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동물이 돼선 안 된다" 자존감으로 버틴 자가 살아남았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4]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2

나치 독일에 저항한 혐의로 붙잡혀 들어간 정치범이든, 유대인이라는 원죄로 갇힌 보통사람이든 일단 나치 수용소에 갇힌 이들은 절망하기 마련이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견뎌냈을까. 그들은 언젠가 수용소에서 벗어나 나치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날들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었을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특히 1940년대 초반부에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을 거듭할 때는 더욱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골수 나치들도 그런 날이 오리라 믿지 않았다.

"너희들 중 누구도 이곳을 나가지 못 한다"

히틀러 정권은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무려 20,000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수용소를 세웠다. 그 가운데는 △'국가의 적'으로 찍힌 사람들을 짧은 기간 동안 가둬놓는 임시수용소 △수감자를 노예노동으로 혹사하는 강제노동수용소 △치클론B 독가스로 목숨을 앗아가는 절멸수용소가 포함된다. 인권 개념이 실종된 곳에 갇힌 수감자들은 부실한 먹거리에 힘든 노동을 하다 몸이 망가져 시름시름 앓다가 숨지거나, 티푸스 같은 전염병 또는 '노동 불가' 판정을 받고 독가스로 '처리'되었다.

히틀러 집권 직후인 1933년 3월에 문을 연 뮌헨 외곽의 다하우(Dachau)는 나치 수용소 가운데 제일 먼저 생기고 가장 오랫동안 운영됐다. 미국인 작가인 테렌스 데 프레(콜게이트대, 영문학)은 나치 독일과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관한 글을 써왔다. 그의 책(The Survivors: An Anatomy of Life in Death Camps, 1976)은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군상을 둘러싼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았기에 홀로코스트 분야의 고전으로 꼽힌다. 다하우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한 수감자는 데 프레를 만나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친위대 경비병들은 우리에게 '너희들 중 누구도 이곳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데서 상당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그들이 특별히 재미있어 하면서 강조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거란 주장이었다. 소문이나 추측 정도야 나돌지 모르지만, 뚜렷한 증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토록 극심한 잔학 행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 것이라 했다.](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서해문집, 2010, 76쪽)

▲ 1944년 5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막 도착한 헝가리 유대인 여성들. ⓒ친위대 소속 사진사 Bernhardt Walter, Ernst Hofmann, 위키미디어

"삶과 죽음은 수용소에서 함께 지냈다"

수용소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흐릿했다. 한계상황에 놓인 수감자가 그날 운이 없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의 경계선을 넘었다. 새벽에 일어난 뒤 침상 정리가 반듯하지 않다고 막사장에게, 아침에 점호를 받다가 줄이 비뚤어졌다고 친위대원에게, 낮 동안 일손이 느리다고 작업반장(Kapo)에게 맞아죽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유대인 출신의 지식인 장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지냈다"고 했다. 언제라도 죽음이 닥쳐올 수 있는 곳이 수용소라는 얘기다.

[수용소 수감자들은 죽음과 문을 사이에 두고서가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살았다. 죽음은 늘 있었다. 가스 처형실로 갈 사람을 선별하는 일은 규칙적으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수감자들이 처형되면, 그의 동료들은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행진곡에 맞춰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들 옆을 신송하게 행진해 갔다. 사람들은 작업장에서, 환자 병동에서, 벙커에서, 막사 속에서 집단으로 죽어갔다. 군인들의 죽음이 영웅적이고 희생적이었다면, 수감자들의 죽음은 도살장의 짐승처럼 하찮은 것이었다.](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필로소픽, 2022, 54-55쪽)

놀랍게도, 장 아메리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죽음의 순간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가스실로 보내질 것으로 예상되는 구역에 있는 동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수프가 공평하게 나눠질지에 대한 희망과 걱정을 모두가 하고 있었다.](장 아메리, 59쪽)

죽은 이의 신발 재빨리 낚아채

정신과 의사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1997년 92세로 타계)의 체험기는 삶과 죽음을 둘러싼 여러 생각들을 깊이 하도록 이끈다. 그는 누군가가 아우슈비츠에 갇혀 몇 주가 지나면 남의 고통이나 죽음을 보면서도 "더 이상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고 했다. 곧 '무감각의 단계'에 접어들어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된다는 얘기였다. 그가 수용소 병원에서 일할 때 보았던 어느 소년 수감자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

[12살 소년이 실려 들어왔다. 눈 속에 차렷 자세로 여러 시간 동안 서 있었거나 아니면 수용소 안에 맞는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밖에서 일을 해야 했던 것 같다. 소년의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있었다. 의사가 집게로 시커멓게 썩은 살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정말로 혐오감이나 공포, 동정심 같은 감정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05, 54쪽)

수용소 막사 안에서 누군가가 죽으면, 동료 수감자들은 그의 죽음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빅터 프랭클은 방금 막 숨진 한 수감자를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봤다고 썼다. 프랭클뿐 아니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심지어 죽은 이의 물건을 재빨리 낚아채갔다.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갔다. 그 다음 사람은 시신이 신고 있던 나무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는지 신발을 바꾸어 갔다. 세 번째 사람도 죽은 사람의 외투를 가지고 앞에 사람이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진짜 구두끈을 갖게 되었다고 좋아했다.](빅터 프랭클, 55쪽)

위 옮긴 글에서 죽은 이의 나무 신발을 벗겨 가져갔다고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수감자들이 신었던 신발 밑창은 나무였다. 탄력성이 있는 고무가 아니었기에 걸음걸이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무 신발은 수감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수용소의 악몽을 돌아볼 때 맨 먼저 나무 신발을 떠올릴 정도였다. 나치가 수감자를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수단의 하나가 나무 신발이었다.

발이 감염돼 나치가 요구하는 노예노동을 못하게 되면 죽음이 기다린다. 가스실로 가는 '선별' 명단에 올라 끝내 처형되고 만다. 나무 신발이 상징하듯이 수용소 수감자들은 나치가 만들어 놓은 '동물원' 안에 갇혀 노예노동을 하는 '하찮은 동물'이었다. 나치는 신발이나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신입자에게 일부러 숟가락을 나눠주지 않는 따위로 의도적으로 괴롭히면서 수감자들이 지녔을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 무너뜨리려 했다.

수감자들에게 강요된 '죽음의 행진'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 나치 친위대는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죽음의 행진'(death march)을 강요했다. 노예 노동력을 확보하고 한편으론 전쟁범죄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동유럽 독일 점령지의 수용소 수감자들은 독일 본토에 가까운 서쪽 방향으로 강제 이동을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다른 수용소의 수감자들도 '죽음의 행진'에 합류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는 또 다른 나치의 전쟁범죄로 기록된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닿은 것은 1945년 1월27일. 그보다 딱 9일 앞서(1월18일) 나치 친위대는 이동이 어려운 병약자들을 뺀 약 5만 8000명의 수감자들을 그곳에서 56km 떨어진 보드지스와프 기차역으로 끌고 갔다. 추운 겨울 날씨 속에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많은 수감자들이 가는 도중에 눈 덮인 길에서 쓰러졌다.

친위대 병사들은 걸음이 느려 뒤처지거나 탈진 상태에서 행진을 이어갈 수 없는 수감자들을 쏴 죽이거나 그냥 길가에 내버려두고 떠났다. 미 홀로코스트기념관이 운영하는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은 그 '죽음의 행진'에서 사망한 아우슈비츠 수감자는 1만 500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death-marches-1.

"수감자의 비명은 곧 전쟁범죄의 증언"

폴란드 유대인 여성 사라 베르코위츠는 아우슈비츠 수감자 출신으로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았다(2018년 94세의 나이로 타계). 사라는 17살의 나이 때 가족(부모와 두 오빠)과 함께 1942년 로지 게토에 갇혔다가 2년 뒤인 1944년 다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뒤 혼자 살아남은 아픈 기억을 지녔다. 아버지는 로지 게토에서 영양실조로 죽었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어머니와 오빠 하나는 몸이 약해보였던 탓에 '노동 불가'로 판정 받고 곧바로 독가스로 처형됐다. 다른 오빠 하나도 아우슈비츠에서 노예노동을 하다 숨졌다. 온가족을 전쟁 통에 잃은 사라는 '죽음의 행진' 끝에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졌고, 3개월 뒤(1945년 4월15일) 그곳을 영국군이 접수하면서 사라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스웨덴을 거쳐 미국 뉴욕에 자리잡은 사라는 훗날 127쪽 짜리 분량의 증언록 <나의 형제들은 어디로?>을 남겼다. 이 증언록은 처음엔 중부유럽 유대인들의 언어였던 이디시(Yiddish, 히브리어와 독일어, 슬라브어가 혼합된 언어)로 쓰였다가 사라 자신이 다시 영어로 옮겨 1965년 맨해튼의 한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 증언록에서 아우슈비츠에 울려 퍼졌던 엄청난 비명 소리에 대해 기록한 대목을 보자.

[어느 날 밤, 막사에서 잠을 자던 수감자 가운데 한 소녀가 잠결에 미친 듯이 비명(scream)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왜 그런지도 알지 못한 채 몇 분 안에 수용소 안에 있던 우리 모두가 함께 비명을 질렀다.](Sarah Berkowitz, <Where Are My Brothers? From the Ghetto to the Gas Chamber>, Helios Books, 1965, 82쪽)

비명 소리는 우리 인간이 나타내는 아주 예외적인 반응이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우리 인간이 공포에 휩싸이거나 갑작스런 극한상황을 맞았을 때 내는 비명 소리는 극히 자연스런 반응으로 여긴다. 미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테렌스 데 프레는 한밤중 막사에서 비명을 지르는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가리켜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했다. 한밤중에 수감자들이 느닷없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른 동기는 "아우슈비츠에 갇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는 얘기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잔인한 대량학살은 끊임없는 비명을 낳았으며, 그 소리는 그대로 사무쳐서 많은 생존자들을 통해 세상에 증언으로 전해졌다. 이것은 사실 생존자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공포의 감정이 일어나고 극단적으로 심해지면, 인간은 비명에 매우 가까운-또는 실제로 비명이 되어 나오는-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테렌스 데 프레, 72-73쪽)

독가스실에 끌려들어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자연스런 감정의 폭발이다. 벌거벗은 채로 가스실에 들어간 사람들은 흔히 보는 '샤워실'이 아님을 곧 알아챘다. 소문으로만 듣던 치클론B 독가스실이 바로 그곳임을 깨닫는 순간, 두렵고 당황하기 마련이다. 열에 아홉은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여 몸을 벌벌 떨거나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반응이다(그런 상황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은 눈을 감고 차분히 죽음을 기다렸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거나, 기도문을 읊었다).

▲ 아우슈비츠 이송돼온 사람들의 물품을 쌓아둔 지역. 수감자들은 물자가 풍부하다는 뜻에서 그곳을 ‘캐나다’로 불렀다. ⓒ친위대 소속 사진사 Bernhardt Walter, Ernst Hofmann, 위키미디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맞서다 죽었다"

수용소는 어찌 보면 그야말로 17세기 영국의 지식인 토마스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논리가 관철되는 밀림의 세계다. 같은 수감자들끼리 동료 의식을 갖고 서로 도우며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 할 것인가, 아니면 이웃 수감자의 어려움을 모른 체 하며 오로지 나 자신의 생존만 챙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미 영문학자 테렌스 데 프레의 판단을 들어보자.

[서로 돕자는 것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것, 이 두 가지 태도 사이의 갈등은 고전적인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처럼 이 갈등이 순수한 형태로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데는 어디에도 없었다. 생존자들이 곤경에 맞부딪치는 순간, 그들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같은) 극한 상황 아래서는 이기적인 요구들이 더욱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맞서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테렌스 데 프레, 177-178쪽)

16살 난 폴란드 소녀 키티 하트는 1943년 어머니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갇혔다(아버지는 게슈타포에게 총살당했다). 2년 동안 키티는 그곳 제2수용소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끔찍한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다. 열차로 아우슈비츠로 실려온 뒤 곧바로 독가스실에서 죽은 이들이 남긴 옷이며 짐 가방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수용소 안에서 그 지역은 '캐나다'(Kanada, Canada)로 불렸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풍요로운 지역이란 뜻이 담겼다.

나치 친위대는 수감자 남자 1200명, 여자 2000명을 '캐나다'에 투입시켜 밤낮으로 일을 시켰다. 시계나 보석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베를린으로 보냈다. '캐나다'에서 비누나 통조림 등의 물건을 훔쳐 막사 안으로 갖고 돌아오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아무리 가벼워도 태형 25대였다. 허약해진 몸에 그런 매를 맞으면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키티는 작업장에서 장갑이나 속옷 따위를 몰래 갖고 돌아와 동료 수감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수감자들끼리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키티는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키티가 훗날 남긴 기록을 보자.

[(수용소 안에서) 혼자 맨몸으로 살아남기 위한 끔찍한 싸움들이 언제나 벌어졌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아야 했다. 삶의 의지를 잃는다면 이는 분명히 죽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나는 곧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두세 명으로 이뤄진 작은 가족을 이뤄야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를 돌보았다.](Kitty Hart, <I Am Alive>, Abelard-Schuman, 1962, 63쪽)

품위를 지킨 이들이 살아남았다

수용소에서 삶의 의지와 자존감을 잃은 이들은 (연재 111에서 살펴본 대로) '무슬림'이 돼 이름도 없이 수용소라는 늪에 빠져 죽는 '익사자'로 사라진다. 죽은 이의 마지막 길에 바치는 존엄도 찾아보기 어렵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바로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자신을 꿋꿋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은 스탈린의 공포정치 시절에 '굴라크'(gulag,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10년을 보냈다. 그는 포병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쟁이 끝난 1945년 6월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하지만 그해 8월 스탈린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문제가 돼 시베리아 굴라크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1970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초판 1962년)는 시베리아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 소설을 보면, '쿠조민'이란 이름을 지닌 작업반장이 나온다. 수용소에서 1943년까지 12년째 지내온 고참 죄수로, 별명은 '늙은 늑대'다. 그는 신입자에게 수용소에서 오래 견디려면 세 가지를 피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곳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밀림의 법칙이라는 거야. 그러나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수용소 안에서 죽어가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남의 빈 그릇을 핥거나, 맨날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거나, 정보부원을 찾아다니는 (동료를 고발하는) 놈들이야.](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1998, 8쪽)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핥아 먹는다든지, 몸이 아프다고 작업에서 빠지려고 한다든지, 정보부원에게 동료 죄수를 고자질을 해 자잘한 이득을 챙기려는 자는 결국 남보다 일찍 죽는다는 얘기였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는 수용소라는 극한상황 아래서도 인간적인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담겼다. 다름 아닌 솔제니친 자신의 생각을 '늙은 늑대'의 입을 빌려 나타냈을 것이다.

소설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수호프도 그런 생각을 지녔다. 8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요리장 같은 '특권'을 지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말을 걸거나 음식을 구걸하지 않았다. 비록 속임수를 써서 수프 한 그릇을 더 먹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수호프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품위를 지키려고) 담배꽁초를 물고 있는 남의 입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일 따윈 삼갔다. 작가 솔제니친이 시베리아에서 잃지 않으려 했던 자존감을 소설 속 수호프로 나타냈을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우리는 동물이 돼선 안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도 그랬다. 다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넝마나 다름없는 줄무늬 바지와 웃옷을 입고 있었지만, 누추하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일을 마치고 막사에 들어와서도 줄무늬 작업복을 벗지 않고 그냥입은 채로 잠을 잤다. 세수도 잘 하지 않았다. 씻어봐야 뭘 하나 싶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레비는 생각이 달랐다. 얼굴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자존감을 지키고 나아가 생존의 의지를 이어주는 한 방편이라 여겼다.

레비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초기의 좌절감과 우울함 때문에 그랬겠지만 "얼굴 씻는 것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하며 제대로 씻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지내온 선배 수감자가 다음과 같이 들려준 단호한 충고를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돼선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훗날 (오늘 일을)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선 최소한 문명의 골격, 틀만이라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57-58쪽)

▲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현판을 단 작센하우젠 수용소 정문. ⓒ김재명

도움의 작은 손길이 삶의 빛으로

수용소 안에서는 '나 혼자만 살아야겠다'는 생각해온 사람이 뜻밖의 도움을 받고 당혹감을 느끼는 일들도 생겨난다. 미 영문학자 테렌스 데 프레는 한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선 남을 배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수용소의 야만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란 토머스 홉스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우들도 '예외적으로' 또한 '곳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짚었다. 수용소라는 각박하고 살벌한 현장에서 휴머니즘의 인간애를 발견한 사람은 삶의 의지를 더 굳게 지니게 되기 마련이다.

[(서로 도우며 지내야 한다는 생각으로의) 방향 전환은 강제수용소의 야수와도 같은 비인간적인 잔학으로부터, 거기서 비롯되는 절망과 허무주의로부터, 낡고 희미하지만 그러한 악 가운데서도 발견되는 끈질긴 선의와 생명력의 끄나풀,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향해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테렌스 데 프레, 161쪽)

위에서 "얼굴을 깨끗이 씻으라"며 충고한 선배 수감자말고도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은 다른 만남이 또 있었다. 수용소 근처 독일 민간기업에 일하던 한 이탈리아 민간인 노동자가 여섯 달 동안 날마다 빵 한쪽을 몰래 건네주었다. 레비는 그를 '로렌초'로 불렀다(로렌초란 '월계수'를 뜻하며 이탈리아 남성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다).

빵 한 조각이 무슨 대수냐 싶지만, 아우슈비츠에선 칼로리 이상의 정신적인 의미를 지녔다. 레비는 로렌초의 따뜻한 마음에서 인간의 선한 의지를 새삼 발견했다. 그러면서 삶의 의지를 다졌고 희망을 품었다. 레비는 말한다. '나는 로렌초 덕에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프리모 레비, 187쪽).

수용소는 아프리카의 밀림과도 같다. 야만과 광기가 지배하는 수용소에서 내 목숨은 내가 지켜야 했다. 살벌한 생존경쟁의 세계다. 주머니 속에 아껴둔 빵을 누군가 훔쳐가지나 않을까 늘 조심해야한 했다. 그런 각박한 현실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따뜻한 손을 내밀면 그 자체가 큰 위로와 힘이 됐을 것이다.

21세기의 홀로코스트, 'Genocide in Gaza'

지금껏 수용소라는 한계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지옥 같은 삶을 버텼는가를 살펴봤다. 힘들더라도 나름의 품위와 자존감을 지키려던 사람들,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람들은 생존 확률이 높았다. 나치의 전쟁범죄를 세상에 알린 사람들도 바로 그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유대인이 아닌데도 오늘날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하면 유대인만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피해자 기억'을 앞세우며 홀로코스트를 독점하려는 강성 시오니스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21세기의 홀로코스트'를 저지르고 있다.

최근에 열흘 동안 독일 베를린을 다녀왔다. 그곳 숙소에서 알 자지라 방송이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프로그램의 이름은 '가자에서의 집단학살'(Genocide in Gaza)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2023년 10월 이래 18개월 동안 5만 명 이상이 숨졌다. 희생자의 70%는 여성과 어린이다. 지난 3월18일 휴전 합의 뒤로도 피해는 이어졌다. 이스라엘의 잇단 공격으로 40만 명이 집을 잃었고, 1600명 가까이 죽고 1만 1000명이 실종됐다. '제노사이드'란 용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는 상황이다.

유대인 학살에 중간 간부급 실무자로 뛰었던 두 명의 친위대 중령이 아돌프 아이히만과 루돌프 회스다. 다음 주엔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던 아이히만이 1960년 모사드에 납치돼 받았던 '예루살렘 재판'과 이른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논쟁점을 독자들과 함께 짚어보려 한다.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아이히만이나 회스가 될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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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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