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이 이리도 무지막지한가? 영국 역사학자 제프 일리(Geoff Eley)가 유럽 좌파의 150여 년 역사를 사회주의와 노동운동부터 여성주의와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엥겔스의 시대부터 21세기의 문턱까지 한 권의 통사로 정리한 <The Left 1848-2000 : 미완의 기회, 유럽 좌파의 역사>가 그 책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사실 좀 더 문학적이다. 'Forging Democracy', 즉, '민주주의 벼리기'다. 좌파가 유럽의 민주주의를 제련한 장본인이라는 주장이 제목 안에 함축돼 있다.
'민주주의'도 그렇지만 '좌파'도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렇게 환영받는 말이 아니다. 두 우파 정당 중에서 더 우파적인 정당의 후보가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게 불과 한 달여 전이다. 민주화 운동의 계승자니 진보 좌파니 하는 세력은 모두 대중으로부터 받은 '불신임' 통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놓고 심란하고 시끄럽다. 이런 형편에 '좌파'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을 열쇠말로 하는 1000쪽짜리 책을 내는 사람들이 있고 또 돌 맞을 각오로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쓰려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시대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걸까? 그런데 사실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시대'에 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혼란의 시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지금 한 좌파 역사학자의 이 노작을 펼쳐 들어야만 한다.
이론가 아닌 대중의 드라마
책 칭찬부터 좀 해보자. 이 책은 한 세기하고도 반 백년의 세월을 수놓은 유럽 좌파의 다양한 흐름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폭넓게 정리한다.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물론이고 여성주의나 좌파 문화운동도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유럽 좌파의 역사를 이 정도로 총체적으로 소개한 책은 우리나라에서 이게 처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니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일리의 저작과 맞수가 될 만한 책으로는, 유럽 사회주의의 역사를 정리한 또 다른 영국 학자 도널드 사순의 책이 거의 유일하다.
관심의 무게에 치우침이 없다고 해서 저자가 정치적으로 무덤덤한 사람인 것은 결코 아니다. 저자는 자기 스스로 복지제도의 수혜자임을 고백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복지국가의 의의를 폄훼하지 않으면서도, 신자유주의에 쉽게 주도권을 내준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최근 역사에 대해서는 사뭇 비판적이다. 또 러시아 '10월 혁명'의 의의를 당시의 세계사적 정세 속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 변질과 스탈린주의의 과오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호도 하지 않는다.
저자의 준거는 항상 사람들에게 있다. 그가 다루는 시대를 실제 산 사람들, 그 중에서도 식상한 저명인사들 말고 민초들에게 애정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자칫 지루하거나 건조할 수도 있는 사회구조의 변화나 정치적 사건의 서술들 사이사이에 바로 그 풀뿌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족제도의 억압에 항의하며 자유연애 결합을 시도했다가 정신병원에 갇힌 19세기말 영국의 한 여성 사회주의자 이야기가 나오고, 게토에서 나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이야기도 등장하며, 체코 공산당의 열혈당원이었다가 프라하의 봄 이후 반체제 투쟁에 나선 사람들의 이름도 보인다.
바로 이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일지 모른다. 이 책은 좌파의 역사를 몇몇 날고 기는 이론가들 사이의 지적 활극의 무대쯤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스스로 보다 나은 삶을 묻고 그 답을 찾는 여정(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벼리는' 길)을 중단하지 않은 대중들 자신의 드라마다.
간혹 번역이 너무 직역에 가까운 게 이 드라마를 읽는 감흥을 좀 떨어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대한 저작을 이토록 성실하게 번역했다는 사실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흠에 불과하다. 역자의 노고는 아마도 평범한 박사 학위 논문 한 편보다 훨씬 더 큰 학문적 기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
150여 년의 유럽 좌파 역사에서 우리 시대를 읽는다
칭찬은 이쯤하고, 이제는 위에 제시한 이 책의 필독 이유를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할 차례다. 일전에 나는 우리 시대 한국 좌파의 상황을 원효 시대 불교의 상황에 견준 적이 있었다.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냐 싶기도 하겠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그 복잡함과 어려움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원효 당대에 불교의 역사는 이미 1000년이 훨씬 넘었다. 그 동안 불교의 본고장에서는 원시불교, 소승불교(부파불교), 대승불교가 각각의 시대적 맥락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한데 중국이나 한국에는 그 1000여 년의 역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인도에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역사의 흐름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 그것은 평면적 선택의 갈래 길로 다가왔다. 과연 어느 것이 진정한 불교인가? 원효 같은 사람이 해결해야 할 게 다름 아니라 이 물음이었다.
작금의 한국 좌파도 비슷한 물음에 봉착해 있다. 유럽 좌파의 역사가 이미 150여 년이 넘고 그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등이 부상했다. 그러데 지금 우리는 이 모든 흐름을 한꺼번에 접하고 있다.
이 어지러운 만화경 앞에서 혹자는 사회민주주의를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또 혹자는 혁명적 사회주의가 우리의 바이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점을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유럽 좌파의 역사 곳곳에 지금 우리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19세기말 유럽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이 최초로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던, 그러니까 노동 현장에서 산업 노조를 결성하고 지역에서 좌파정당을 건설하던 과정을 보자. 이것은 영락없이 요즘 한국의 노동운동이 해야 할 일, 그것이다.
하지만 장을 뛰어넘어 1956년 즈음으로 넘어가 봐도 거기에 또 우리의 이야기와 겹치는 대목이 있다. 이 무렵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되면서 유럽에서는 좌파 전체가 들썩였다. 스탈린주의의 비극에 이제는 더 이상 눈감을 수 없게 되었고 좌파 전반에 스탈린주의의 유령을 떨쳐버리려는 몸부림이 일어났다. 이것은 최근 민주노동당을 격동시키고 있는 '종북주의' 청산 문제와 잇닿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1970년대 서유럽 좌파와 노동운동이 맞부딪힌 새로운 상황도 지금 우리의 현실과 흡사하다. 신자유주의가 그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 이 당시부터 유럽에서는 노동계급 내의 분열이 좌파 정치의 난제로 등장했다. 한국의 독자라면 누구나 여기서 우리의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단순히 유럽 좌파의 여러 흐름들이 역사적 맥락과 상관없이 동시에 한국 사회에 쏟아져 들어온 게 문제가 아니다. 이념의 수용사가 사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지금 한국 자본주의에는 유럽 자본주의의 여러 시대가 서로 공존하며 중첩돼 있다는 것. 19세기말의 사회민주주의, 1956년의 신좌파, 최근의 신사회운동 등이 맥락 없이 수용된 게 문제가 아니라 실제 우리 자신이 19세기말의 시간대, 1956년의 시간대 그리고 신사회운동 등장의 시간대를 동시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유럽 좌파의 어느 시점에 눈길을 붙박아놓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어떤 정통을 논하거나 교과서를 만들려는 태도는 얼마나 일면적이고 허망한 일이겠는가? 그것은 우리 시대를 얼마나 단순화하고 희화화하는 것인가? 양극화의 시대에 뒤늦은 민주화 숙제에만 골몰하던 노무현 정부도, 외래 교과서만을 믿고 따르던 진보 세력도 이런 자신들의 편협한 안목의 희생자들은 아닌가?
그럼, 2008년 한국 좌파의 역사는?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일독을 강권하는 것이다. 무작정 북유럽 모델을 따르자고 말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오랫동안 자기가 속한 정파의 교과서에만 익숙한 분들에게 이 책의 강독을 제안한다. 조선 민족과 미제의 대결이라는 멜로드라마로만 현대사를 바라보던 분들에게도 이런 책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유하겠다.
하지만 이런 '선수'들 말고도 이 혼란의 시대에 길을 묻는 모든 분들에게 <The Left>를, 유럽 좌파의 역사를 음미하는 지적 여행을 권하고 싶다. 나도 1000쪽짜리 책 한 권 읽어봤다고 자랑할 거리도 되겠거니와 그보다 더, 역사란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우리의 1987년은 그럴만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보통선거권 쟁취 운동에서, 10월 혁명 직후의 세계 혁명 운동에서, 인류 역사를 야만의 위기로부터 구한 반파시즘 투쟁에서, 1956년 스탈린주의 비판의 격랑 속에서 유럽의 선배 동지들이 보인 그 결단―가장 철저한 시장지상주의 정부의 등장과 진보의 한 세대의 붕괴 앞에서 지금 우리는 과연 그만한 결단을 두려움 없이 감행하고 있는가? 어쩌면 관성을 깨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더 큰 것은 아닌가?
1968년 혁명 운동의 여진을 영상에 담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만사형통>은 이러한 자막과 함께 끝난다. "이제 당신 자신의 역사를 써라!" 제프 일리의 역사 여행이 남기는 화두도 결국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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