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체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 전략

[전쟁국가 미국·3강-②] 한국전쟁과 미국의 반공군사주의

1951년 9월 8일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단독 강화를 통해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한편 미일 군사동맹을 공식화 한다.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이날 체결된 두 개의 조약에서 명명된 것이다. 하나는 2차 대전 때 맞서 싸웠던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평화조약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 양자 간 안보조약으로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일본 및 인근 지역에 군사력을 보유할" 권리를 허용했으며,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촉구했다. 두 개의 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됐으며 이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이로써 일종의 동아시아 안보체제가 형성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나 이는 항구적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자간 평화조약은 일본과 미국 및 미국의 우방국들 간의 평화를 약속한 것인 반면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을 미국의 군사기지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일 미군기지는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의 공산세력과의 군사 대결을 위한 것이었다. 즉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의 우방국에게는 평화를 약속한 것이었지만, 공산 적대세력에게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는 일본 군국주의 침략의 최대 희생자인 남북한과 중국, 대만이 초대받지 못했다. 즉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전쟁 책임에 대한 단죄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러한 역사 청산의 부재, 그리고 이에 따른 영토분쟁은 오늘날 동아시아 불화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소련은 평화협상에는 참여했으나 조인을 거부했다. 일본의 미군 기지화에 반대해서다. 한편 인도는 초대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에 의한, 미국만을 위한 일방적 동아시아 안보체제인 셈이다.

화려한 평화조약, 초라한 미일 안보조약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의 화려한 오페라하우스에서 미국 등 48개국 대표가 모여 평화조약 조인식을 가졌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됐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미 육군 제6군 기지 내의 부사관 클럽이었다. 제6군은 필리핀 등에서 일본군과 싸운 뒤 전후 일본을 점령한 군대다. 안보조약의 미국 측 서명자는 애치슨 국무장관과 덜레스 평화협상 대표, 그리고 2명의 상원의원 등 4명인 반면 일본 측은 요시다 시게루 총리 단 한 명뿐이었다.

▲ 1951년 9월 8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미 국무부

국가 간의 조약 체결식에 이런 불균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점령군 기지 내의 장교 클럽도 아닌 부사관 클럽에서 체결식을 갖는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1946년 외무차관을 역임한 데라사키 타로는 "너무나 인상적이지 않은가? 부사관 클럽에서 안보조약에 서명한 것은 요시다 일행과 일본 국민에게 패전국의 처량한 신세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는 1941년 12월 미일 개전 당시 외무성 미주국장으로 미국과의 전쟁에 적극 반대했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자주노선을 견지했던 외교관이다.

사실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동아시아의 평화가 아니었다. 일본을 대소 군사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미국 측 협상 대표로 일본을 방문한 존 포스터 델레스는 1951년 1월 26일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어떻게 확보하는가”가 근본문제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목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체결 이후인 1952년 2월 28일 조인되고 4월 28일 발효된 미일 행정협정에 의해 달성된다. 기존 미군기지의 계속 사용, 미군 관계자에 대한 일본 법 적용 배제(치외법권) 등 점령 기간 중 미군의 기존 권리를 거의 대부분 인정한 것이었다. 사실 독립국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를 조약으로 정할 경우 의회나 국민의 반발이 예상됐으므로 비밀 행정협정의 형태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데라사키 타로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일본이 편입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평화조약, 안보조약, 행정협정 순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순서가 거꾸로 이루어진 것이다. 미일 행정협정을 위한 안보조약이었고 안보조약을 위한 평화조약이었다. (중략) 즉 당초 목적은 맨 나중의 행정협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미군의 무제한 주둔을 허용하는 행정협정이 핵심이며 안보조약과 평화조약은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미 군사력의 해외 발진기지

미국 역사가 존 다우어에 따르면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 보호는 세 번째 이유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의 전략가들에게 주일 미군을 유지하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시아 본토 및 러시아에 대한 미 군사력의 해외 발진기지로서의 역할. 둘째,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는 일본이 보다 자율적이 되거나 군사주의로 치달을 경우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이러한 주장은 미국 등 서방측에서 일본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던 1950년대, 그리고 미·중 관계가 정상화된 1970년대에 자주 제기됐다). 셋째, 미군의 일본 주둔을 옹호하는 이유로 제기하는 것으로 (1951년 안보조약 1항에 있는 대로) 주일 미군이 '극동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며 외부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안보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주일 미군기지의 가장 중요한 쓰임새는 일본 외에서 진행되는 미군의 전투 임무를 지원하는 것이다. 주일 미군기지는 6.25전쟁 당시 북한에 대한 공습의 핵심 발진기지였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1965년부터 1972년 사이에 일본의 미군기지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에 대한 치명적 공습의 발진기지로 이용됐고", "특히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2001년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위한 지원기지로(폭격을 위한 발진기지로는 이용되지 않았으나) 이용됐다”고 말한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적들과의) 전쟁을 위한 체제였던 셈이다.

분리된 평화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의한 평화는 '분리된 평화(separate peace)'였다. 당연히 강화협상에 참여했어야 할 국가들이 배제됐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의 공산 정권은 물론이고 대만으로 망명한 국민당 정권도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에 초대받지 못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중국은 일본의 침략과 점령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입은 핵심 당사자라는 점에서 이는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도 배제됐다. 한반도 주민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와 징병, 징용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데도 말이다. 한편 소련은 강화협상에 참여했지만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 중국 공산 정권이 강화협상에서 배제된 것, 그리고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자국의 냉전 전략에 활용한 것 등이 그 이유였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단독 강화라 부르는 이유다.

결국 이처럼 주요 당사국들이 배제된 '분리된 평화'는 일본을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들인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떼어놓는 배제적 시스템의 단초가 됐다.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 수개월 동안 미국은 일본에 대해 대만의 국민당 정권과 별도의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그리하여 국민당 정권을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사실상 인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요구를 듣지 않을 경우 미 의회가 평화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 이 협박이 통하지 않자 미국은 미군의 일본 점령이 무기한 계속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초 경제적 이유 때문에 공산 중국과의 수교를 원했던 일본은 1951년 12월 24일의 저 유명한 '요시다 각서'를 통해 결국 이를 포기한다(이 각서는 요시다가 덜레스에게 보낸 것으로 돼있지만 실상은 덜레스가 써준 것이다). 1952년 4월 28일 일본은 대만 국민당 정권과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민족 자결의 부정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 당시 일본은 중국, 소련과도 평화조약을 맺고 비무장 중도노선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고 미국에 점령된 상태에서 이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결국 중국 공산 정권의 배제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의 독립과 미국의 안보 보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는 일본의 외교 주도권 상실이었다.

1954년 12월 요시다 총리가 퇴진하고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한다. 요시다 퇴진의 가장 큰 이유는 재무장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3일 맥아더는 요시다 총리에게 경찰예비대 7만 5000명, 해상보안청 요원 8000명의 증원을 허락했다. 실상은 재군비 요구였다. 그러나 요시다에게 군사력은 뒷전이었다. 경제 재건이 우선이었다. 헌법 9조를 앞세워 안보는 미국에 맡긴다는 속셈이었다.

1953년 닉슨 부통령은 일본의 전쟁 금지를 규정한 헌법 9조는 '명백한 실수(an honest mistake)'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후로도 미국은 일본에 대해 끊임없이 군사적 공헌을 요구하고 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일본은 13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대고도 미국으로부터 '전투 병력을 보내라(Show me the flag)'는 핀잔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하토야마는 1946년 4월 10일 점령 후 최초의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내각 구성을 앞둔 5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공직 추방 명령으로 정계를 떠나야 했다. 총리 직은 요시다 시게루에게 넘겨주었다. 요시다가 대미 협조, 경군비(輕軍費), 경제 중시인 반면 하토야마는 자주외교, 자주헌법, 자주방위라는 대조적 입장을 취했다. 하토야마가 1946년 공직 추방을 당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토야마 내각은 나름 독자적인 외교안보 노선을 추구한다. 예컨대 1955년 7월 미국에 대해 놀라운 요청을 한다. 2010년에 밝혀진 외교문서에 의하면 1955년 7월 하토야마 내각은 기존 안보조약 대신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상호방위조약'의 시안을 작성해 미국에 교섭을 요청했다. '서태평양'에서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고, 일본이 방위력을 증강하는 한편, 미 지상군을 6년 내 철수하며 해군과 공군도 지상군 철수 이후 6년 안에 철수하기 위한 교섭을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은 8월 29-31일 워싱턴을 방문해 덜레스 국무장관과 교섭을 벌였으나 덜레스는 진지하게 교섭할 시기가 아니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1956년 10월 19일, 하토야마 내각은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유엔 가입에 성공한다. 소련이 기존의 반대 의사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평화조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당시 양국은 문제의 북방 4개 섬을 각기 2개씩 나눠 갖는 방안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이는 사실 합리적 방안이었다. 왜냐하면 소련의 대일 참전을 확정한 얄타 회담, 그리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도 북방 4개 섬 중 쿠릴열도에 속하는 에토로후와 구나시리는 소련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홋카이도에 속하는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회복하는 것으로 평화조약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북방영토의 일부라도 소련에 양보한다면 오키나와를 미국령으로 만들 것이라고 위협해 평화조약을 무산시켰다. 나아가 덜레스는 구나시리와 에토로후가 소련에 넘어간다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국은 일본과의 조약을 모두 부정할 것이라고 압박을 가했다. 결국 소련(러시아)과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평화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방해와 압력은 미국 자신이 주창해온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본과의 예속적 군사동맹이 미국에게는 사활적 국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2009년 9월 총리에 오른 그의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는 우애의 정치를 내세우며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창했으나 취임 9개월만인 2010년 6월 실각한다. 오키나와현 헤노코에 있는 미군 기지를 현 바깥으로 옮기려던 계획이 미국의 반발을 초래한 때문이다. 특히 그의 실각은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사태로 남북한, 미중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때 일어났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미일 군사동맹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연합뉴스

영토분쟁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정적 유산 중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영토분쟁이다.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이 영토분쟁은 "무관심이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부로 영토 분쟁의 소지들을 조약 곳곳에 심어 놓았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을 위한 미국의 초기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49년 12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입장을 바꿨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경 미국의 초안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모두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애매하게 언급했으며, 일본의 영토 범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되기 한 달 전인 1951년 8월,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 2010년 이후 중국과 일본 간에 분쟁이 격화되고 있는 댜오위다오(센가쿠열도) 문제도 마찬가지다.

과거사 청산

또한 미흡한 과거사 청산도 동아시아의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맺음으로써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다. 중국과 일본은 1972년 9월 29일의 공동성명을 통해 국교를 회복했으며, 1978년 8월 12일이 돼서야 평화 및 우호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동아시아 화해 및 평화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일본 점령으로 한 편의 일본과 다른 편의 중국 및 한국이 서로 멀어지게 된 것이 가져온 장기적 결과는 매우 유해한 것이었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서의 서독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거나 지역공동체를 이룩할 수 없었다. 평화 만들기가 지연됐던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침략, 그리고 착취가 낳은 쓰라린 상처와 뼈아픈 유산들은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됐다.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처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문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표면상 독립국가가 된 일본은 자신의 안보와 국가로서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태평양 너머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종속국가 일본

문제는 최근 들어 미중 간에 무역 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이 미국에 대한 '종속국가'라는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동아시아와 세계는 커다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미-일-중 동아시아 3강 체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과 중국이 확실한 자주 국가인 반면 일본은 (미국에) "예속된 독립국가”라는 점이다. 냉전 초기 중국은 소련의 괴뢰로 인식된 반면 일본은 자유세계 미국의 동맹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중국은 분명한 자주 국가가 자리 잡은 반면 일본은 여전히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예속적 독립국가로 뒤처져 있다.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피후견국가인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미국이라는 '전쟁기계'의 부속품이 되는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미국이라는 전쟁기계는 특정 시점과 특정 지역에서 평화를 지키기는 했으나 이와는 반대로 자원을 낭비하고, 군비경쟁을 촉발시킨 것은 물론, '핵무기' 선제공격을 위협하고, 학살을 자행하며(민간인 살해나 고문 행위 등),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엄청난 파괴와 피해를 낳았다. 피후견국가 일본은 미국의 덜 군사적이기는 하지만 근시안적이고 소모적인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야 했다. 또한 피후견국가라는 지위는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유연한 정책을 택하거나, 대국적인 정책을 취할 모든 가능성을 가로막았다".

결국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획득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의 군사주의 정책을 추종할 수밖에 없는 신세인 것이다.

■ 참고

1. 존 다우어, '동아시아의 불화, 그 근원은 미국'

2. The San Francisco System: Past, Present, Future in U.S.-Japan-China Relation, John W. D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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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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