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필리핀에서 410명의 사망자를 남긴 초강력 태풍 '라이'는 트릭시 수마바 엘(Tirxy Sumabal Elle·35) 씨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시속 160킬로미터(㎞)의 어마어마한 풍속으로 상륙했던 라이는 섬의 700여 가구의 모든 집과 재산을 한 번에 휩쓸어 갔다.
생과 사를 오가는 신변의 위협도 느꼈다. 태풍을 피하려 집 밖을 나섰던 트릭시 씨의 가족은 거센 해일이 몰고 온 바닷물이 순식간에 가슴팍까지 차올라 높은 지대를 찾아 필사적으로 헤엄쳐야 했다. 트릭시 씨는 인터뷰 도중 "여전히 마음이 힘들다"며 눈물을 흘리며 몇 차례 말을 쉬었고,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트릭시 씨는 필리핀 보홀주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섬, 바타산(Batasan) 섬 어촌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11살, 13살 두 아이를 둔 어머니이며, 남편과 함께 고기잡이배를 타고 나가 생선, 조개 등을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다. 2021년 태풍 라이의 생존자가 되면서 기후위기에 눈뜬 트릭시 씨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주민들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그린피스와 함께 필리핀 정부와 기업에 탄소배출 감축도 촉구하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처음으로 해외로 나와 필리핀의 기후위기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가 주최한 '글로벌 기후 소송 글로벌 워크숍' 자리에 강연자로 나서면서다. <프레시안>은 지난 15일 서울 용산구 그린피스 사무실에서 트릭시 씨를 만나 그의 기후재난 생존기를 들었다.

"완전한 대학살" 모든 걸 앗아 가는 기후재난
2021년 11월 필리핀 중부를 들이닥친 태풍 라이는 770만 명의 이재민, 410명의 사망자, 80명의 실종자를 남긴 대형 참사였다. 당시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주택, 병원, 학교 등의 건물이 갈가리 찢긴 것을 보고 "완전한 대학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트릭시 씨도 마찬가지였다.
"11월 15일 그날엔 가족과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어요. 우린 워낙 태풍에 익숙하니까 '평소 정도겠지' 했고요. 근데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거센 바람에 해일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어요. 집을 나가야 했어요. 저와 아이들, 남편, 부모님, 제 남자 형제 이렇게 7명이 손을 잡고 문을 열었는데, 10초 만에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고, 몇 초 만에 가슴까지 물이 차올라 걸을 수가 없었어요. 겨우 수영해서 섬 중앙 외할아버지의 이층집으로 갔어요. 대피하고 보니, 바닥에 피가 흥건했어요. 어머니 발에 무언가에 심하게 베인 상처가 있었지만, 여긴 병원도 없고 배도 없어 며칠 후에야 병원을 갈 수 있었어요."
태풍이 지나간 후 찾아 간 트릭시 씨의 집은 그야말로 초토화돼 있었다. 집, 배, 어망, 옷까지 모든 재산과 물건들이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반려견 '천국이'도 실종됐다. 이 충격으로 트릭시 씨의 아버지는 2주 뒤 심근경색을 앓았다. 트릭시 씨의 작은 아들은 물이 차오른 만조 때 파도소리가 들리면 혼자 잠에 들지 못하는 불면증을 아직 겪는다.
4년이 흘렀지만 마을은 "60% 정도만 복구된 상태"라고 했다. 트릭시 씨도 가벼운 자재로 만들어진 허술한 집에서 대출금을 어렵게 갚으며 살고 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주민 대다수가 한시에 배를 잃고 생계 유지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해수면 상승…"집 앞까지 물이 차올라"
트릭시 씨는 해수면 상승을 직접 목도하고 있다. 그가 사는 바타산섬과 이 섬이 소속된 보홀섬 해안은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될 수 있는 위기 지역이다. 트릭시 씨는 "예전과 다르게, 이제 만조가 되면 물이 집 앞까지 차올라서 유실되지 않도록 신발을 매번 챙겨 둔다"며 "만조일 때 애들이 학교를 가게 되면 위험하니 직접 데려다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릭시 씨는 해수면 상승을 즐길 거리, 구경거리로 대하는 이들도 봤다. 바타산섬은 세계적인 휴양지인 세부해협에 있다. 그는 "누군가는 수영, 수상레저를 즐기거나 해협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에겐 매우 큰 위험 요소이며 (세계에) 경종을 울려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트릭시 씨는 재난을 이겨내는 수년 동안 자신이 기후위기에 따른 재난의 생존자이며, 이 재난이 언제든, 누구에게든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한때 절망에 빠졌던 그가 기후활동가로 거듭난 이유다.
"저는 기후위기를 몸소 체험했어요. 그럼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침묵하면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어요. 아직 필리핀에선 기후운동을 하는 게 쉽진 않아요. '그린피스는 너를 돈벌이로 보는 것'이라는 냉소도 많아요. 그러나 오히려 강해져야겠다고 더 생각해요. 내가 말하지 않으면 지역사회에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함께 하는 주민이 12명에서 26명으로 늘었어요. 자긍심을 느껴요."

기후위기 1위 피해국 필리핀, 기후악당 국가 한국
7641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은 2019년 경제평화연구소(Institute for Economics and Peace)에 따르면, 기후위기로 가장 큰 위험에 처한 국가로 꼽혔다. 실제 지난해 10~11월 한 달 동안에만 이례적으로 태풍 6개가 필리핀을 덮치는 이상기후 징후도 보였다.
그러나 필리핀의 온실가스 배출 책임은 한국보다 훨씬 적다. 2023년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을 보면 한국은 12.1톤(t)으로 196개국 중 27위, 필리핀은 2.5톤으로 154위다. 부유한 국가들이 물품 생산국에서 재화를 수입해 소비하는 탄소 배출량까지 다시 계산하면, 2022년 한국은 13.2톤으로 120개국 중 13위, 필리핀은 1.6톤으로 93위다. 한국이 '기후 악당'이라 불리는 이유다.
트릭시 씨는 한국 시민들에게 "여러분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와 뜻을 함께해주길 바란다"며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하고 행동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아가 최근 기후 재난으로 분류되는 경북 산불 피해생존자들이 겪었을 "모든 걸 잃은 고통"에 공감하며, "힘드시겠지만, 다시 또 힘을 내고 일어나셨으면 좋겠다"고 연대의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피해는) 궁극적으로는 환경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마음을 합쳐 함께 행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트릭시 씨는 그린피스 동료, 섬 주민들과 필리핀에서 기후위기 책임을 촉구하는 모종의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우리가 겪었고, 겪고 있는 기후재난의 심각성을 지치지 않고 계속 알려 나갈 것"이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또 동기부여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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