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 국유화' 요구하는 정치적 상상력 필요하다"

[인터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저자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하는 일, 합리적인 대화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다. 정치권에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그렇다. 최근 여, 야 정당의 공천 내역을 보면, 벌써 한물 간 개념이 된 모양이다. '경제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해 왔던 이들에겐 몹시 인색한 공천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너도나도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했지만, 뜻은 온통 제각각이었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저마다 생각이 달랐던 게다. 이래서는 말에 힘이 붙을 리 없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정치권 풍경은 그 결과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만났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책을 새로 들고 나타난 그의 첫 마디가 '경제 민주화'였다.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으로 담을 수 있는 게 워낙 다양하다는 게다. 옛 유고슬라비아 방식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부터 덴마크에서 발달한 농민 협동조합까지. 이처럼 폭넓은 개념을 놓고 나누는 대화가 겉돌지 않으려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장 교수는 그걸 '1인 1표(1人 1票)'의 원리라고 봤다. 많이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똑같이 권리를 행사하는 '일인일표'의 원리, 그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원리를 경제 영역에 적용하자는 게 '경제 민주화'다. 이렇게 보면 '1주 1표(1株 1票)'의 원리, 즉 주식을 가진 비율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은 '경제 민주화' 개념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 한마디로 주주자본주의 논리와 '경제 민주화'는 상극이라는 말이다.

장 교수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경제 민주화'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주주자본주의 논리가 한국에선 '경제 민주화' 구호 안에 담겨 있다는 게다. 여기엔 한국 경제사의 독특한 맥락이 있다. 재벌들은 정부의 규제를 피하는 명분으로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동원하곤 했다. 회사는 주주의 것이니, 주식이 없는 정부는 간섭하지 말라는 게다.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있었다. 재벌 스스로도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하지 못했던 게다. 1퍼센트대의 지분으로 삼성그룹을 지배하는 이건희 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개념 그대로의 주주자본주의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주주자본주의 역시 그저 말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재벌 개혁 운동은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비춰 봐도 지금과 같은 재벌 지배 구조는 잘못이라는 것.

여기서 장 교수의 생각과 갈라진다. 그는 진짜 주주자본주의가 자리 잡아서 지금과 같은 재벌 구조가 해체된다한들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고 본다. 변칙적인 순환출자구조가 깨지면, 해외 투기 자본만 이익을 보리라는 설명이다. 장 교수는 "이건희보다 돈 많은 사람이 와서 한국을 지배해달라는 게 재벌 개혁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이번 책에서 "재벌 해체는 투기 자본을 위한 잔칫상이다"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대안은? '경제 민주화'라는 말의 본래 뜻에 충실하자는 게다. '1인 1표'의 원리가 작동하는 영역, 바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업을 키우기보다 단기적인 이익만 쫓는 투기자본을 정부가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는 것. 그간 개혁 진영이 줄곧 주장해 왔던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에 대해 그가 의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앙은행이 담당하는 통화정책이 왜 소수 전문가의 몫이 돼야 하느냐는 게다. 통화정책은 대중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다수 국민을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대표하는 정부가 개입하는 게 옳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른바 관치금융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장 교수는 '그게 왜 나쁜가'라고 되묻는다. 오히려 정부가 책임을 방기하고, 모든 게 시장에만 맡겨진 상황이 진짜 문제라는 게다.

요컨대 그가 정조준한 표적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라기보다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질서가 된 시장만능주의다. '박정희의 유산'과 싸우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 이들과는 갈등이 필연적이다. 실제로 장 교수는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욕을 먹는 경제학자'로 종종 소개된다.

'경제 민주화' 구호가 허망하게 날아간 지금, 장 교수의 새 책이 나온 건 그래서 다행스럽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이종태 <시사IN> 기자와 함께 나눈 대화를 묶어 낸 이번 책은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을 차근차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7년 전, 같은 방식으로 낸 <쾌도난마 한국 경제>에 담긴 문제의식이 보다 정교하고 깊어졌다. 그가 새로 낸 책이 널리 읽힌 뒤, 다시 등장할 '경제 민주화' 구호는 지금보다 견고한 뜻을 담고 있을 게다. 지난 20일, 서울 삼성동에서 장 교수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날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발행인이 진행했다. <편집자>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적의 적'은 우리 편?…투기자본은 재벌보다 더 나쁘다!"

프레시안 : 이번 책에서 국제투기자본의 폐해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나오는 '경제 민주화' 담론에선 빠진 대목이다.

장하준 : 시장 논리를 강화해서 '경제 민주화'를 이룬다는 주장은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1주 1표(1株 1票)', 또는 '1원 1표(1元 1票)'의 원리가 작동하는 시장과 '1인 1표(1人 1票)'를 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는 원래 양립하기 어렵다. 개혁 진영에 있는 이들 가운데서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을 종종 본다. 재벌은 우리의 적인데, 국제투기자본이 재벌에겐 경영권을 위협하는 적이므로 국제투기자본이 우리 편이라는 식이다. 몹시 위험한 발상이다.

감상적인 애국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요컨대 해외투기자본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금융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다. 이른바 '토종 금융자본'를 키우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금융자본을 규제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국경을 넘나들며 이익을 챙기는 금융자본을 빼고는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금융자본의 움직임은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원래 시장 자체가 그렇다. 합리적인 시장 원리는 환상일 뿐이다.

1970년대 말부터 각종 규제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국제금융자본은 1990년대 이후 고수익을 찾아 동아시아, 남미 등 이른바 신흥경제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다 수익률이 떨어지기 시작한 1997년 일제히 이 지역을 떠나면서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금융자본은 미국의 IT버블을, 그 뒤엔 주택부동산버블을 일으켰다. 결과는 2008년 8월 세계 금융위기였다. 이즈음 거품 해소에 따른 달러화 가치 하락을 우려한 금융계 큰손들이 석유, 곡물, 광물 등 현물자산으로 대거 투자처를 옮기면서 세계 원자재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곡물가격의 급등이 중동 자스민 혁명의 원인이 됐다. 한국도 영향을 받았다.

"IMF조차 자본 규제를 권한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투기자본이 대중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잘 알겠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규제할 방법이 있을까.

장하준 : 단기 이익만 노리고 들어오는 자본은 규제해야 한다. 이미 많은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다. 예치금 제도라는게 있다. 외국인이 투자를 하러 들어올 때 갖고 오는 돈의 일정한 비용을 중앙은행에 예치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정해진 기한 이내에 갖고 나가면 예치금을 못 받는다. 너무 단기적인 투자는 못 들어오게 막자는 거다. 또 외국인 자본거래 이득에 대해, 특히 국채거래를 통한 이득에 세금을 걷는 나라가 많이 새겼다. 외국 금융기관 역시 외환 관계 파생상품거래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과거엔 이런 정책을 주장하면 IMF가 핏대를 올리며 반대했다. 그런데 요즘은 IMF마저 달라졌다. 후진국에는 이런 규제 정책을 권한다. 그만큼 국제유동자본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세계적인 추세, 이른바 '대세'를 핑계 삼는 이들이 많다. 과거엔 금융자유화가 세계적인 추세라며 반대 주장을 억눌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대세'가 바뀌었다. 그러자 '대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편리한 때만 '대세'를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들은 리먼브러더스가 망하기 직전까지도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대세'를 따르는 길이라는 게다. 만약 당시 그들의 주장을 따랏다면 어떻게 됐을까. 후유증이 막심했을 게다. 자본통제,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는 우리도 해야 한다.

"주주 이익만 생각하는 은행, 부동산 거품 키웠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부동산 시장이 급등한 현상도 금융자본주의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하준 : 1998년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가 영미식 시장 개혁을 추진하면서 은행과 제2금융권이 주택 대출과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대폭 늘렸다. 저성장·저투자 기조 속에서 생긴 집값 상승과 부동산 투기는 금융시장의 유동성 공급 과잉 때문으로 봐야 한다. 고도성장기의 집값 상승과는 다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유화됐다가 다시 민영화된 은행들은 주주 중시 경영의 대명사가 됐다. 그 결과, 은행들은 단기 수익에 골몰하게 됐고 손쉬운 돈벌이인 주택 대출을 늘리게 됐다. 이렇게 늘어난 유동성이 부동산 거품을 키웠다. 개별 은행들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주택이라는 확실한 담보가 있으니, 위험도 적다. 하지만 경제 전체로는 해롭다. 케인스가 말한 '구성의 오류'가 바로 이런 경우다.

프레시안 :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같은 맥락에서 재벌 해체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예컨대 삼성그룹의 순환출자구조가 깨지면, 삼성 계열사가 국제투기자본의 사냥감이 될 거라는 주장이다. 재벌의 변칙적인 지배구조를 비판해 왔던 개혁 진영의 주장과 충돌하는 대목인데….

장하준 :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이건희 회장은 우리가 정체를 아니까 그나마 낫다. 집 앞에서 데모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얼굴도 모르고, 어떻게 돈을 마련했는지도 모르는 투기자본에 대해선 저항하고 통제할 길이 없다. 삼성이 과거 사카린 밀수했다고 비난을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이 해체 됐을 때 새로운 주인이 될 자본이 꼭 깨끗하리라는 법은 없다. 마약 거래를 했는지, 무기를 팔았는지 어떻게 알 건가.

과거 재벌과의 대타협을 주장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재벌의 최대 관심사는 경영권 보장이다. 그걸 해주고, 대신 다른 부분에서 양보를 받자는 거다.

스웨덴의 거대 기업집단을 거느린 발렌베리 가문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건 이들 가문 구성원이 남달리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등의결권 제도를 통해 오너 일가에게 경영권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대신, 거대 기업집단이 국민경제에 순기능을 하게끔 강제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주주들의 천국인 미국에도 차등의결권이 도입된 경우가 많다. 포드자동차가 대표적인 사례다. 총수 일가가 보유한 A주와 그렇지 않은 B주가 있는데, M&A 등 중요한 결정에선 B주 보유자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해도 소용이 없다. A주 보유자들 과반수가 동의해야만 한다. 나라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기업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대부분 있다. 독일의 경우, 노동자 이사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공장 매각, M&A 등의 결정은 노조의 동의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무런 경영권 보호 장치가 없다. 주식만 사들이면 누구든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순환출자 같은 방식으로 경영권을 보호한 것이다. 유독 우리나라 재벌만 사악해서 선진국은 상상도 못한 경영권 보호 방법을 고안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업지배구조의 모범, GM은 왜 망했을까?"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경영권을 뺏길 수 있다는 위험이 경영자를 긴장하게 하는 면도 있지 않나. 또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되면 경영 투명성이 강화되리라는 기대도 있다.

장하준 : 구체적인 현실을 봐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대기업의 주주 배당률이 대폭 뛰어올랐다. 그래야만 주가를 높게 유지할 수 있고, 기업 사냥꾼들로부터 기업을 보호할 수 있다. 배당률이 높다는 건, 기업에 투자할 몫은 줄어든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익보다 더 많이 배당한 경우도 있다. 기업 사냥꾼인 칼 아이칸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KT&G의 경우, 2005년 주주 이익 환원율이 156퍼센트다. 이익을 다 퍼주고도 모자라서 내부 유보금까지 꺼내야 했다. 주주들에겐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전체 경제로서도 좋은 일일까. 아니라고 본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미래를 대비한 투자를 해야 한다. 연구개발에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직원 교육에도 돈을 써야 한다. 연구개발은 당장은 돈이 안 된다. 실패 위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에선 이게 쉽지 않다.

좋은 예가 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했던 GM이다. 1955년 미국 자동차 생산량이 700만대였는데, 그 중 350만대를 GM이 생산했다. 지금 자동차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에선 모두 합쳐서 연 7만대를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일본의 도요타가 1등이 되고 GM은 계속 쪼그라들다 파산할 것이라고 했다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게다. 하지만 자체 기술 개발에 소홀하고, 필요한 기술은 사들이는 방식으로 유지하던 GM은 결국 몰락했다. 이런 GM이 기업지배구조라는 면에선 최고 모범생이었다. 대주주가 없고 사외이사는 많다. 주주이익도 듬뿍 챙겨줬다. 반면, 포드는 지배구조가 정말 나쁜 회사다. 창업주 가족이 이사회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지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GM은 망하고 포드는 살아남았다. 지금 잘나가는 삼성전자라고 해서 GM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주주 이익만 생각하면, 연구개발 투자할 이유 없다"

핵심은 대다수 주주들은 기업의 미래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평균적으로 주식을 보유하는 기간은 계속 짧아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눈앞의 비용 절감을 환영한다. 그러다보니 기업은 연구개발 투자에 소홀해지고, 당장 수익이 안 나는 사업은 포기하게 된다. 또 끊임없이 정규직을 줄이려 들고, 협력업체를 쥐어짠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주주들이 좋아하니까. 비정규직 확대, 협력업체의 몰락 등 최근 주목받는 쟁점들도 주주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국내에선 KT가 좋은 사례다. KT는 기업 지배구조의 모범 사례로 종종 꼽힌다. 다른 재벌 기업처럼 전횡을 부리는 대주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경영 투명성도 높다. 하지만 국민경제에 실제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칭찬하기 어렵다. 민영화 이후, 정규직이 대대적으로 잘려나갔다. 그들이 불필요한 인력이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잘려나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다시 고용됐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반면, 주주들에 대한 배당률은 매우 높다. 이사들 보수 역시 크게 뛰었다. 결국 다수 노동자는 울고, 주주와 경영진만 웃었다는 말이다. 또 주주 배당률이 높아지면서 연구개발 투자 역시 위축됐다. 이걸 왜 모범사례로 봐야하나.

내가 인터뷰할 때마다 드는 사례인데, 외환위기 이후 이공계가 주저앉고 의대 인기가 폭등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예전에는 대기업에서 핵심 업무를 담당한 이들은 미래를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영방식이 자리 잡은 지금은 달라졌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면, 누구든 고용이 불안해졌다. 회사 생활이 과거보다 훨씬 팍팍해졌다. 회사원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으로 젊은이들이 몰리는 게 당연하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복지는 '공동구매'다"

프레시안 : 최근 복지 담론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임계치에 달했다.

장하준 : 복지가 바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다. 사회적 약자에게만 복지를 제공하는, 미국식 잔여적 복지에는 미래가 없다. 잔여적 복지는 비용을 부담하는 측과 혜택을 입는 측이 서로 다른 방식이다. 부자들에게서 거둔 돈으로 가난한 이들이 굶어죽지는 않게끔 하자는 것이다. 부자들 입장에선 자신들과 전혀 무관한 일에 돈을 써야 하는 셈인데, 당연히 돈을 덜 쓰게끔 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넣게 된다. 이런 압력이 쌓일수록 복지 규모는 줄어들게 된다. 결국 보편적 복지가 답이다. 모든 사람이 복지 혜택을 누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이 비용을 대야 한다. 이처럼 수혜자와 돈 내는 사람이 일치해야만 지속 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비용 문제를 들고 나온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복지 예산은 내버리는 돈이 아니다. 일종의 공동구매 개념으로 봐야 한다. 수요가 많은 상품을 구매할 때 공동구매를 하면 싸게 살 수 있다. 예컨대 무상의료가 이뤄지는 나라에선 약값이 싸다. 정부가 공동구매를 하기 때문이다. 이걸 시민 각자가 따로 산다면, 결국 낭비다. 의료, 교육, 보육, 노후 대비 등 누구에게나 필요한 서비스를 공동구매하는 것. 그게 복지다. 그리고 그걸 위해 돈을 갹출하자는 게 복지 강화 주장이다.

복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하면, 산업간 인력이동도 쉽다. 부실산업에서 퇴출된 인력이 생계 걱정 없이 새로운 산업이 요구하는 기술과 지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들이 경제 위기 속에서도 안정적인 성장을 한다.

복지 강화가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한·미 FTA, 한·EU FTA 때문이다. 선진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취약한 분야에선 탈락자가 속출하게 된다. 이들이 재기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 안전망이 필수적이다.

"60년대에 FTA 맺었다면, 삼성은 지금도 설탕회사"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FTA에 대해 줄곧 비판적이었다. 한·미 FTA가 발효됐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폐기해야 할까.

장하준 : 당장 폐기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국제 정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다만, 한·미 FTA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한·EU FTA 역시 문제다.

선진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한다는 건 제조업 육성을 지금 수준에서 동결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 1960년대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고 가정해보자.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지금처럼 세계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을까. 아마 삼성은 지금까지도 설탕 사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을 게다. 국가가 전략적으로 산업을 지원하는,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있었기에 한국의 제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산업 강국은 모두 정부의 산업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다. 시장경제 논리의 본산인 미국이라고 다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인 제약 산업은 미국 보건성이 지원한 연구자금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정보통신 산업, 항공 산업 등도 마찬가지다. 미국 국방성이 지원한 연구자금이 밑거름이다. 또 국가가 전략적으로 지원한 과학기술 연구 역시 빠뜨릴 수 없다. 이런 점은 간과한 채, 정부의 산업정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이다.

"한국은 제조업 선진국 아니다…부품 소재·정밀기계 키우는 산업정책 필요"

프레시안 : 과거 한국도 강력한 산업정책을 활용했다. 박정희 정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엔 한국이 과학기술과 산업의 후진국이었다. 따라서 엘리트 관료들이 선진국으로부터 '매뉴얼'을 가져와서 재벌에게 이식하는 방식이 통했다. 국내 재벌들 역시 선진국 기업을 따라가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다. 휴대폰, 자동차, 조선 등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한국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선 과거의 산업정책, 즉 선진국 '매뉴얼'을 따라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벌 입장에선 새로 모험을 걸만한 투자처 역시 막막하다. 재벌이 빵집을 차리는 식으로 손쉬운 돈벌이에 골몰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과연 박정희 정권 시절에 통하던 산업정책이 지금도 효과가 있을까.

장하준 : 한국이 제조업 선진국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몇몇 분야만 뛰어날 뿐이다. 한국의 제조업 생산성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기술 수준 역시 뒤쳐진 분야가 많다. 예컨대 정밀기계, 부품소재, 제약 등은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이런 분야에선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또 충분히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다.

하지만 FTA 체결로 인해, 우리가 키워야 할 첨단 제조업 분야는 영원히 발전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또 한·미 FTA 체결 이후, 미국식 제도가 이식되면서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다면 설령 막대한 자금을 가진 재벌이라고 해도 장기 투자를 하기 어려워진다. 당장은 손해지만 길게 보면 이익이 될 분야에 연구개발 투자를 한다면, 당장 주주들이 반발하고 나설 게다.

"삼성생명 국유화하고 삼성전자 경영권 보장해주는 빅딜, 지지한다"

프레시안 : 앞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 보편적 복지라고 말했다. 또 재벌과의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복지 강화 주장은 개혁진영으로부터 지지를 받지만, 재벌 총수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자는 주장은 반대다.

그런데 복지 강화와 재벌 개혁이 만나는 지점도 있다. 예컨대 보험회사 문제다. 보험산업은 부실한 사회안전망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면 일반인을 상대로 한 보험업은 아무래도 위축된다. 예컨대 건강보험 보장성이 대폭 강화되면, 민간 의료보험 상품을 구매할 이유가 사라진다. 실제로 비용 대비 혜택으로 보면, 국민건강보험이 민간 의료보험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당연히 재벌 계열 보험사들은 복지 확대 주장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복지 확대 주장은 이 대목에서 재벌과 정면충돌한다. 그렇다면, 주요 보험회사를 국유화하는 게 옳지 않을까. 예컨대 삼성그룹이라면,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 삼성전자 경영권은 보장해주되 삼성생명은 국유화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특히 국내 생명보험사는 보험 계약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장하준 : 유럽 복지국가에서 대기업과의 사회적 대타협이 거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 국유화'를 포기하고 총수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복지국가 건설에 동참하라고 압박한 결과다. 국유화 자체도 꼭 나쁘게만 볼 게 아니다. 투기자본에게 기업을 넘기는 방식의 재벌개혁보다는 차라리 재벌 기업 국유화가 낫다고 본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국민을 대표해서 재벌을 통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삼성생명 국유화와 삼성전자 경영권을 맞바꾸는 빅딜, 나도 지지한다. 이런 식의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총수 일가를 몰아내는데 그치는 개혁은,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뉴스를 보는 잠깐 동안만 즐겁게 해줄 뿐이다. 그 뒤엔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 기다린다. 이젠 발상을 바꿀 때다. 시장 논리,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강화해서 재벌을 개혁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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