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서귀포에 살던 시절 확인한 타이베이까지의 거리는 1000km다. 서울에서 타이베이까지 비행시간은 두 시간 남짓, 제주에서부터는 한 시간 반이 안 된다. 캘리포니아나 텍사스 같은 미국의 큰 주라면 같은 주에 속할 만한 거리이고, 한반도의 세로 길이인 1100km보다도 짧다. 현재 중국의 일부로 간주해 외교관계를 끊은 상태지만, 대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래로 우리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대만이 멀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1992년 중국과 수교를 위해 외교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이다. 대만이 한국에 큰 배신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사실 중국과의 수교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으로 한국은 공산권 국가들과 차례차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고, 떠오르는 거대 시장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 일본을 비롯해 주요 국가 대부분도 이미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상태였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대만인들의 반발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예정된 이별이었지만 방법과 태도가 문제였다. 노태우 정권은 임기 내 북방정책 완성이라는 성과를 위해 중국과의 수교를 서둘렀다. 중화민국의 반발로 지연되는 것을 우려해 그들을 설득하고 양해를 구하는 과정을 생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안심시키다가 한중수교 일주일 전에 발표했다. 더불어 청나라 시대부터 중국이 사용하던 명동의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사관' 건물을 72시간 안에 중국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중국과 수교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 지지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 중화민국과의 단교는 필연이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과 수교하겠다는 대한민국과 '즉시 단교'를 선언하고, 72시간 안에 비워달라는 대사관 건물을 6시간 만에 비웠다. 적성국인 중국에 넘겨줄 수 없는 서류들은 대사관 마당에 모아놓고 불태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국기를 내릴 때 대사관에 모인 직원들과 화교학교 학생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과정이 중화민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대만인들이 느낀 배신감은 컸다. 한국은 그들에게 특별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함께 맞서 싸운 전우였다. 이념으로 분단됐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외교관계를 거의 중국에 빼앗기고 남은 마지막 주요 국가가 한국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섭섭했다. 그럴 일 없다고 잡아떼다가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때린 것도 컸다. 비유하자면 '미안한 마음에 이별 통보를 미루다가, 새로운 애인과의 결혼 일주일 전에 이별을 통보한 셈'이었다. 최악의 이별이었다.
대학생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던 나도 당시 이런 내막은 전혀 알지 못했다. 정부도 언론도 국민도 한중수교에 들떠있을 뿐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은 다르다. 50대 이상 대만인이라면 이 사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유중국(自由中國)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알려졌던 한 나라는 한국인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중국과 분쟁 중인 작은 섬나라. 중소기업 중심의 컴퓨터 부품 강국. 중국 문화의 본류를 지키고 있는 나라. 한때는 가까웠던 나라. 그렇게 희미한 기억만 남았다.
이후 한국은, 늘 그래왔듯이, 폭풍 같은 변화를 겪었다.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뤘고, IMF 사태라는 국란을 거쳤다. 경제는 성장해 2000년대 초 한국의 1인당 GDP가 대만을 추월했고, 사회도 급변했다. 그동안 그 나라는 우리 관심 밖이었다. 단교 후 20년이 지난 2013년, '꽃보다 할배' 방송이 대만을 찾으면서 대만 여행 붐이 일어났고, 다시 그 나라가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 이제는 혈맹(血盟) '자유중국'이 아니라 버블티와 단수이(淡水) 카스테라의 나라,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관광지 '타이완'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대만에 철저하게 무관심했고, 지금도 큰 관심이 없다.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대만 관련 기사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분류해보자면 이렇다. 먼저 '한류'다. K팝 가수의 대만 공연이나, 한국 배우의 팬미팅, 유명 치어리더의 대만 진출 기사가 이런 경우다. 얼마 전 대만인 아내를 잃은 구준엽 씨의 소식도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재난'이다. 태풍이나 지진으로 피해를 입고, 사람이 다쳤다는 류의 기사다. TSMC라는 굴지의 반도체 회사가 삼성전자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덕분에 '경제' 기사에서 가끔 눈에 띄고, 중국의 타이완 침공에 대한 우려로 '안보' 관련 기사도 간혹 나온다. 그도 아니면 WBC 등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대만의 야구 경기가 열려야 겨우 언론에 등장하는 나라가 대만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대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 단면을 엿보기 위해 2년 전 내가 대만으로 이주를 결정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소개해보겠다.
"타일랜드는 많이 덥지 않아?"
"대만말은 할 줄 알아?"
"거기 동남아인데 좀 못살지 않나?"
이 정도는 가벼운 오해나 실수로 볼 수 있다. 대만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사는 화교(華僑)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의 화교는 '대만 사람'이 아니라, '중화민국 국적을 택한 중국인'이다. 그들은 개항 이후 혹은 중국 공산화 이후 대륙을 탈출한 중국인들이다. 대부분 산둥(山東) 지역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넜다. 대만 섬에는 가본 적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에 살기 위해서는 한국에 귀화하거나 중화민국 국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은 중국, 국적은 대만, 사는 곳은 한국이었다. 이중엔 한중수교 이후 본토와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중국 국적을 선택한 이들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대만이 싫다는 20대 청년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10년 정도 살다가 한국에 돌아온 이 친구는 반중(反中) 정서가 강했다. 중국인들은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질서를 안 지키는 사람들이고, 대만도 중국이니 싫다는 거였다. 세상에서 중국을 제일 싫어하는 나라 중 하나라는 말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 타이베이 여행을 와보고야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막상 가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중국보다는 일본에 가깝더란다.
대만은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나라다. 중국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중국말을 쓰고 있다. 해방 후 건너온 일부 대만인에게 중국 본토는 '다시 돌아가야 할 내 나라'이지만, 나머지 대부분 대만인에게 중국은 '조상이 건너온 땅' 정도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일본과 가장 친한 나라다. 미국이 중국과 핑퐁외교를 펼치면서 배신당했지만, 미국이 지켜주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나라다. 한국과는 오랜 혈맹관계가 끝났지만, 아시아 네 마리의 용 시절부터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한류에 열광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쓰이는 혐오 표현 중에 '섬짱개'라는 말이 있다. 중국이 싫으니 대만도 싫다는 어느 청년의 인식과 닿아있다. 홍콩처럼 언젠가 중국에게 먹히지 않겠느냐는 인식도 있다. '친일국가'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도 일본을 싫어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라는 인식이다. 미국이 지켜주지 않으면 한 달도 버티기 어려운 나라라는 인식도 있다. 대만에 대한 이런 다양한 인식은 결국 대만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에서 비롯됐다. 거기에 한국인의 무관심이 더해져 많은 부분이 아직 오해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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