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2의 서부' 동아시아로 진격하다

[전쟁국가 미국·1강-③] 스페인전쟁과 '문호 개방' 정책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12월 5일부터 오는 3월 13일까지 총 8회에 걸쳐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립니다. 아래 글은 지난 12월 5일에 진행됐던 1강 강연을 정리한 세 번째 강의록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전편 보러 가기 : 1. 미국은 왜 전쟁을 하는가? 2.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한다. 2차 산업혁명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는 생산 과잉에 의한 공황을 낳았다. 이로 인해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고 미국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했다.

미국의 선택은 해외 시장 확대였다. 1898년 스페인전쟁을 통해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하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하와이도 합병했다. 이후 미국은 카리브해 지역을 자신의 경제 영역으로 통합하는 한편 하와이, 필리핀을 발판으로 중국 시장 진출을 모색한다.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이다. 이후 '문호 개방'은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원칙이 된다.

미국의 비약적 산업화

남북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864년 5월 6일, 윌리엄 헨리 세워드(William Henry Seward) 국무장관은 마드리드 공사에게 미국은 "이미 충분한 영토를 갖고 있다"면서 더 이상의 "정복"을 원치 않는다고 선언했다. 300년 간의 영토 팽창이 종말을 맞고 미국 역사는 기술적, 상업적 팽창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한다. (1870년 통일을 완수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 독일과 함께 2차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로 나선다.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이 주도했다. 주로 개인 사업자들이 석탄과 증기기관을 이용해 최초의 산업화를 이룩했다. 1870년대 이후로는 미국과 독일 주도로 석유와 전기, 철도와 내연기관, 그리고 화학공업 등에 의한 2차 산업혁명이 진행된다.

1869년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다. 1880년대부터는 법인기업이 나타나 경제 운용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존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 대표적이다. 1870년대 에디슨의 개인연구소였던 곳이 1901년에는 제네럴 일렉트릭(GE)이라는 거대 회사로 변모한다. 록펠러를 비롯해 앤드류 카네기(철강), J. P. 모건(금융, 철강, 전기) 등 미국 자본주의의 거인들이 모두 이때 등장한다(자동차의 헨리 포드는 20세기 초).

남북전쟁 직전만 하더라도 미국에는 제철공장이 없었다. 석유는 이제 막(1859년) 발견된 상태였다. 당시까지 미국은 농산품을 주로 수출하던 농업국가였다. 그러나 40년 뒤가 되면 미국은 철강과 석유산업에서 세계 최고가 된다. 1902년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영국과 독일을 합친 것보다 많아진다.

건국 이후 무역 적자국이었던 미국은 이 산업혁명에 힘입어 1874년부터 무역 흑자국으로 전환하고, 이 기조는 1971년까지 100년 간(1875, 1888, 1893년은 적자) 이어진다. 세계 교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68년 6%에서 1913년 11%로 거의 2배가 된다. 증가분은 거의 모두 공산품이었다.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한 것이다. 1870년에서 1910년 사이 미국 인구는 2배로 늘어난다.

제국의 시대

그러나 2차 산업혁명에 의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생산의 과잉을 불러왔다. 생산 과잉은 공황을 초래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 열강들은 생사를 건 시장 쟁탈전을 벌였다. 자국의 상품을 독점적으로 소비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한 것이다. 1870년에서 1900년 사이 영국의 영토 확장은 자그마치 123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프랑스는 906만, 독일도 259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1878년 유럽 열강과 식민지가 차지한 면적은 지구 전체의 67%였고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는 84%로 늘어난다. 근대사 4부작을 쓴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1875~1914년을 '제국의 시대'로 명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열강이 독점적 해외 시장 확보를 위해 각축전을 벌인 시기다.

미국은 생산 과잉이라는 전 지구적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을까? 미국 역시 1873년과 1893년 공황의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1893년 5월 시작된 불황은 1898년까지 5년간 계속됐으며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1893년 첫 해에만 은행 500개와 기업 1만 5000개가 문을 닫았고 1894년의 실업자 수는 400만에 이르렀다. 한 미국 언론은 "이토록 사람 목숨이 값싼 적은 없었다"고 개탄했다.

경제 위기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동자와 농민들이다. 1870년대 후반 이후 철도파업을 비롯한 수많은 파업이 벌어진다. 노동절(메이데이, 5월 1일)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폭동이 1886년 일어났고, 정부와 자본가들은 군대를 동원한 폭력 진압으로 대응했다. 농민들은 농민동맹과 인민당 결성 등 정치투쟁에 나섰다.

두 번째 희생자는 군소 자본가들이다. 대형 자본에 먹히기 때문이다. 즉 경제 위기를 계기로 경제력의 집중이 심화된다. 금융력을 앞세운 이른바 머니트러스트가 등장한다. 1912년 미 하원 특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J. P. 모건을 비롯한 6개 대형 금융기관이 철강, 철도, 공익사업, 석유 등 기간산업을 독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J. P. 모건의 통제 아래 있는 기업은 자그마치 112개나 됐다. 즉 2차 산업혁명은 공황, 노동자.농민의 저항, 경제력 집중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메리카를 넘어 해외 시장으로

1893년 공황에 대한 해법은 해외 시장 개척일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든 노동자든, 정치가든 농민이든 여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나는 수출업자다. 나는 세계를 원한다." (찰스 러버링 매사추세츠 주 직물업자, 1890년)

"우리는 우리의 공산품과 농산물을 위한 우리만의 시장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생산물을 위한 해외 시장을 원한다." (윌리엄 매킨리 오하이오 주지사, 1895년 1월)

"미국의 공장은 미국인들이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의 토지는 미국인들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운명은 무엇이 우리의 정책이 돼야 할지를 정해 놓았다. 세계의 교역은 우리의 것이 돼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 1897년 4월)

이제 문제는 팽창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팽창을 할 것인가로 좁혀졌다. 미국 경제가 해외로 진출하지 못한다면 미국 사회에 혼란, 나아가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과 같은 발언이 이를 말해준다.

"우리는 매우 어두운 밤을 앞두고 있다. 상업적 번영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대중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기업인 F. L. 스테츤)

"중국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윌리엄 프라이어 상원의원)

1895년 전미제조업자협회(NAM)가 결성된다. 이 협회의 목표는 해외시장 확보였고 이를 위해'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시장 확보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1897년 시어도어 서치 위원장은 "우리 제조업자의 대부분은 국내 시장을 초과했거나 초과하고 있다. 해외 교역 확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한편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시장 확대"를 내걸고 팽창주의 성향의 후보 윌리엄 매킨리를 당선시킨다.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한과 프레데릭 잭슨 터너

이런 가운데 한 군사전략가와 역사학자가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을 옹호하고 촉구하는 이론을 내놓는다.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한(1840~1914년)과 프레데릭 잭슨 터너(1861~1932년)가 그들이다.

1890년 미 해군대학 교장 테이어는 <역사에 미치는 해군력의 영향>이라는 책을 발간해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군사전략가로서 명성을 떨친다. 그는 이 책에서 '한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을 통제하거나 해외 지역의 원자재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한 통제권을 확보하려면 강한 해군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자국의 상선단을 보호하고 비협조적인 외국으로 하여금 통상과 투자의 문호를 개방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해군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테이어는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해외 각지에 해군 운용을 위한 보급망을 갖춰야' 하며 따라서 '중미 지역에 운하를 건설하고, 카리브해든 태평양이든 통상을 하려는 지역에 해군 기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미국의 점증하는 생산력이 해외 시장을 요구한다. 미국은 해외로 팽창해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이후 테이어(군사)는 헨리 캐봇 롯지 상원의원(의회),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군부 차관보(행정부)와 함께 미국 경제의 대외 팽창을 강력히 추동하는 3인방 중 한 명이 된다.

한편 젊은 역사학자 프레데릭 잭슨 터너는 1893년, 콜럼버스 항해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역사학회 총회에서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미국 영토의 태평양 연안 확장으로 "미국 역사상 첫 시기가 마무리됐다"면서 미국에 더 이상 프런티어가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 상태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북미 대륙을 넘어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대답은 물론 끊임없는 프런티어의 확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팽창은 지난 삼백년 간 미국적 생활방식의 확고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에 백인이 정착하고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하면서 팽창은 이제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팽창의 에너지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경솔한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 그리고 카리브해 및 주변 지역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들이야말로 미국의 대외 팽창이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른바 프런티어 사관이다. 이렇게 해서 1845년 존 오설리번이 제시한 '명백한 운명'은 터너의 프런티어 사관으로 진화한다. 미국은 세계를 정복할 '명백한 운명'을 타고 났으며 이제 제2의 서부인 동아시아를 향해 프런티어를 확장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이권쟁탈전과 미국

이런 와중에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한다. 청은 일본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주었고, 타이완과 산둥반도를 빼앗겼다. 이후 산둥반도는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토해내야 했지만, 어쨌든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해외 진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우리에게 청일전쟁은 조선이 일본에 식민화되는 첫 번째 계기로 기억된다. 하지만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제활동을 벌이는 미국 등 자본주의 열강의 관심은 달랐다. 한마디로 청일전쟁은 중국을 먹이로 한 제국주의적 경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제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당시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이러한 사태는 우리의 점증하는 상업적 이익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가장 엄중한 주의를 요한다"고 우려했다.

자본주의 열강의 중국 침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897년 11월 14일 독일은 자국 선교사의 피살을 계기로 산둥반도의 교주만을 점령한다. 일본과 유럽 열강이 중국을 분할 지배할 것이라는 미국의 우려는 더욱 증폭된다. 이에 앞서 1897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해군부 차관보는 매킨리 대통령에게 "우리는 필리핀을 보유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또한 11월 오빌 플랫 하원의원은 마닐라야말로 전체 아시아 위기의 핵심이라며 마닐라 점령을 촉구한다. 마닐라는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핵심 중계항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스페인이 마닐라를 통해 중국으로 보내는 은(銀)의 규모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대중국 교역을 합친 것과 같은 정도였다고 한다.

1898년 3월 말 독일이 자오저우완(膠州灣)에 대한 99년 조차권을 확보하는 등 중국의 경제적 양보를 얻어내자 미국 기업계와 정부는 드디어 스페인과의 전쟁 방침을 굳히게 된다.

스페인전쟁과 쿠바 : 경제적 통제

왜 스페인인가? 스페인이 필리핀과 쿠바의 식민 종주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초 미국의 목표는 마닐라를 빼앗아 대중국 교역의 전초기지로 삼는 한편, 쿠바인들의 독립 쟁취로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미국 기업의 대쿠바 투자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1898년 4월 시작돼 그해 7월에 끝난 스페인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카리브해 최대의 섬인 쿠바였다. 당시 미국은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 등에 엄청난 규모의(5000만 달러) 투자를 해놓고 있었는데 쿠바인들의 독립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독립에 성공할 경우 자칫 기존의 모든 투자를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스페인에 대해 쿠바를 안정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노쇠한 제국 스페인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결국 미국이 직접 무력행사에 나서 쿠바를 '독립'시키고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하는 한편 필리핀을 식민지화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살펴보면 세계에 자유와 평화, 인권과 정의를 전파하겠다는 미국의 행태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페인전쟁 자체의 추이는 간단하다. 4월 25일 미 의회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고, 5월 1일 존 듀이 제독이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다. 스페인 병사 4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미군은 1명의 사망자만 발생했을 뿐이다. 5월 26일 미군 선발대 1만 6000명이 쿠바로 떠나 3주 후 도착, 전투가 시작됐으며 약 한 달여 만인 7월 17일 스페인 육군이 항복한다. 미군 400명이 전사했고 2000명은 부상 또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7월 22일 워싱턴에서 평화협상이 시작돼 8월 12일 백악관에서 평화의정서(protocol of peace)가 교환됨으로써 사실상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12월 10일 파리에서 정식 평화협정이 체결돼 미국은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영토로 확보한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필리핀 양보의 대가로 2000만 달러를 지급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전쟁은 미국에서 '작지만 화려한 전쟁(little splendid war)'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추악한 전쟁이 이어진다. 3년여에 걸쳐 그 뒤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1902년 7월까지 3년 반 동안의 반란진압작전으로 필리핀인 약 20만 명을 살해했고, 쿠바에서는 1903년 3월까지 회유와 압박을 동원해 미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선 쿠바의 경우를 살펴보자.

사실 1898년 기준 쿠바 독립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스페인의 철수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쿠바인들의 피어린 독립투쟁이 있었다. 쿠바인들은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한 1819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868년부터 1878년까지 10년간 독립전쟁을 벌인 데 이어 1879~80년에도 봉기했다.

특히 1895년부터는 쿠바 독립전쟁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의 주도 아래 스페인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있었다. 당시 마르티는 "쿠바의 독립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이 서인도제도를 비롯해 우리 아메리카에(중남미)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19세기 초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스페인은 반군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스페인은 미국에 대해 쿠바 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제의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한다. 내심 쿠바인에 의한 쿠바의 독립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4월 11일 매킨리 대통령이 의회에 '군사 개입' 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고, 4월 25일 의회는 선전포고를 단행한다. 당시는 매킨리는 자원병 12만 5000명 모집을 계획했는데 실제 자원자는 그 2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전쟁 열기가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참전의 의도에 대해 쿠바 혁명 세력과 미국 내 반제국주의 세력이 경계심을 표하자 팽창주의 세력은 한 가지 꼼수를 낸다. 선전포고에 대한 이른바 텔러 수정안(Teller Amendment)을 받아들인 것이다.

텔러 수정안은 콜로라도주 상원의원 헨리 텔러가 제안한 것으로 "쿠바 인민은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이며, 사태가 안정된 후 "쿠바 정부와 섬에 대한 통제를 쿠바 인민들에게 맡길 것"이라고 약속했다. 미국이 쿠바에 대한 야욕이 없음을 보증한 것이다. 4월 20일 상원은 텔러 수정안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닷새 후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막상 스페인 군이 항복하자 미국의 태도는 180도 돌변한다. 우선 7월 17일 스페인 군의 항복식에 쿠바 독립군 사령관의 참여를 거부한다. 또한 1899년 1월 1일 거행된 승전 축하 행사에도 쿠바 독립군의 참여를 막는다.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은 향후 쿠바는 "피정복 영토로서 미국은 참전국의 자격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쿠바 혁명세력의 참전 자격을 부정했다. 쿠바의 독립은 쿠바인들의 독립투쟁이 아니라 미국의 참전으로 가능했다는 억지다. 따라서 미국의 통치를 받으라는 얘기다. 또한 존 그리그스 법무장관은 쿠바 임시정부 부통령에게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미군이 주둔하는 곳은 모두 미국 주권에 따라 통치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 지도 3. 1860년대 이후 미국의 카리브해 진출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2권 p.150)

이러한 미국의 표변은 다음과 같은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정당화되고, 미국 국민들에게 선전된다. 우선 매킨리의 최측근이며 <뉴욕 트리뷴> 발행인인 화이트로 라이드는 텔러 수정안에 대해 "국가적 히스테리 상황에서나 가능한 자기 부정적 법률"이라고 폄하하면서 "미국 본토 방위를 위해 쿠바를 통제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을 열렬히 주장했던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은 텔러 수정안이 "의회가 충동적이며 잘못된 관대함에 빠져" 승인했기 때문에 구속력이 없다고 강변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에게는 잘못된 판단에 의한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의무"가 있으며 "쿠바인들이 자치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영구히 쿠바를 소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위선의 극치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군사 점령하면서 미국의 쿠바 내정 간섭을 쿠바 헌법에 보장할 것을 강요한다. 1901년 2월 27일 미 상원을 통과하고 3월 2일 매킨리 대통령이 법으로 공포한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이 그것이다. 오빌 플랫 상원의원이 제안한 이 법은 미국이 쿠바 내정에 계속 개입할 권리가 있고, 쿠바의 국가 채무 규모와 조약 체결권을 제한할 수 있으며, 관타나모만 해군기지를 미국에 영구 임대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국가 채무를 제한한 것은 차관을 빌미로 한 유럽 국가의 영향력 침투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곧 건설할(1907~1914년) 파나마운하를 동쪽에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플랫 수정안을 쿠바 헌법에 부대조항으로 삽입하지 않을 경우 쿠바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플랫 수정안은 1903년 3월 쿠바 헌법에 포함된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1934년까지 미국의 보호국으로 남게 된다. 1909-1913년에는 마군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이 쿠바 대통령이 되는 기막힌 사태도 벌어진다. 1925-1933년 쿠바를 통치한 독재자 게랄도 마차도가 하야할 당시 쿠바 내 자산의 70%가 미국인 소유였다. 1934년 미군이 쿠바를 떠난 것은 그 전 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함포외교를 포기하는 '선량한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채택한 덕택이다.

그러나 쿠바의 예속적 지위는 1959년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때까지 지속된다, 쿠바 '독립' 후 미국 기업은 쿠바의 온갖 자산을 사들여 쿠바를 미국인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사탕수수 농장 190만 에이커(약 23억 평)을 에이커(1224평) 당 20센트에 사들였으며 베들레헴 철강 등 미국 기업이 쿠바 광물자원의 80% 이상을 소유했다.

1900년 당시 미국이 쿠바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는 군정장관 레오나도 우드가 워싱턴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사람들은 내게 미국이 말하는 쿠바의 안정된 정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온다", "나는 그들에게 적절한 금리에 돈을 빌려줄 수 있고, 자본가들이 기꺼이 쿠바에 투자하려 할 때, 그때가 쿠바가 안정됐음을 의미한다고 대답해준다"고 적었다.

또한 매킨리에게 보내는 메모에서 "사람들이 내게 무엇이 안정된 정부냐고 물어오면 '6% 이자로 돈을 빌려줄 수 있을 때'라고 말해줍니다"라고 보고했다. 미국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는 것이 안정된 쿠바 정부의 역할이란 얘기다.

스페인전쟁과 필리핀 : 무력에 의한 영토 정복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제퍼슨 대통령이 '다음 목표는 쿠바'라고 할 만큼 쿠바는 미국인에게 친숙한 땅이었다. 반면 필리핀은 미지의 땅이었다. 미국인은 필리핀에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닐라항을 장악하겠다는 미국의 야욕은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다. 20만 명의 무고한 필리핀인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은 순식간에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1898년 5월 1일 조지 듀이 제독이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데 대해 한 반제국주의자는 "듀이는 마닐라를 접수하면서 부하 하나만 잃었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가 추구해온 체제는 몽땅 날아갔다"고 개탄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동남아 전문가인 스탠리 카르노는 "필리핀 합병은 미국인의 경험에서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이라면서 "역사상 최초로 미군이 해외에서 전투를 했고, 또한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 외부의 영토를 정복했으며 이전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이제 식민종주국이 됐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당초 마닐라항만을 장악하려 했다. 마닐라가 대중국 교역의 최대 중개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에서는 스페인의 300년 통치에 대항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주도하는 독립투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마닐라항을 가지려면 필리핀 전체를 정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독립세력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1898년 10월 28일 매킨리 대통령은 미군에게 필리핀 전체를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매킨리는 훗날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필리핀 문제를 놓고 몇 날 밤 고민을 하면서 백악관에서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어느 늦은 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필리핀 모두를 차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필리핀인들을 교육시켜 그들을 향상시키고(uplift) 기독교로 개종시켜라. 우리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그들을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주어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역사가에 따르면 매킨리는 "필리핀인을 전혀 몰랐다. 그들이 그토록 완강하게 저항해 비극적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완전히 오판했다." 필리핀인은 이미 300년동안 기독교도(가톨릭)였다. 또한 스페인 지배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필리핀에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매킨리의 신의 계시를 앞세운 결정은 아시아 최초의 반식민혁명에 불을 붙였다.

매킨리의 본심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착한 이웃이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에 스페인과의 파리평화조약 비준을 요청하며 "우리는 (필리핀을) 프랑스나 독일에게 넘겨줄 수 없다. 그들은 동양과의 교역에서 우리의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밑지는 장사이며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본심은 대중국 교역 확대였다.

미국의 모든 이들이 필리핀 정복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철강왕에서 평화주의자로 변모한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이 필리핀 양보의 대가로 스페인에 지급한 2000만 달러를 자신이 내고 필리핀인들에게 독립을 주겠다면서 "대통령 자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를 비판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양심적 인사들이 필리핀 정복에 반대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는 찬성이었다. 필리핀 정복을 가장 열렬히 주창한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인디애나)의 1900년 1월초 상원 연설은 이들의 속내를 잘 말해준다.

"필리핀은 영원히 우리 것입니다. (중략) 앞으로 우리 무역의 최대 거래처는 아시아가 될 것입니다. 태평양은 우리 바다입니다. 유럽은 물건을 많이 만들수록 식민지에서 소비처를 확보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생산물을 소비해줄 곳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당연히 중국이 소비처가 돼야지요.

필리핀은 우리에게 아시아 전체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기지가 됩니다. (중략)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대부분 무역 관련 분쟁이 될 겁니다. 태평양을 지배하는 힘은 따라서 세계를 지배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필리핀을 차지함으로써 그런 힘은 영원히 미국 것이 될 겁니다"

한편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 6월 12일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고, 1899년 1월 23일 헌법 제정과 함께 필리핀공화국을 수립했다. 초대 대통령은 아기날도였다. 필리핀공화국은 2월 4일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2월 6일 첫 전투가 벌어진다. 이후 3년 반 동안 잔인한 살육전이 벌어진다.

▲ 지도 4. 미국의 태평양 진출 (출처 : 월터 라페버 'The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2권 p.89)

당시 전쟁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은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니그로들을 천당으로 보내기 위해" 필리핀에 왔으며 "인디언들을 없앤 것처럼 니그로들을 소탕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의 '반란 진압'은 인디언 학살을 방불했다. 실제로 전쟁을 지휘한 미국 장군 30명 중 26명(87%)이 본토에서의 인디언전쟁 경험자였다. 사령관은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장군이었다.

'반란 진압'은 잔인했다.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리는가 하면, 어린이들까지 죽였다. 물고문도 자행했다. 필리핀 주민들에 대한 민간인 사찰도 시행됐다. 훗날 FBI, CIA, NSA 등 미 정보기관에 의한 민간인 사찰의 시작이었다.

1901년 11월 <필라델피아 레저>는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희가극에 나오는 한가한 놀이가 아니다. 우리 군인들은 무자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남자고 여자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반군 포로와 단순 체포자, 반군 활동 적극 가담자와 반군인 것으로 의심되는 자를 가리지 않고 10세 이상이면 다 죽여 버린다. 씨를 말리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필리핀 사람은 개보다 나을 것 없다는 생각까지 만연하고 있다"

팽창주의자들은 적극 반박했다. <뉴욕 월드>는 "지배하기 위해서는 정복해야 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한 섬유업자는 "우리 자신이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부터 우리는 식민지를 보유해 왔다"고 변명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을 주장해온 헨리 캐봇 로지와 앨버트 베버리지 상원의원은 '미국은 이미 인디언들을 가혹하게 다뤄왔다. 지금 필리핀인들을 대하는 것처럼'이라며 별 것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다.

1901년 3월 23일 아기날도가 미군에 생포된다. 같은 해 9월 28일 발랑기가 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사마르섬의 발랑기가 해변에서 필리핀 반군이 미군 9연대 C중대원 48명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주변 지역 1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최소 수 천명이 살해됐다. 수 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토벌대장 제이컵 스미스 대령은 "포로는 필요 없다. 죽이고 불태워라. 더 많이 죽이고 더 많이 불태우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중략) 사마르섬을 들짐승이 울부짖는 황무지로 만들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은 당시 발랑기가에서 약탈한 교회 종 3개를(이중 1개는 반군의 공격 개시 신호로 쓰였다) 117년만에 최근(2018년 12월 15일) 필리핀에 반환했다.

1902년 7월 4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 평정을 선언했다. 3년 반의 전쟁 동안 동원된 미군은 12만 6000명, 사망자는 4374명(쿠바전쟁의 10배 이상)이었다. 필리핀 반군 2만 명, 민간인 20만 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전쟁 비용 4억 달러. 그러나 진짜 비용은 독립 이후 오랜 기간 전 세계 민주주의 혁명 운동에 영감을 주어왔던 미 공화국의 타락이었다. 미국은 의미 있는 세계 변화의 적으로, 현상 유지의 수호자로 변질됐다.

하와이 합병 : 미국 최초의 해외 정권 전복


1898년 7월 7일 미국은 하와이를 50번째 주로 합병한다. 필리핀은 무력 점령하고 쿠바는 군사력을 앞세워 보호국화 한 반면 하와이는 미국이 문화적, 경제적 정복을 끝낸 다음에 합병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합병 전 이미 하와이는 백인에게 문화적, 경제적으로 정복당한 것이다.

1819년, 하와이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 들어간다. 이들은 하와이 왕족을 개신교도로 개종시키고, 그 영향력을 발판으로 장관 등 주요 정책 결정권자가 된다. 또한 사탕수수 등 하와이의 경제적 가치에 눈을 뜬 일부 선교사들은 스스로 농장주로 변신한다. 1849년이 되면 토지 거래를 가능케 하고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드는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1850년대가 되면, 미국 선교사 16개 가문이 1인당 평균 493에이커(60만 평)의 토지를 보유한 하와이 최대 지주로 성장한다. 1892년에는 미국인과 유럽인이 하와이 토지의 3분의 2를 보유한다. 하와이의 설탕 생산은 1876년에서 1885년 사이에 6배나 증가하는데 설탕농장의 3분의 2가 미국인 소유였다. 당시 미국의 한 외교관은 이들 선교사를 일컬어 "공동체의 흡혈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890년 하와이의 인구는 원주민 40,612명, 중국인과 일본인 27,391명,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노르웨이인 6,220명이었다. 미국인들은 하와이의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하와이의 투표권은 재산권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3년 1월 새로 취임한 릴리우로칼리니 여왕이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하와이에 대한 하와이인의 주권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현지 공사 조지 스티븐스와 짜고 미 해병 162명을 동원해 쿠데타로 대응한다. 쿠데타의 명분은 미국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여왕을 쫓아내고 하와이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민주혁명으로 포장했지만, 사실상 이는 미국 최초의 해외 정권 전복이었다. 그것도 하와이 경제를 장악한 민간인이 주도하고 미 정부와 군대가 후원하는 형태의 것이었다.

1894년 하와이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샌퍼드 돌이 취임한다. 이 사람은 파인애플로 유명한 회사 돌(Dole)을 만든 제임스 돌의 사촌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정부에 합병을 요청, 하와이 합병이 성사된 것이다. 돈과 이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문호 개방 정책 : 미 제국의 백년대계

미국은 스페인전쟁으로 카리브해 일대를 장악하고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중국 시장 진출은 부진했다. 무엇보다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1889년 사모아 문제로 독일과 전쟁 일보 직전에 갔을 때 미국의 해군력은 세계 12위였다. 터키, 중국보다도 뒤졌다. 1890년대 말 영국의 아시아 주둔 해군 전함은 미군 전체보다 많았다. 당시에는 해군력이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미국은 19세기 말에야 철갑 군함 건조 등 해군력 증강에 나선다.

또 미국 내에서 미국의 군사주의적, 영토주의적 팽창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력 범위(spheres of influence)'라는 이름으로 중국 영토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1899년에 영국이 그의 '세력 범위' 안에서 중국 정부에 관세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의 주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영국의 선례를 따름으로써 중국은 분할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세력 범위'를 갖지 못한 미국은 그러한 분할의 위기에 대해 불만이었다. 중국이 분할되면 미국은 중국 진출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묘안이 바로 '문호 개방 정책'이다. 미국의 우월한 생산력을 앞세워 중국 시장에 '공정하게' 접근하자는 얘기다. '공정하게' 무역을 하면 당연히 미국이 우위를 점할 것이기 때문이다. 1846년 당시 세계 최강의 산업국가였던 영국이 자유무역을 제창한 것과 같은 이치다.

1899년 9월 6일 국무장관 존 헤이는 첫 번째 '문호 개방 문서(Open Door Note)'를 발표한다. 열강의 '세력 범위'를 포함해 중국의 모든 지역에서 모든 국가에 대해 통상과 항해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1900년 7월 3일에는 두 번째 '문호 개방 문서'를 선포한다. 중국의 영토 주권 보장을 요구한다. 즉 어떤 열강도 중국, 중국 영토의 일부를 식민지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국 등 강대국은 미국의 제안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애매모호한 답변을 미국에 보내 왔다. 일본만이 분명히 반대했을 뿐이었다. 존 헤이는 모든 강대국이 미국의 제안을 수락하였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문호 개방'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하나의 선언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문호 개방 원칙을 강제할 수 없었다.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성하면서 연해주로 뻗어오는 러시아의 동진을 막아야 했다.

결국 미국은 같은 해양세력인 영국, 일본과 제국주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중국을 공동 경영하기로 한다. 1902년 영국은 일본과 동맹(영일 동맹 : 19세기 이후 영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동맹)을 맺었고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에 군자금을 대준다. 나아가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조약을 중재하고, 1905년에는 태프트-가쓰라 조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양해하기로 한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일본은 중국의 독점적 경영에 나선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이 그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독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중국 시장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 간의 갈등은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문호 개방이 현실화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다. 냉전 당시 이른바 '자유세계'에서 미국의 문호 개방 원칙이 관철된 것이다. 그리고 냉전 이후에는 전 세계가 미국의 자본에 문호 개방된다. 이른바 지구화(Globalization)가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문호 개방은 미국 경제의 세계 진출을 위한 백년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의 관세전쟁은 미국이 문호 개방 원칙에서 물러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4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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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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