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벌판에 놀라 울음 터뜨린 조선 선비

[최재천의 책갈피] <조선 선비의 중국견문록>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여기서부터 산해관까지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가는 비구름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 (호곡장론(好哭場論))

연암 박지원에게 요동벌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나"오는, 갓난아기의 울음이었다. 드넓은 광야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감동의 울음이었다.

담헌 홍대용은 "바다를 보지 않거나 (바다와 같은) 요의 들판을 건너보지 않고서는, 땅이 둥글다는 이야기를 마침내 하지 못할 것"이라 기록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담헌은 요동벌처럼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보면서 이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조선 선비들이 본 중국은 어떠했을까. 김민호 교수가 연행록과 표해록을 뒤져, <조선 선비의 중국견문록>으로 정리하고 해석했다.

조선 사절단이 북경을 방문하는 목적 중 하나가 서적 구입이었다. 명나라 때 어느 문인은 조선인들의 책 구매 열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인은 책을 가장 좋아한다. 사신의 입공은 50인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옛 책 또는 새 책, 혹은 패관소설로 조선에 없는 것들을 날마다 시장에 나가 각각 서목을 베껴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두루 물어보고 비싼 값을 아끼지 않고 구입해 간다."

일례로 소동파는 고려 사신이 서적을 대량 구입해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건의까지 올린 적도 있다.

명청 시기 조선 사신들은 마음대로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중국의 관금(館禁) 정책 때문이었다.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중국 관리들이 와서 숙소 문을 잠그고 봉인하곤 했다. 1805년 북경을 방문했던 이시원은 이렇게 읊었다. "겹문을 닫아 걸어 조선관을 폐쇄하니 / 온종일 사람 없어 잠 생각만 몽롱하다. / 중국의 장사치들 아침부터 모여들어 / 물건들 파느라고 여기저기 시끄럽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즐거웠다. 사실 얼마나 낯설고 불편했겠는가. 그래서 중국 국경을 벗어나는 것을 박사호는 "마치 새장을 벗어난 새와도 같은 느낌"이라 적었다. "한 산모롱이를 돌아 지나가니, 의주성이 널리 벌여 있고, 통군정이 성 머리에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일행의 상하가 일제히 소리를 내어 마치 고향을 본 것 같이 외치며 기뻐하였다."

▲ <조선 선비의 중국견문록>(김민호 지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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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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