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교수는 <민주화 20년, 경제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87년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왜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는가를 화두로 던지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정치사회적 민주주의와 경제민주주의의 원리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가 지난 20년 간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불안해진 이유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경제 민주화'는 더 퇴보했다면서 특히 재벌정책이 잘못된 경제민주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경제민주주의를 내세워 주주권을 강화해 재벌의 경영권 세습이 위협받게 되었지만, 주주권 강화는 민주주의의 '1인 1표'의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1원 1표'의 논리에 기초한 것으로,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1원1표'의 시장주의 원리가 극단적으로 관철되면, 결국 우리나라는 돈을 많이 가진 국제금융자본의 뜻대로 개조될 수 밖에 없다면서, 서로 반목하는 집단들이 시장원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일정 정도 시장의 논리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미래, 특히 보통 사람들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재벌을 비호하는 논리라는 비난에 대해 "우리 자본이 외국자본보다 더 도덕적, 혹은 덜 도덕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면서 "재벌문제를 도덕성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과거사까지 들추면 '깨끗한' 자본은 거의 없기 때문에 도덕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하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면서 "재벌 문제를 탈세나 주주권 보호라는 좁은 시각이 아니라 국민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음은 장 교수의 강연 요지다. <편집자>
"1원1표를 경제민주주의로 착각"
장하준 교수는 지난 20년 간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불안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이유가 정치사회적 민주주의와 경제민주주의의 원리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의 경제 현실을 이렇게 진단했다. 자본 자유화로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자본 지배가 증가하고, 주식시장의 '단기주의'가 상장된 대기업뿐이 아니라 상장되지 않은 중소기업들에게까지 숨통을 죄고 있다.
대기업조차 투자를 꺼리는 현실에서 일자리도 잘 생기지 않고, 기업들이 단기 이윤을 높이는데 주력하게 되면서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도 비정규적의 비율이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비정규직 비율이 OECD 최고 수준으로 솟아올랐다.
이에 더해, '사오정', '오륙도'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정규직도 고용이 전에 없이 불안해졌다. 고용이 불안해지니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자제하고 저축을 늘리면서 이것이 내수부진으로 이어져 투자의욕을 더 꺾는 악순환 기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복지제도 역시 국제적 기준으로 보아 창피한 수준에 머물러 사회 관념적으로는 민주화 전보다도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덜 한 '잔인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민주화 이후에 도리어, 시장이 아무리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와도 정치권력이 독재적으로 강제한 일이 아니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장주의적 논리가 더 심하게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경제 민주화'는 더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는 장 교수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졌다는 역설적인 결과는 우리 민주화 과정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재정권이 경제분야에서는 지극히 개입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이고 심지어는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서구의 경우 민주주의를 원하는 세력들이 정부 개입의 확대를 외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 민주화의 두 번째 역사적 특수성은 그것이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기세를 떨치는 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같은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이 여러 가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해결책이 별 성찰 없이 '정답' 내지는 최소한 '대세'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재벌정책의 변화에서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민주주의를 내세워 주주권을 강화해 재벌의 경영권 세습이 위협받게 되었지만, 주주권 강화는 민주주의의 '1인 1표'의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1원 1표'의 논리에 기초한 것으로,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장 교수의 주장이다.
게다가 종업원, 지역사회, 하청업체, 국민 전체 등 기업의 주주를 제외한 다른 이해당사자 집단들은 아예 '투표권'이 없는 것은 경제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 교수는 "재벌문제가 진정으로 민주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려면, 경영에 주주 뿐 아니라 여타 이해당사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문제,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어떤 재벌 정책이 대다수 국민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가 우리 논의의 초점이 되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벌 문제를 도덕성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장 교수는 '1원1표'의 시장주의 원리가 극단적으로 관철되면, 결국 우리나라는 돈을 많이 가진 국제금융자본의 뜻대로 개조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서로 반목하는 집단들이 시장원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일정 정도 시장의 논리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미래, 특히 보통 사람들의 미래는 암울하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현재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한 축에는 아직도 우리경제의 핵심부를 아직도 장악하고 있는 재벌 그룹들이 서고, 다른 한 축에는 '국민들'로 요약되는 그 외의 여러 집단들이 서야 할 것이다. 물론 더 노동운동이 발달한 나라라면 '다른 축'의 주체는 노조가 되겠지만, 노조의 조직률도 매우 낮고 노조의 정당성도 약한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그것은 정치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장 교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대타협의 기본적인 줄기는 재벌들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고 그 대가로 국민들이 더 적극적인 투자, 고용창출, 노사관계에 대한 전향적 접근, 그리고 복지국가를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 더 단순화시켜 이야기하자면 재벌의 경영권 보호와 복지국가를 맞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대타협의 한 가지 예로서 장 교수는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그룹구조가 와해될 우려가 있는 재벌기업에 국민연금이나 국영은행들이 '국민 주주'로 참여해 일단 그룹 구조를 유지해 주면서 재벌 2세, 3세들에게 (단기주의 경영을 막기 위해) 10년 내지 15년 동안 정도 유예기간을 주고, 그 기간이 지났을 때 경영성과가 안 좋다면 그들을 경영에서 손을 떼게 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재벌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는 과정에서 최근 복지국가 소사이어티가 주장한 대로 콘쩨른법을 만들어, 현재 법적 실체가 없는 재벌그룹의 권한과 의무를 명확히 해 주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장 교수에 따르면 이렇게 되면 재벌들은 적대적 인수합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그룹구조를 유지하면서 장기적 시각에서 경영을 할 수 있고, 2세, 3세의 경영능력을 검증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재벌기업들이 더 장기적인 투자를 하고, 고용을 창출하고, 하청기업을 덜 쥐어짜는 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해진다.
물론 이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해진다고 재벌들이 꼭 그렇게 행동한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경영권을 보장해 주는 과정에서 명시적인 사회적 협약을 통해 투자, 고용창출, 노사관계 개선, 하청기업 지원, 복지국가 건설 등에 관해 재벌들의 의무를 명시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재벌을 비호하는 논리라는 비난에 대해 "우리 자본이 외국자본보다 더 도덕적, 혹은 덜 도덕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면서 "재벌문제를 도덕성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과거사까지 들추면 '깨끗한' 자본은 거의 없다. 따라서 도덕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하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벌 문제를 탈세나 주주권 보호라는 좁은 시각이 아니라 국민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국민 보험 개념의 복지국가 건설하자"
그는 재벌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는 대가 중 핵심은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면서 미국식으로 최저선 이하로 떨어지는 사람만 도와주는 '사회적 안전망' 개념의 선별적 복지국가가 아니라 유럽식으로 '모두가 참여하는' 복지국가 모델을 제시했다.
모든 사람이 육아, 교육, 여가 등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를 공유하며, 모든 사람이 질병, 실업, 노령화 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인식하에서, 모든 사람이 능력이 있을 때 돈을 모았다가 필요할 때 찾아 쓰는 '전국민 보험'의 개념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은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장애인 등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도움을 받는 등 어느 정도의 재분배 요소는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미국식으로 잘 사는 사람에게 돈을 걷어 못 사는 사람을 도와주는 체제가 되면 중류층 이상에서 구조적인 반복지주의를 조장하게 되어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다.
그는 또 "효율적인 복지국가는 적극적인 개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브레이크가 있기에 속력을 내어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것처럼, 안전장치가 있을 때 개인들도 직업과 시장개방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서 "복지국가를 통해 고용불안이 해소되면 인적자원 배분의 왜곡이 많이 시정되어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실현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장 교수는 "우리나라가 하루 아침에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집단 간의 대립과 갈등도 우리나라만큼 겪은 나라들이 많다"면서 핀란드와 스웨덴을 예로 들었다.
핀란드는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에서 독립하면서 좌우내전을 치르고 정치적으로 두 쪽이 났던 나라이다. 스웨덴은 1920년대에는 세계에서 파업률이 제일 높았을 정도로 노사갈등이 심했던 나라이다. 삼성보다 훨씬 큰 발렌베리 재벌 때문에 재벌 문제도 우리나라보다 더 심각했던 나라이다.
장 교수는 "역사적 조건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고르는 것"이라며 사회적 대타협의 가능성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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