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균실 탈을 쓴 독성 공장, IBM이 빼앗아간 한 가장의 삶

[한국 밖 클린룸에선] 미국 IBM 산재 사망 피해자 유족 얀 패터슨 "남편이 다시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2018년 반올림과 연대하던 미디어뻐꾹(필명) 활동가가 미국 내 전자산업 산업재해 피해자를 만났다. 반올림이 이들의 증언을 정리해 차례로 공개한다. IBM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피해 노동자의 유족 얀 패터슨(Jan Patterson)의 구술을 세번째 글로 싣는다.

타자기와 복사기를 고치는 일

남편은 해군에 있었어요. 제대한 뒤에 남편의 매부가 IBM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고객지원 엔지니어(customer engineer)로 근무하고 있었죠. 그때 마침 제 오빠가 큰 사고를 당했어요. 남편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IBM에 채용됐지만, 저희는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어야 하는 사정을 회사에 설명했죠. 그래서 IBM에서 산호세 지사 면접을 볼 수 있도록 주선해줬고, 남편은 그곳에서 고객지원 엔지니어로 채용됐어요. 1974년 5월의 일이었어요. 남편은 타자기를 수리하는 일을 맡으면서 IBM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처음 타자기를 수리할 때는 현장에서 일했어요. 저 아래 팔로알토 같은 곳까지 이리저리 운전해서 다니며 타자기를 고쳤죠. 그러다가 복사기 수리도 배우게 됐고, 그 뒤에는 복사기도 수리했어요. IBM 공장으로 옮겨가 실제로 클린룸에서 일하게 된 건 1979년이었어요. 하지만 고객지원 엔지니어로 현장을 돌아다닐 때도 이미 여러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있었어요.

타자기와 복사기를 닦을 때 사용하는 세척제가 있었어요. 남편이 직접 보여줬는데, 그 화학약품을 타자기에 그냥 들이붓고는 송풍기로 불어서 말리더라고요. 그런데 장갑도 없었어요. 그 화학약품이 묻은 걸레들을 따로 담아둘 용기도 없었고요. 그러니 그런 걸레들이 남편이 하루 종일 운전하는 동안 차 안에 있었던 거죠. 아마 차 안에는 그 화학약품 냄새가 가득했을 거예요.

남편은 해군에 있을 때 전자장비에 관한 교육을 모두 받았어요. 그리고 IBM에 들어가서는 어떤 일을 맡든 아주 잘했죠. 그때는 회사에 개선 제안을 하면 포상을 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남편도 그런 상을 몇 번 받았어요. IBM 일로 해외도 조금 다녀왔고요. 독일에도 갔고 일본에도 갔어요. 회사가 여러 생산시설과 업무를 해외로 이전할 때였는데, 그 전환 작업을 돕는 일을 했어요.

남편은 IBM에서 30년 정도 일하고 퇴직한 것 같아요. 아마 2005년에 퇴직했을 거예요.

▲2018년, 남편, 손주와 찍은 사진을 옆에 두고 인터뷰하는 얀 패터슨 ⓒ미디어뻐꾹

겉보기에는 무균실 같은 환경

저도 공장에 가본 적이 있어요. 남편이 저희를 클린룸 안으로 데려가서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줬죠. 마치 작은 우주선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방진복이며 이것저것 다 갖춰 입어야 했고요. 아무것도 함부로 만질 수도 없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무균실 같은 환경이었는데, 냄새만큼은 무균실 같지 않았어요.

마치 미래에서 온 공간 같았어요. 안에는 캡슐 같은 장비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들도 볼 수 있었죠. 그런데 장비 하나하나가 아마 여기 이 카펫 정도의 크기였어요. 작업하는 사람들은 방진복을 입고 그런 작은 작업 공간 안으로 들어가 일을 해야 했죠.

남편은 IBM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회사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때는 훨씬 더 좋은 회사였고, 직원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회사라고 말하곤 했죠. 직원들이 회사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해줬다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에 대한 그런 존중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어요. 남편 말로는 회사는 점점 돈 버는 데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였는데, 마지막에는 그저 철저하게 비즈니스만 하는 회사가 되어버렸다는 거죠.

사람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

남편은 계단만 올라가도 숨이 차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흉강에 물이 차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심장을 휘감고 있는 종양이 발견됐어요. 그때 남편 나이가 마흔여섯 이었을 거예요. 병리 보고서에도 이 종양은 아주 특이한 형태로 나타난 사례라고 적혀 있었어요. 수술은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죠.

남편은 1996년에 병이 생겼어요. 아픈 동안에는 꼬박 1년을 쉬었고, 그 기간에는 전혀 일을 할 수 없었어요. 어쩌면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회사는 남편이 아픈 동안 내내 급여를 지급했어요. 상사 한 분은 병문안도 오셨고요.

사람이 그렇게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어요. 제게는 정말 그렇게 느껴졌어요. 항암치료를 받을 때마다, 어떤 치료를 받을 때마다 남편은 점점 더 나빠졌어요.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고, 지금 하는 치료가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어요. 그 치료는 사람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가, 운이 좋으면 다시 살려내는 것 같았어요. 당시 남편은 생존 가능성이 50퍼센트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 저는 남편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뿐이었어요.

결국 남편은 뇌종양까지 생겼어요. 제가 뇌종양에 대해 찾아보니, 그건 1996년에 받았던 방사선 치료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종양은 가슴에 있었는데도, 암이 뇌로 전이되는 걸 막는다는 이유로 예방적 방사선 치료를 뇌에도 했거든요. 어쩌면 그 치료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생각이죠. 그때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방사선 치료를) 하지 않는 선택이 정말 가능했을지는요. 암이라는 말이 너무 두려우니까, 의사들이 권하는 건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게 바로 그들이 권했던 치료였으니까요.

▲비어 있는 병실 침대. 창밖으로는 도시 야경과 함께 IBM 건물이 보인다. ⓒ박정원

그 사람에 대해 나쁜 점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처음에는 그저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받아들이기도 어려웠고,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죠. 하지만 어느 시점에 남편도 왜 자신에게 난데없이 이런 일이 생겼는지 점점 더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투병 중간부터는 그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해졌어요.

남편은 늘 이런 말을 했어요. 병 때문에 받은 치료와 그 모든 과정이 자기 수명을 적어도 10년은 단축시킨 것 같다고요. 그리고 지금 저는 그때 회사가 한 일 때문에 암이 생겼고, 결국 그 암이 4년 전 남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우리가 결혼한 지 42년이 되었을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

저희에게는 아이가 넷 있어요.

우리 모두가 지금도 남편을 그리워해요.

남편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었어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었죠.

항상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고,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나쁜 점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누가 부탁하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이었어요.

직장에서도 모두에게 사랑받았어요. 일을 정말 잘했고, 자기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늘 훌륭하게 해냈죠.

저는 이제 우리가 함께 일궈온 삶을 살아가야 할 시점에 와 있는데, 정작 그 삶은 제게 없어요. 남편이 제 삶 그 자체였거든요. 이제 저는 남편 없이 남은 인생을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남편이 제 곁에 다시 있을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아래 링크에서 영어 구술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sharps.or.kr/english/?bmode=view&idx=172862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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