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좋고, 노동자도 좋은 복지, 왜 미뤄?

[대담] 장하준ㆍ정승일ㆍ장화식, 복지국가 대담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다시 한국을 찾았다. 어느새 장하준은 주목할 만한 이름이 됐다. 어떤 진영에도 포함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경제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에게 진보도, 보수도 손을 내민다. 동시에 진보도, 보수도 불편해한다.

12일 저녁 7시 서울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대담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비단 장 교수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날 대담에서 장 교수와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장화식 투기자본감시센터 정책위원장은 보수언론, 재벌은 물론 진보진영, 386세대들에게도 때로 자유롭게 날카로운 감시의 칼날을 들이밀었다.

이들은 우리 사회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왜 복지국가 건설이 필요한지 등의 주제를 놓고 두 시간가량 청중들을 휘어잡았다.

이날 대담을 주제별로 정리했다. 이번 대담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투기자본감시센터,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가 주최했다.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사회를 봤다.

▲대담 참가자들. 왼쪽부터 장화식 투기자본감시센터 정책위원장,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이종태 <시사IN>기자,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복지는 성장을 돕는다

장 교수는 이른바 '복지 포퓰리즘' 공격에 대해 역공을 가했다. 복지를 강화해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이다. 무한 경쟁이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받들어 온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근거는 이렇다.

복지 시스템이 가장 잘 갖춰진 나라로 평가받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은, 복지를 통해 국민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다.

장 교수는 대표적 사례로 스웨덴을 들었다. 장 교수에 따르면 스웨덴의 경우, 다른 도시에 일자리가 생겨서 이사를 급하게 가야 하는 사람에게 정부가 임시로 돈을 빌려준다. 일단 그 돈으로 집을 산 후, 기존의 집이 팔리고 나면 천천히 정부에 빚을 갚으면 된다.

장 교수는 "이런 제도로 국민들이 생활하며 겪을 수 있는 불안함이 줄어든다"며 "자연히 사람들은 더 진취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의사결정에 큰 제약을 가하는 '위험'에 대한 고려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반대 사례로 한국의 의대 편중현상을 꼽았다. 사람들이 불안하니,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보이는 의대에 몰리고 공대는 기근에 시달린다는 얘기다. 대출을 끼고서라도 집을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불안해서다. 이처럼 국민들이 가진 불안감을 정부가 보편화된 복지서비스로 해결해준다면, 사회는 더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근거가 있나? 통계가 증명한다. 장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이 복지병에 시달리지 않아 잘 성장한다고 알려졌다. 잘못된 믿음이다. 통계를 보면, 미국이 소위 말하는 '제2의 르네상스'를 맞았다던 지난 20년만 봐도 핀란드와 스웨덴의 경제성장률이 미국보다 더 크다."

그런데 이는 사실 우리도 일부 행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기업을 보호하는 파산법을 생각해보면 된다. 기업이 망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은 기업을 채권자에게서 보호한다. 그래야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시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미국의 챕터11은 채권자가 6개월간은 파산 기업의 자산 중 단 한 푼도 권리행사를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이는 망한 기업을 돕는 제도다. 기업에만 적용하는 제도를 사람에게도 적용하면 복지가 된다.

주식투자는 복지국가에 거는 딴지

장 교수에 이어 정승일 연구위원이 청중에게 말을 걸었다. 정 연구위원은 기업지배구조를 연구해 왔고, 올해 6월부터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이 제시한 주제 역시 낯선 이야기다. 주식투자, 펀드투자는 복지국가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것. 이는 외환위기 이후 지속된 금융산업 발전에 거는 태클이고,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금융허브국가 발전전략에 대한 비토다.

정 연구위원은 '소액주주'에 대한 해석부터 새로이 했다. 실제 소액주주(Minority Shareholder)들은 엄청난 거액을 펀드를 이용해 분산투자한 갑부들인데, 국내에서는 사회정의 구현자, 경제민주화 투사처럼 잘못 이해됐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비판하는 론스타 등 투기성 펀드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투자열풍은 결국 기업을 공격한다. 기업이 내는 이익이 주주 이익을 위해 배당금으로 쓰이고,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사주매각에 사용된다. 이로 인해 기업의 재투자가 어려워지고, 그 결과 여러분(노동자)의 일자리가 날아가고, 하도급단가가 깎인다."

정 연구위원의 말은 한편으로 보면 '기업에 대한 보호'로 읽힐 수 있다. 그렇다면, 재벌을 보호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실제 장 교수와 정 연구위원은 복지국가로의 이행을 위해 대기업과 타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우리 사회에 논쟁거리를 안겨주기도 했다. 정 연구위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대우자동차 패망 과정에 대한 박사논문을 쓸 당시는 한국의 외환위기가 재벌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년의 역사를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주식시장을 띄우기 위해 대우자동차를 매각해야 한다는 여론이 굉장히 강했다. 매각할 필요가 없는 회사였다. 쌍용그룹을 깨서 쌍용자동차를 매각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금융시장이 회복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못된 재벌기업을 해체하면 주가가 올라가고, 재벌 개혁하고, 경제민주화도 한다는 논리였다. 386세대들이 이에 앞장섰다.

그 결과 어떻게 됐나. 기업에서 해방된 (재벌을 포함한) 자본가들은 번 돈을 다시 주식시장에 투자하는데 쓴다. 기업 발전의 기본인 연구개발(R&D) 투자가 안 이뤄진다. 지금 국내 쉐보레(대우차)가 연구개발을 하나? 전혀 안 한다. 연료전지 등 최신기술은 모두 미국에 있다. 명백한 잘못이다."


복지국가가 갈등 해결 '핵심'

그런데 최근의 한국 경제 상황을 만든 주범이 과연 주식투자 열풍, 그리고 이를 주도한 386들뿐인가. 재벌가는 온갖 탈법·편법으로 부를 대물림한다. 재벌이 늘리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고, 투자에 나서지 않는 현실을 도외시하면서 재벌과 대타협을 하는 게 가능할까.

정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에서 재벌은 가장 힘이 센 집단이다. 그러나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집단이기도 하다. 복지국가는 세금으로 이뤄진다. 재벌의 힘을 빼면서 그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고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타협이 별다른 의미가 아니다. 이마트가 들어온다면 들어오도록 하고, 대신 법인세를 제대로 내게 하면 된다. 그 세금으로 무상급식을 하고, 대학생들 등록금 재원을 마련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화식 정책위원장이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 현재 한국의 역학구도 상으로는 재벌과의 대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것.

"외환위기 이후 재벌이 투기자본에 당하면서, 한편으로는 투기자본에게서 배운 점도 많다. 재벌이 투기자본화됐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지배구조를 바꾸고, 사회적인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다. 지금 재벌이 사회적으로 대타협할 이유가 있나. 노동자와 농민의 힘을 강화하지 않는 한 재벌과의 대타협, 이를 통한 복지국가 건설은 불가능하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장하준 교수는 결국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괄타결이 유일한 방법이고, 이 일괄타결이 바로 '복지국가 건설'이라고 설명했다. 재벌에 대한 규제와 타협, 골목상인과 노동자에 대한 보호장치 등이 말 그대로 사회적 '타협'으로 동시에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낳을 수밖에 없다. 기업에게서 세금을 걷자고 그들의 활동을 제약 없이 보장하면, 소상공인이 죽는다. 기업의 자유로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지만, 대량실직으로 노동자가 죽어나간다.

"누구나 보편적 복지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 나라에서는 이런 마찰이 적다. 바로 옆에 대형마트가 들어와 망한 피자집은 다시 재기할 자금과 교육을 나라에서 받도록 해야 한다. 무턱대고 기업의 진출을 제한하는 방식, 무턱대고 기업의 활동만 보장하는 방식이 아닌 복지국가 방식으로 갈등 비용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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