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씨가 직접 쓴 문건 있다. 그걸 두고 왜…"

[인터뷰] 유지나 교수 "장자연 사건, '진실의 법정' 열려야"

일본 대지진이 일으킨 '뉴스 쓰나미'에 지진 직전까지 언론에 오르내렸던 사회 이슈들이 묻히고 있다. 그 중에는 SBS가 자필 편지로 추정되는 문건을 공개하면서 2년 만에 다시 여론의 관심을 끌었던 장자연 사건이 있다.

이 문건에는 생전 장자연 씨가 성상납 요구에 시달리며 겪었을 법한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여론은 당시 부실수사 논란을 면치 못했던 경찰을 향했다. 재수사 촉구 여론이 높아지자 경찰은 "편지가 친필로 확인되면 재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경찰의 자존심을 걸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필적 감정 결과를 받아 16일 오후 종합조사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경찰은 고 장자연 씨의 지인이라는 수감자 전모 씨의 압수물 중에서 '장자연 편지'와 필체가 유사한 아내와 아내 친구 명의의 편지 원본 10장을 발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찰의 발표는 이들 편지가 위조일 가능성에 비중을 싣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경찰이 이 편지의 진위 여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우스운 행태라는 지적이 많다. 이 편지가 가짜로 나타난다고 해도 2년 전 경찰의 수사가 정당하고 명백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번 논란이 보여주는 것은 국민의 대부분이 장자연 사건에 풀리지 않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지나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는 2년 전 고 장자연 씨가 "나는 힘없고 나약한 신인 여배우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남긴 문건을 강조했다. 그는 경찰이 이 문건의 진위에만 집중하는 것을 두고 "원래 장자연 씨가 직접 쓴 것이 분명한 문건이 있었다. 그 문건이 보여주는 진실이 있고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다"며 "그런데 왜 새 문건의 진위에만 집중하느냐"고 반문했다.

날카롭고 통쾌한 영화평론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 교수에게도 이 문건은 그가 장자연 사건에 집중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는 "장자연 씨가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지장까지 찍어 남긴 그 문건 자체가 크게 와닿았다"고 말했다. 특히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왜곡하는 대중문화를 비판해온 그에게 이 문건은 권력과 연예산업, 성적 착취 등 한국이 숨기고 있던 문제를 드러낸 핵심 증언이었다.

그는 "고 장자연 씨가 지장까지 찍어 그 문건을 남겼기 때문에 그간 '루머' 수준에서 그치던 연예계 성상납 문제가 법정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문제는 경철과 검찰의 수사가 면죄부를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 유지나 동국대 영상영화학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2시간에 걸친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유 교수는 "성상납 등이 관행처럼 되풀이되는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미 알려져 있듯 연예계에서 소위 '스폰서' 문화나 성상납 등이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이것은 잘못'이라고 명백히 밝힐 사회적 판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피해자인 여성 연예인들 마저도 '버티면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일종의 '환상적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연예계에 만연한 비리와 비인간적인 작태에 저항하고 빠져나오려고 했던 장자연 씨가 참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그 죽음이 더욱 안타깝고 억울하다"고도 했다.

그는 여성 연예인 인권 서포터즈인 '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고 장자연 씨 처럼 성착취에 시달리전 모 연예인을 도와준 사례를 소개하면서 "누군가 돕는 이가 있는 것 만으로도 큰 심리적 치유가 된다"고 말했다. 이는 끊이지 않는 한국 연예인들의 자살을 생각할 때도 의미심장한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머지않아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선례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맛 나는 사회"를 위해서도 권력, 잘못된 성관념, 연예산업 등 한국 사회의 각종 문제가 엉켜 있는 이 사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을 능욕하는 것이 자랑스러워? 삐뚤어진 '권력남'"

프레시안 : 장자연 사건 이후 2년 여 동안 유 교수는 꾸준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 사건에 계속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지나 : 모두 기억하겠지만 2년 전 고 장자연 씨가 주민등록번호에 지장까지 찍고 '저는 힘없고 나약한 여배우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도와달라고 남긴 문건이 있었다. 장자연 씨가 자살하면서 유서가 됐지만, 그 문건 자체가 크게 와닿았다. 나 역시 여성이고 대학교수이자 영화 평론을 하는 사람으로서 느꼈던 가슴 아픈 일들, 연예인이 된 제자들을 통해 들은 간접적인 이야기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게다가 그간 내가 관심을 가져온 남녀간의 관계 문제들, '왜 한국사회에서 남성은 여성과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가', '여성은 왜 남성에게 기대려는 가부장적 사고에 세뇌되어 있는가' 등의 화두들이 이 문제에 반영이 됐다. 이 모든 문제를 장자연 씨가 아픔으로 끌어안고 있더라. 이 사건은 권력층과 연예계가 만날 때, 그러니까 한국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과 권력이 없는 여성이 만났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간 한국사회가 앓아 왔던 병이 부정의함과 인권 착취, 구조적 모순 등으로 한데 뒤엉킨 채 곪아오다 이제는 더이상 버틸 수 없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 "여성을 능욕하는 것이 남자로서, 권력이 있는 자로서 뿌듯함을 가져다 준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이번에 공개된 장자연 씨 자필 편지를 처음 보도한 SBS 우상욱 기자는 최근 기자 칼럼에서 "접대를 받은 이른바 '힘 있는 사람들'은 그런 특별한 접대를 받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라고 꼬집는 글을 냈다. 그는 동시에 "만약 그런 자리에 초대받았다면 나는 그를 거부하고 잘못을 따질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고 반성하기도 했는데.

유지나 :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 자체가 권력과 맞닿은 삐뚤어진 남성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방적으로 여성을 능욕하는 것이 남자로서, 권력이 있는 자로서의 뿌듯함을 가져다준다면 이것은 정말 괴기스러운 것 아닌가. 그렇게 왜 여성과 동등한 인격으로서 소통을 하지 못하고 하수구 찾듯 성매매에 가담하려고 하나. 왜 진정한 만남을 하지 못하나.한국에서 주체로서의 남성성 키우기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그들 자신도 어찌보면 참 가련하도록 자기 삶의 불행 지수를 높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한국에서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소비하는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다.

더불어 그 글의 취지 자체는 인정하지만 우 기자는 당연히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잘못을 따졌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기자정신과 온당한 남성윤리성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두려운가? '검사 스폰서' 사건 때도 그 접대를 거부한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 않나. 그 한 사람이 다수가 되어야 한다.

"'검사와 스폰서'가 먼저 터지고 장자연 사건이 났더라면"

프레시안 : 가해자가 남성이자 힘있는 권력이라는 점이 지난 2년 전에도 장자연 사건을 제대로 종결짓지 못하고 '국민적 의혹'으로 남긴 원인이 아닐까.

유지나 : 만약 MBC <PD수첩>이 제기한 '검사 스폰서' 논란이 먼저 터지고 이후 장자연 사건이 났다면 사건의 추이는 달랐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장자연 사건에서 말하는 성상납과 검찰이 스폰서에게서 받는다는 성접대는 같은 것 아니냐. 다만 소위 접대부로 알려진 여자가 가느냐, 혹은 연기자로 알려진 여자가 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돈만 내면 되는 불특정 다수의 남성이 대상이냐,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돈 이상의 권력을 가진 소수 남성이 대상이냐의 차이가 아닌가.

프레시안 : 장자연 논란이 2년 만에 다시 불거진 것에도 알 수 있듯 2년 전 경찰과 검찰은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을 종결시켰다.

유지나 : 당시의 경찰, 검찰의 수사는 면죄부를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다만 개인의 문제만이 거론됐다. '그러게 왜 연예인을 하려고 하나', '왜 그것을 처음부터 거절하지 못했나.' 구조에 몰린 여성 연예인을 이해하려는 시각은 없었다. 분명 장자연 사건에는 한국 사회의 구조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구조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처벌이 있어야 한다. 이에 가담했던 가해자가 처벌 받아야 하는 게 정석이다. '일벌백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관행이 사회적으로 부당하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 보통의 인권 운동에서도 판례가 중요하지 않나. 제대로 진실의 법정에서 판결이 된다면 큰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다.

▲ "경찰이 문건의 진위 여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2년 전 의혹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금의 논란도 문건의 진위에만 맞춰져 있는 상황인데.

유지나 : 경찰이 문건의 진위 여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2년 전 의혹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닌가. 오늘 언론보도를 보니 어이가 없더라. '진짜 편지가 아니라는 흔적을 찾았다', '많이 찾았다', '7개나 찾았다' 이런 식의 보도던데. (인터뷰 하던 날은 경찰이 편지 봉투 등에서 조작을 의심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발표한 날이었다.) 경찰도 문제지만 '무엇이 문제다' 라는 비판과 감시는 없이 '문건이 가짜래'라는 주장만 하는 언론들에선 선정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원래 장자연 씨가 직접 쓴게 분명한 문건이 있었다. 그 문건이 보여주는 진실이 있고 풀리지 않은 의혹이 있다. 그런데 새로 나온 문건의 진위에만 집중하는 것은 '선정주의'에 불과하지 않은가.

프레시안 : 만약 이 문건이 가짜로 밝혀질 경우 경찰은 재수사하지 않을 테고 다시 묻힐 가능성이 높은데.

유지나 : (한숨) 법정에서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법적인 차원에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회적 차원이 있다. 장자연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유지된 구조의 파행이 터진 거고 2년이 지나도록 수습되지 않은 거다. 제2, 3의 장자연이 있었고 혹은 제10의 장자연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것이 드러나면 좋겠지만 아닐 경우 예전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를 열어 억울하게 고문당하고 기소당한 사람들의 위한 진실의 법정이 열린 것처럼 장자연 씨 사건도 '진실규명위원회'가 열려야할 것이라고. 정부 전복 혐의나 정권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야만 정치는 아니다. 이런 것도 정치다. 권력 집단 특히 남성 권력집단의 이중성, 위선을 깰 시발점이 필요하다. 그러한 진실의 법정을 마련하기 위해 저널리즘, 기자들이 끊임 없이 진실을 추구해줬으면 한다. 사법부만 생각하고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면 관둘 일은 아니다.

"여성 연예인의 선택은 '타협 혹은 버티기'"

프레시안 : 장자연 씨 사건에서 기획사의 부조리, 부당한 횡포 등이 크게 부각됐다. 여성 연예인에게 스폰서를 강요하다시피 소개하고 성상납을 사주하는 식의 일들이다.

유지나 : 지난해 4월에 국가인권위의 조사에서도 나왔지만 가령 이런 식이라는 거다. 이런 상황에 휘말리는 신인들이 대부분 20대 초인데 기획사나 매니저가 일종의 '물주'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거기서 기획사 대표 등이 '연예인을 하려면 세상을 알아야 하고 세상을 알려면 남자를 알아야 한다. 남자를 알려면 성경험을 해봐야 한다'면서 '누구도 그랬다더라. 누구도 스폰서가 있다'며 당연한 '통과의례'처럼 말한다는 것 아닌가.

이 경우 연예인의 선택은 두가지다. 타협하거나 혹은 버티거나. 그런데 버티면 연예인 자체를 그만두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주변에 연예인이 이미 되었거나 되려고 하는 지인들이 있다. 이들은 장자연 씨가 겪은 것과 같은 혹독한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다. 크게 두가지인데 '데뷔를 해서 성공하려면 성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데 어떻게 할까'하는 고민이거나 혹은 '성상납 제안을 거부했더니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나와 이야기했던 한 친구는 그것을 거부하고 다른 직종으로 갔다.


프레시안 : 배우 김혜원 씨는 자신이 성상납 제안을 거부했음을 밝히면서 '그래서 한단계 더 못 올라가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썼다. 그 말이 참 의미심장했다.

유지나 : 그런 사람들이 주류가 되어야 하는데. 해줄 수만 있다면 부당한 제안을 거부하고 진실을 폭로한 연예인이야 말로 주체 의식, 인권 의식 있는 훌륭한 여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싶다. 그런 선례가 생겨야 변화의 물꼬가 터진다. 그러나 지금의 연예계에는 내부 고발자를 보호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게 현실이다. 안타깝다.

▲ "진실을 폭로한 연예인이야 말로 주체 의식, 인권 의식 있는 훌륭한 여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일부 기획사들은 일종의 '범죄 조직'처럼 비춰지는데 불쾌감을 토로한다고 들었다.

유지나 : 물론 기획사가 이 모든 문제의 절대 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획사가 있기 전부터 이런 문제는 있었다. 그러나 기획사의 횡포는 분명히 있다. 기획이라는 개념이 좋은 것처럼 들리지만 고급 인신매매에 더 가깝지 않은가. 사람의 예술적 감성이나 실력, 재능 등을 키워내는 것아 아니라 상품화하고 스타일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이번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획사 중심의 연예 구조가 가식이고 위선이라는 것을 많이 느낀 것 같다. 장자연 사건 이후 여성 연예인 하려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던데, 다행이다 싶더라.

"장자연 씨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까닭"

프레시안 : 한국이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이지만 그래도 일반 직장은 '성희롱은 범죄다'라는 의식 정도는 일반화 되어 있는데 유독 연예계에서는 그 인식이 낮은 것 같다.

유지나 : 지금의 연예계는 개선의 필요성이 목 끝까지 치달은 상태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나아지고 있는 과정이긴 한데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해야할까. 과거 기록에 의하면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 감독은 조선영화 결산 원탁회의 하는 자리에서 "여배우는 참 길들이기 어렵다. 감독은 포주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비유이긴 하나 공개된 장소에서 여배우를 보는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 거다. 기획 집단, 권력 집단이 여배우를 바라보는 시각은 1920년~1930년대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차이라면 이제는 그렇게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눈치'를 본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이 법정으로 갔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한 변화다. 그전에도 여성 연예인들이 겪은 억울한 사례와 이상한 루머가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수사가 이뤄진다고 해도 거의 결과가 나온 것이 없었고 장자연 씨 처럼 법정에까지 간 사례는 없었다. 이에는 장자연 씨가 남긴 문건, 주민등록번호와 지장까지 찍은 문건이 있었다는 것이 컸다. 그 기회에 제대로 진실을 밝혀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법정으로 갔다는 것 자체가 큰 변화이고 계기다.

▲ "피해자인 여성 연예인들도 '이것만 버텨내면 스타가 될 수 있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심리가 이들의 목소리를 가로막는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다른 연예인 역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먼저 나서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자신의 받은 부당함을 폭로하고 억울함이라도 호소해야 하지 않나.

유지나 : 이 문제도 '자력 구제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한다. 피해 당사자나 혹은 동료가 함께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여성 연예인 스스로도 '통과 의례'라고 생각하고 '이것만 버텨내면 스타가 될 수 있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가 위험하고 나쁜 상황에 처해있음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여성 연예인 개인을 비난할 것도 아니고 다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심리가 여성연예인 인권 개선을 가로막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를 일종의 '환상적 허영심'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 : 아까 말한 국가인권위 조사의 경우 익명 조사였음에도 데뷔한 기성 연예인들은 대부분 응하지 않아서 신인이나 지망생들을 상대로 조사했다고 한다. 익명 조사에도 응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공포감'을 보여주는 것일 텐데.

유지나 : 우리나라의 팬덤 문화에도 그 원인이 있다. 섹슈얼리티의 위선, 이중성을 버려야 한다. 우리 나라가 원하는 연예인 여성상이란 '순결한 사생활을 가진 야한 여성'아닌가. 무대에 나와서는 거의 속옷과 구분도 안되는 옷을 입고 나와 포르노스타 같은 춤을 추면서도 개인 인터뷰를 할 때는 순결한 소녀처럼 이야기해야 하는 것, 참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도 '모양 비디오' 이런 논란이 있었다. 몰래카메라로 피해를 입은 여성 연예인이 나와서 울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무엇이 미안한가? 순결한 이미지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다. 비디오를 찍고 배포한 남자가 문제 아닌가. 그러나 여성 연예인들 자신도 가부장적인 여성상에 세뇌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한국 연예인들이 좀 야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 이미지처럼 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생명력이고 실력이다. 여성 연예인에게 순결을 기대하는 대중의 환상이 깨져야 한다. 연예인은 순결한 여자를 대변하는 직업이 아니다. 그것이 연예인들의 자기분열성 우울증과 불행을 증폭시킨다. 여성 연예인은 왜 우울한가. 노예 계약과 같이 부당한 처우에 더해 이중적인 이미지까지 지켜야 하니 분열적인 이중적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들어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다.

프레시안 : 그런 팬덤 문화까지 생각해보면 연예인으로서 폭로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을 것 같다.

유지나 : 그래서 그런 모순을 깨고 나오려고 했다는 점에서 장자연 씨를 지금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비리와 비인간적인 작태에 저항하고 나오려고 시도했다. 자신을 위해서나 전체를 위해서나 참 소중하고 중요한 일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 죽음이 참 억울하기도 하다. 장자연 사건 이후에 만난 연예계 사람이 '너무 충격이다'라고 하더라. 장자연 씨가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폭로하려 했고 자살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보기에는 당시 장자연 씨는 인기 드라마였던 <꽃보다 남자> 조역이었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주연급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그래서 아쉽고 대단하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이들은 '성공한 누구도 그랬대, '스타만 된다면 괜찮아'라며 미친 척하고 그 모든 걸 참는데 장자연 씨는 벗어나려고 했다.

"'누군가 돕고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도"

프레시안 : 이야기하면 이야기할 수록 참 어려운 문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개인이라도 구할 방법은 없을까?

유지나 : 장자연 사건 이후 한국여성단체연합, 성폭력상담소, 민우회 등 여성단체들과 함께 여성 연예인 인권 지원 서포터즈인 '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구성했다. 이 단체에는 여성 단체 사람들도 많지만 개인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많고 특히 남성들도 많다. 이 문제에 남녀를 불문하고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를 보여준다.

한번은 모 연예인의 가족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지방에 있는 자본가의 투자를 받아 운영되는 기획사 소속인 연예인이 역시 성상납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가 겪은 일을 진술한 것을 보면 요즘 나온 장자연 문건보다 더 심한 내용도 있었다. 그 기획사에서도 맞고소한 상황이었는데 우리 중에 변호사도 있고 해서 지원을 해줬고 타협 정도로 끝났다. 당시 '우리는 모든 결정을 당신에게 의존한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했고 미디어에도 공개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그 연예인으로서는 큰 힘이 됐겠다.

유지나 : 타인이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심리적 치유 효과가 있다. 당신이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나눴다. 당사자에게 힘을 주고 자살할 상황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회사 사장이나 재벌만 힘이 있는게 아니다. 우리도 뭉쳐서 이 문제를 사회적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리면 힘이 생기더라.

▲"타인이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심리적 치유 효과가 있다."ⓒ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여성 연예인에게도 '연대'가 필요한 것 아닐까.

유지나 :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여성 연예인에게 '페미니스트'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하고. 흔히 하는 말로 '노는 물이 좋아야 한다'고 하지 않나. 여성 인권 멘토링도 하게 맺어주고 여성 연예인들이 참석하는 워크샵 등을 열어서 스스로 의식의 주체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지원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 혼자서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런 태도와 지평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찾고 자신을 연출하고 정체성을 찾아 삶의 방향을 결단하는 그런 이들이 많아져야 커다란 변화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멀리보면 꼭 장자연 사건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선례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목끝까지 차오른 상황이니까. 그 안에는 여성 자신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주체가 되고 남성도 여성과 동등하게 소통하는,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바라는 힘도 함께 들어있다. 지금 장자연 씨가 물꼬를 텄고 이제 선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의 법정'은 단순히 장자연 씨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해결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살맛나는 사회로 바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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