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언론 '스토커식 보도'로 황우석 스타 만들기에만 치중"**
시민과학센터의 김명진 운영위원(서울시립대 강사)은 6월말 발간 예정인 <시민과학>(제54호)에 기고한 '황우석 교수 언론보도의 문제점'이라는 글에서 "이번 황 교수 연구에 대한 언론보도는 일반인들이 이 연구의 내용이나 그것이 지닌 함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국내 언론들은 외신에 대한 선별적 인용을 통해 해당 연구의 장ㆍ단점과 윤리적 함의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곧장 '열광 모드'로 돌입해, 이후의 논의 구도를 협소화하고 왜곡시킨 측면이 크다"고 비판했다.
김명진 운영위원은 "우선 언론들이 황우석 교수 '스타' 만들기에 치중해 이 연구의 실제 모습을 일반인에게 왜곡된 모습으로 전달했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국내 언론은 발표 첫날(20일)에만 연구의 내용과 그것이 내포하는 함의에 대해 피상적으로 보도했을 뿐, 이후에는 거의 황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스토킹'하다시피하면서 황 교수 '스타' 만들기에 치중했다"며 "특히 황 교수의 연구를 "중대한 진전" 내지 "혁명"으로 그려낸 경제지 중심의 외신의 보도를 주로 인용하면서 이 연구의 윤리적 함의에 주목한 외신의 후속 보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은 "이런 언론의 보도 태도는 단기적으로 보면 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이공계 위기'를 타개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극적 성취 신드롬과 스타 과학자에 대한 강조는 국가 전체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구조를 왜곡하고 비인기 분양의 현장 과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단기적인 부양을 통해 얻었던 이익을 훨씬 넘어서는 피해를 과학계에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선별적 외신 인용, 서구 과학자의 황 교수 '찬사' 진짜 이유에는 침묵"**
김명진 위원은 또 국내 언론이 황 교수 연구에 대한 외신의 보도를 선별적으로 인용해 피상적 보도로 일관한 점도 조목조목 지적했다.
김 위원은 "국내언론은 황 교수 연구에 대해서 서구 과학자들이 '난치병 치료를 향한 중대한 진전'이라고 찬사를 쏟아낸 사실을 보도했지만,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찬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망설여지는데 국내 언론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김 위원은 "우선 황 교수의 연구에 대한 서구 과학자들의 '칭송'은 윤리 문제로 인간배아 복제 연구를 강하게 규제하고 있는 자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의 일환으로 한번 '꺾어' 듣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와 같은 지적은 이미 수차례 각종 인터넷 토론 게시판에서도 나온 적이 있는데 국내 언론에서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태도는 이라크전 파병 등으로 손상당한 민족적 자부심을 다시 세우는 데는 보탬이 될지 몰라도 황 교수의 연구가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은 또 "황 교수 자신도 언론을 통해 수차례 언급했듯이 줄기세포 유도 그 자체만으로는 난치병을 고칠 수 없다"며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서구 과학자들이 황 교수 연구에 열광한 이유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당장의 질병 치료 가능성보다 다른 곳에 있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서구 과학자들은 유전병 환자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줄기세포를 만들어냄으로써 특정 유전병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몸 밖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크게 주목한 것이지, 국내언론의 보도처럼 난치병 치료가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열광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황 교수 연구 유전병 환자에게 적용 한계 많아"**
한편 김명진 위원은 "국내 언론은 황 교수 연구의 한계와 그 속에 내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도 극히 인색해 이 연구에 대해 일반인들은 균형 잡힌 보도를 접할 기회를 봉쇄당했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서구 언론 대부분이 지적한 황 교수 연구의 한계에 대해 국내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며 "단적인 예로 황 교수 연구를 유전병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에는 중대한 한계가 있는데 국내 언론은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환자 본인의 체세포를 이용해 만든 줄기세포는 유전병을 일으키는 바로 그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 변형 과정을 거쳐 정상 유전자를 주입한 후에야 비로소 질병 치료에 쓸 수 있다. 이 때문에 서구 언론은 이를 또 하나의 장벽으로 보도했었다.
김 위원은 이어서 "사실 사고로 인한 척수마비 같은 '후천적' 환자들에 대해서는 현재 임상시험 2상에 진입해 있는 성체 줄기세포 연구가 훨씬 더 앞서가고 있다"며 이 역시 언론보도에서 배제당한 사실을 지적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유전병 환자에게 황 교수 연구를 바로 적용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면 오히려 성체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 환자들에게는 더 희망적일 수 있다.
***"한국 국제적인 난자 공급소로 전락할지도 모르는데…"**
이밖에 논란이 됐던 난자 공여 문제에 대해서도 김 위원은 "몇몇 언론사들이 발표 당일 <사이언스>에 황 교수 논문과 나란히 실린 논평을 인용해 난자 공여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제기를 기사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다음날 황 교수가 인공 난자 연구에 들어가겠다고 발표하자 문제 제기가 쑥 들어가고 말았다"며 "도대체 그 발표를 기사화한 기자들이 인공 난자라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언제쯤 가능한지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의 자문이라도 한번 구해 보았는지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그는 "줄기세포의 '역' 분화를 이용한 (인공) 난자의 유도는 줄기세포의 분화를 이용한 특정 장기세포의 유도만큼 어려운 일"이라며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이 인공 난자의 생산이 이루어질 때까지 난자 공여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외국의 여러 저명 대학들에서 황 교수에게 공동 연구 수행을 제안해 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공동 연구에 들어가는 수백, 수천 개의 난자는 상대적으로 난자 공여에 대한 규제가 미약한 한국에서 얻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그러면 한국이 국제적인 난자 공급소의 역할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점에 주목한 국내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널뛰기식 보도, 황 교수에게 부메랑이 될 수도"**
김명진 위원은 과학사회학자 넬킨을 인용해 "언론들은 '획기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극적 성취"니 "혁명"이니 하며 호들갑을 떨다가 애초 약속이 실현되지 않으면 이내 "그림의 떡"이었다는 둥, "일장춘몽"이었다는 둥 태도를 바꾸는 널뛰기식 보도를 한다"며 "이런 보도가 반복되면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마치 정치인을 대하듯이 비슷한 냉소와 무관심을 보일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황 교수의 연구로 빠른 시일 내에 유전병 난치병 환자에 대한 치료법이 개발된다면 이는 분명히 희소식이 될 것이지만 만약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런 약속을 내놓은 과학계에 대한 환멸로 탈바꿈해 부메랑처럼 돌아올 지도 모른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줄기세포 연구가 제공해줄 수 있는 혜택에 대한 기대치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맞추고 이에 근거해 해당 연구의 가능성과 한계, 문제점을 냉정하게 짚어볼 수 있는 논의의 장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지지는 불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열광이나 막연한 반감이 아니라 해당 연구의 장ㆍ단점에 대한 이해와 숙고로부터만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시민과학>에 실릴 김명진 운영위원의 글 전문.
***황우석 교수 언론보도의 문제점**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일반인들의 삶 깊숙이까지 침투해 있다. 사람들의 생활은 과학기술의 산물에 크게 의존하고,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일상에서의 선택(유전자변형식품을 먹어도 되는지, 자외선 차단크림을 발라야 하는지, 집 주위에 소각장이 들어서는 것에 반대할 것인지 등등)에도 과학기술과 관련된 판단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 내지 국가 전체의 정책(어떤 부문에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것인지, 상이한 정책목표들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등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판단은 깊숙이 관여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의 일반인들(정치인 같은 정책결정자들도 포함해서)은 그러한 판단을 위해 필요한 과학기술 정보를 얻는 데 있어 직접적인 경험이나 공식 교육보다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과학언론의 역할에 크게 의존한다. 많은 경우 과학언론은 사실상 유일하다시피 한 정보의 원천으로 군림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전달하고 그것이 미칠 수 있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 짚어주는 과학언론의 역할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좋은' 과학언론은 특정한 쟁점에 관해 균형잡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일반인들이 그런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나쁜' 과학언론은 해당 쟁점에 관해 편향된 이해나 이해불가능의 느낌만을 제공해 일반인들의 판단을 저해하는 까닭이다.
지난 달 20일에 사이언스 인터넷판과 런던에서의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된 황우석 교수의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는 발표 즉시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그러한 관심은 보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서구 과학계의 주목을 한몸에 모은 황우석 교수는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었고, 정치인들은 경쟁적으로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지원과 노벨상 수상 로비에 나설 것을 다짐하고 있으며, 언론사들은 황우석 교수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적 사항까지 남김없이 알아내 보도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면 앞에서 언급한 과학언론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번 연구에 대한 언론보도는 일반인들이 황우석 교수의 연구의 내용이나 그것이 지닌 함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주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행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특히 초기의 보도에서 국내 언론들은 외신 보도에 대한 선별적 인용을 통해 해당 연구의 장ㆍ단점과 윤리적 함의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곧장 '열광 모드'로 돌입했고, 그럼으로써 이후의 논의 구도를 협소화시키고 왜곡시킨 측면이 크다.
***황우석 교수 '스타' 만들기**
일찍이 과학사회학자 도로시 넬킨은 언론에서의 과학기술 보도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저서 Selling Science: How the Press Covers Science and Technology(1995)에서 과학언론의 속성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그녀는 과학언론이 정작 중요한 과학 연구의 구체적 내용이나 그것이 갖는 윤리적ㆍ사회적 함의는 간과한 채 언제나 극적 성취(breakthrough)나 "혁명"에 관심을 가지며, 개별 과학자들을 '스타'로 그려내려는 강한 경향성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이러한 경향이 일반인들의 과학 인식에 중대한 함의를 내포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극적 성취에 초점을 맞추면 과학의 연속적ㆍ누적적 성격이 왜곡되어 과학자들로 하여금 언론을 겨냥한 '한탕주의' 연구에 집중하게 만들기 쉬우며, '스타 과학자'에 초점을 맞추면 그 사람 개인의 '천재성'에만 집중해 테크니션, 원재료 제공자, 포스트닥(post-doc), 박사과정 학생 등으로 구성되는 과학 연구의 실제 구조가 일반인들에게 왜곡된 모습으로 전달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번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둘러싼 언론보도 역시 넬킨의 연구에서 지적된 언론보도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언론은 발표 첫날(20일)에만 연구의 내용과 그것이 내포하는 함의에 대해 피상적으로 보도했을 뿐, 이후에는 거의 전적으로 황우석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스토킹'하다시피 하면서 황우석 교수 '스타' 만들기에 치중했다. 또한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중대한 진전" 내지 "혁명"으로 그려낸 외신(특히 경제지)의 보도를 주로 인용하면서 이 연구의 윤리적 함의에 주목한 후속 보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고, 최근 인기있는 분야의 연구자들을 "제2의 황우석"으로 추켜세움으로써 오히려 '극적 성취 신드롬'을 부채질하는 데 한몫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방향은 단기적으로 보면 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최근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이공계 위기'를 타개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극적 성취 신드롬과 스타 과학자에 대한 강조는 국가 전체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구조를 왜곡하고 비인기 분야의 현장 과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단기적인 부양을 통해 얻었던 이익을 훨씬 넘어서는 피해를 과학계에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연구 내용에 대한 피상적 보도**
앞서 필자는 국내 언론이 초기에 연구의 내용과 그 함의에 대해 피상적인 보도만을 했고, 이를 통해 이후의 논의 구도를 제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쓴 바 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황우석 교수의 이번 연구는 환자 자신의 체세포 핵으로 치환한 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유도해 낸 것으로, 과학자들이 실제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한을 앞당겨 해당 기법을 '완성'시켰다. (난자 공여와 복제 배아의 파괴에 얽힌 윤리적 쟁점들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 이는 분명 줄기세포 연구에서 의미있는 일보전진이라 할 만하다. 이에 대해 서구(주로 미국과 영국) 과학자들은 "난치병 치료를 향한 중대한 진전"이라며 일제히 찬사를 쏟아내었는데, 사실 우리가 이번 연구를 보면서 으쓱한 기분을 갖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구 과학자들(전설적인 이언 윌머트까지!)이 한국 과학자에 대해 그런 찬사를 바치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이던가.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찬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지는데, 국내 언론들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먼저 서구에서의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맥락에서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의미하는 바를 고려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주지하다시피 서구의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연구 목적의 배아 파괴에 얽힌 윤리적 우려 때문에 강한 규제를 받고 있다(배아복제를 명시적으로 허용한 나라는 영국과 우리나라뿐이며,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은 시험관수정 과정에서 남은 잔여 배아를 이용한 연구에도 제약을 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황우석 교수(<네이처 메디신>은 올 4월호에 실린 기사에서 황 교수가 서구 과학자들에게는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쓰고 있다)의 연구가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하나의 '정치적 지렛대'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따라서 황 교수의 연구에 대한 서구 과학자들의 '칭송'은 자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修辭)의 일환으로 한 번 '꺾어' 듣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지적은 이미 수차례 각종 인터넷 토론 게시판에서 나온 적이 있는데 주류 언론에서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오히려 '황우석 쓰나미'가 부시를 덮쳤다는 식의 선정주의적인 보도로 일관했다. 이런 식의 보도는 이라크전 파병 등으로 손상당한 민족적 자부심을 다시 세우는 데는 혹 보탬이 될지 몰라도 황 교수의 연구가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리고 둘째로, 황우석 교수 연구의 어떤 측면에 서구 과학자들이 열광했는가를 좀더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황 교수 자신도 언론을 통해 수 차례 언급했지만, 줄기세포의 유도 그 자체만으로는 난치병을 고칠 수 없다. 그것으로부터 우리 몸의 여러 장기들로 분화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며, 이는 매우 지난한 과제가 될 것이다(5월 25일자의 <네이처> 보도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장기 분화가 실용화되려면 수 년 이상이 걸릴 것이고("years away"), 아예 그런 가능성이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쓰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서구 과학자들이 열광한 이유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당장의 질병 치료 가능성보다 딴 곳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유전병 환자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줄기세포를 만들어냄으로써 특정 유전병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몸 밖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유전병의 메커니즘을 좀더 잘 이해하는 데에는 분명 큰 도움이 되는 발전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는 국내 언론의 보도처럼 난치병 치료가 눈앞으로 다가왔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울러 국내 언론은 황우석 교수 연구의 한계와 그 속에 내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있어서도 극히 인색했다. 단적인 예로, 황 교수의 연구를 유전병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중대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환자 본인의 체세포 핵으로 치환해 만든 줄기세포는 유전병을 일으킨 바로 그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변형 과정을 거쳐 정상 유전자를 주입한 이후에야 질병 치료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줄기세포에 대한 유전자변형은 DNA 재조합 과정에 내포된 불확실성과 맞물려 그 자체로 새로운 윤리적ㆍ기술적 쟁점을 제기하며, 따라서 이를 실제 치료에 쓰기 위해서는 또하나의 장벽을 넘지 않으면 안된다(그리고 사실 사고로 인한 척수마비 같은 '후천적' 환자들에 대해서는 현재 임상시험 2상에 진입해 있는 성체 줄기세포 연구가 훨씬 더 앞서가고 있다). 그러나 서구 언론 대부분이 언급한 이 한계에 대해 국내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난자 공여 문제에 대해서는 또 어떤가? 연합뉴스를 비롯한 몇몇 언론사들이 발표 당일에 <사이언스> 인터넷판에 황 교수의 논문과 나란히 실린 밀드레드 초의 논평을 인용해 난자 공여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제기를 기사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 다음날 황 교수가 '줄기세포의 역분화'를 이용한 인공 난자 연구에 들어가겠다고 발표하자 문제제기가 쑥 들어가고 말았다. 필자는 그 발표를 기사화한 사람들이 과연 인공 난자라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언제쯤 가능한지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의 자문을 한번 구해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상식적인 선에서 보자면, 줄기세포의 '역'분화를 이용한 난자의 유도는 줄기세포의 분화를 이용한 특정 장기세포의 유도만큼 어려운 일일 듯싶다. 그렇다면 언제가 될지 모를 인공 난자의 생산이 이루어질 때까지 난자 공여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황 교수는 외국의 여러 저명한 대학들에서 공동연구 수행을 제안해 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공동연구에 들어가는 수백, 수천 개의 난자는 상대적으로 난자 공여에 대한 규제가 미약한 한국에서 얻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한국이 국제적인 난자 공급소의 역할로 전락하게 되는 것은 혹 아닐까? 이는 설사 황 교수의 주장대로 자발적 난자 공여자가 줄을 선다고 해도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인데도 이런 점에 주목한 국내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국내 언론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서구 과학자들이 열광한 이유와 맥락, 황 교수의 연구가 가진 한계와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황 교수의 연구를 이해한 후 제대로 된 이유에서 지지 내지 반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했다고 판단내릴 수밖에 없다.
***널뛰기식 보도, 그것이 몰고올 역풍**
앞서 소개한 넬킨은 '획기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언론이 "극적 성취"니 "혁명"이니 하면서 당장에라도 큰일이 생길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 애초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으면 이내 "그림의 떡"이었다는 둥, "일장춘몽"이었다는 둥 하면서 태도를 180도 바꾸는 널뛰기식 보도 행태를 비판한 바 있다. 이런 보도 행태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정치인들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한 냉소와 무관심을 나타내 보이게 되는데, 이는 과학기술이 현대사회에서 갖는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넬킨의 지적은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황우석 교수는 올해부터 동물실험에 들어가고 빠르면 내년 말부터 사람에 대한 임상시험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빠른 시일 내에 유전성 난치병 환자에 대한 치료법이 개발된다면 ― 난자 공여와 연구를 위한 배아 파괴 문제에 관해 충분한 사회적 숙의가 이루어진다는 걸 전제로 해야겠지만 ― 이는 분명 희소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일부 과학자들의 우려처럼 줄기세포로부터 장기를 유도하는 과정을 실용화하는 것이 난망한 과제임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풀려진 기대가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을 내놓은 과학계에 대한 환멸로 탈바꿈해 부메랑처럼 돌아오지는 않을까?
지금 필요한 것은 줄기세포 연구가 제공해줄 수 있는 혜택에 대한 기대치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맞추고 이에 근거해 해당 연구의 가능성과 한계, 문제점을 냉정하게 짚어볼 수 있는 논의의 장을 복원하는 것이다. 황 교수의 연구를 "기적의 치료법"으로 떠받들거나 "악마의 기술"이라며 비난하는 것은 어느 쪽이건 바람직한 사회적 논의과정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지지는 불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열광이나 막연한 반감이 아니라 해당 연구의 장ㆍ단점에 대한 이해와 숙고로부터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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