과없이 쏟아졌다. 완전히 공개적인 발표 자리였다. 그 자리에 '비보도 요청'이나 '백그라운드 브리핑' 등의 단서는 전혀 없었다.

듣는 기자들이 "이런 거까지 다 말해도 되냐"고 되물을 정도였지만 두 수석 비서관은 "이런 말 원래 하면 안 되는데 우리가 속수무책이라…"라는 전제를 붙이며 거침없이 발언을 이어갔다.

청와대 측은 "언론들이 '왜 털어놓지 않냐'고 밀어붙이더니 이제는 자세히 밝힌다고 또 뭐라고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항변에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옷도 벗었겠다 홀가분해진 유 전 차관은 '정무직 출신'으로서의 품위도 없이 속 이야기를 줄줄이 풀어놓고 신이 난 언론들이 이를 받아쓰다 못해 부풀려 쓰는 상황에서 '옷을 벗은' 인사를 상대로 어찌 할 수단을 갖지 못한 청와대가 느꼈을 답답함도 일견 이해가 간다는 얘기다.

연이은 '정면대응'이 더 큰 레임덕 불러 일으킬 우려

그러나 그 답답함을 이해한다는 전제 위에서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이날의 이례적인 두 수석 동시출연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우선 권력이 정보를 운용하는 모습 치고는 대단히 서툴게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더 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혹은 인사 검증을 위해 청와대의 해당부서에서 고위 인사들의 가려진 부분을 알고 있어야 할 필요성은 상존한다. 과거 정권은 권력기관을 통해 파악한 고급 관료, 정치인들의 도덕적 약점을 틀어쥔 채 협박 정치를 일삼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는,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날 폭포수 같이 쏟아진 두 수석의 정보 공개는 '우리가 필요하면 뭐든지 깔 수 있다'는 식이었다. 물론 과거 정권에서와 같이 개인적인 약점을 틀어쥐고 물밑에서 써먹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사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또는 "정치공세에 속수무책이라서…"라는 단서 아래 풀어놓은 얘기들 중에는 이 단계에서 꼭 필요하고도 적실한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들도 많았다. 그래서 듣기에 민망하기도 했다. 과거 한 부서의 부서장으로 일할 때 부서원들과 불화가 있었다든지, 이미 복권까지 이뤄진 사안의 당초 혐의 내용들이 이러저러한 것들이었다는 등의 내용이 과연 공개되어도 괜찮은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사자들에게는 거의 폭력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이래서야 개인의 신상정보를 여기저기 마케팅업체에 팔아먹는 파렴치한 인터넷 회원 사이트의 행태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둘째로는 이날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이 권부 내의 내밀한 검증과정을 시시콜콜하게 공개하는 식의 대응은 오히려 레임덕을 부채질 할 수밖에 없는,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아끼는 홍보라인의 두 비서관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가 청와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이같은 정보공개가 불가피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당장은 속시원할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사태가 종결된다고 확신하기도 어렵거니와 이런 식으로 관료들을 대해서야 누가 정권을 믿고 열과 성을 다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장은 고위직 후보군에 들어 있는 관료 또는 관련인사들이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있더냐'는 속설대로 납작 엎드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사는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으면 안 시키면 될 일이지 왜 그런 소리를 동네방네 떠드냐'는 식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울분에 차 있기도 하다. 더구나 인사검증의 대상이 됐으면 대개는 '친정부인사'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정권 말기에 권력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자각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임기 초중반에 장악되지 않았던 관료들이 임기 말에 이르러 길들여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발상이다. 게다가 지금은 마무리를 걱정할 수순이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자신이 선택한 관료를 상대로 대거리를 하는 모습에서는 권력의 위엄을 찾아볼 길이 없었다. 노 대통령이 좋아하는 '정면대응'이 이런 것이라면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이런 헐벗은 권력의 모습으로는 임기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레임덕에 대한 강박을 느껴 필요이상으로 과잉반응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레임덕을 불러올 뿐이기 때문이다. 망치가 약해서 못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은 정면돌파보다는 관리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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