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 0.78' 시대의 육아휴직, '기계적 공정'은 필요없다

인권위 "육아는 개인 아닌 사회적 의무영역 … 휴직자들 특별 보호해야"

세종시 시내버스 승무 사원 A 씨는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한 지난 2021년 회사의 희망노선 배치 신청 대상에서 제외됐다. 육아휴직으로 인해 근무일수를 채우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세종도시교통공사는 사원평가 방식을 통해 사원별 희망노선을 신청 받고 배치순위를 정하는데, A 씨는 육휴 동안의 근무 공백으로 평가대상에 들지 못했다. 당해 그는 결국 기피노선인 멀티노선에 배치됐다.

A 씨에 대한 공사의 처우는 차별일까?

같은 해 A 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본인은 '육휴로 인해 희망노선 배치 대상에서 제외됐고, 이는 차별'이라는 주장이었다. 반면 공사 측은 희망노선 배치 제도에 따라 근무일수를 채우지 못한 사원인 A 씨가 희망노선 신청 대상에 해당하지 않은 것일 뿐, 공사가 "진정인이 육아휴직을 했다는 이유로 차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세종도시교통공사의 희망노선 배치 제도는 사원별 희망노선 배치의 공정한 배치기준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2020년부터 시행된 제도다. 제도상 사원평가·노선신청 대상에 들기 위해선 평가기간 중 6개월의 근무일수를 채워야 한다. 그런데 육휴로 근무공백이 불가피한 사원에게도 남들과 같은 근무일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공정'일까?

인권위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차별이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다르게,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것"이다. 제도가 "특별한 보호 대상"이 되어야 할 육아휴직자에게까지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면, 이는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해야 할 지점이라는 게 인권위 측 판단이다. 실제로 현행 남녀고용평등법(고평법) 제19조 2항은 "육아휴직 기간을 근속기간에 포함"하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권위는 이듬해 "육아휴직 근로자가 희망노선 배치 신청대상에서 제외되는 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 규정을 개선할 것"을 공사 측에 권고했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이 0.7명대로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이자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정부는 16년간 약 280조원의 저출생 대응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출생아 수는 20년 전의 반 토막인 25만명 수준으로 곤두박질했다. 사진은 2019년 서울의 한 대형병원 신생아실. ⓒ연합뉴스

'육휴자 보호'가 역차별? … 기계적 공정 아닌 적극적 차별시정 필요

공사는 최근 인권위의 해당 권고 사항에 불수용 입장을 표명했다. 현행 "희망노선 배치 제도는 공정한 근로자 배치 방식이며, 인권위의 권고를 수용할 경우 희망노선 배치 제도를 지속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인권위는 공사가 인권위의 권고를 최종 불수용했다고 15일 밝혔다.

제도의 공정한 운영을 이유로 인권위 권고를 불수용한 공사 측 입장은 소수자·약자 계층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이른바 '역차별'로 호명하는 기계적 공정담론과 맞닿아 있다. 반면 인권위는 육아휴직자에 대한 '기계적 공정'이 아닌 '적극적 차별시정'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한다.

인권위는 15일 공개한 차별시정위원회 결정문에서 "육아휴직자들은 공사 내 다른 종류의 휴직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이라며 이들을 위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육아 문제엔 "개인이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운 불가피성이 존재"하며, 때문에 "(육아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 의무영역으로 보아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인권위 측의 지적이다.

가령 인권위는 지난해 권고 당시에도 △희망노선 배치 평가방식을 감점제에서 가점제로 변경 △과거에 획득한 점수를 평균하여 적용 △진정인이 (육휴 이후) 3개월 동안 근무하여 받은 점수를 1년 치로 비율환산 등을 차별시정조치의 '합리적 예시'로 공사 측에 제안한 바 있다.

인권위 측 주장의 요지는 청년·여성·지역민 등의 사회적 약자 계층처럼 육아휴직자들 역시 노동시장 내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출산·육아 등에 대한 사회적 부담이 주로 여성에게 지워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성별임금격차 등과 함께 노동시장 내 대표적인 성차별 문제이기도 하다.

인권위는 "육아휴직은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 부담을 완화하여 결과적으로 성별 돌봄 부담 격차를 줄인다"라며 "성 평등한 노동환경 실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제도"라고 부연했다.

▲지난달 22일 오후 광주 북구청 상황실에서 여성보육과 여성친화저출생팀 직원들이 지역별 출산율을 비교하고 있다. 북구는 올해 저출생 대응 종합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결혼 친화 분위기 조성과 저출생 대응 인식개선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연합뉴스

출산율 0.78 시대인데 … 임신·출산·육아 노동자 여전히 차별지대에

실제로 노동현장에서 임신·출산·육아 등을 수행하는 이들의 노동권은 여전히 쉽게 침해받고 있으며, 특히 여성·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이 이에 더욱 취약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중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경우는 43%, 출산휴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경우는 36%에 달했다. 여성의 경우 각각 50%, 45%로 평균보다 더 높았고, 비정규직 또한 각각 56%, 54%로 높은 비율을 보였다.

직장갑질119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저출산 문제를 두고 "무엇보다 대한민국 직장이 아이 낳고 기르는 일에 거의 적대적이기 때문"이라며 "대한민국이 소멸국가가 되지 않으려면 직장인들이 자유롭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22년 3분기 합계출산율은 역대 최저수준인 0.78명을 기록했다.

고평법 등 기존 제도가 사업장 내의 '적극적 차별시정'에 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2020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사업체 중 27.8%에 달하는 곳의 노동자들이 '육아휴직을 전혀 활용할 수 없다'고 답했고, 그 중 절반에 가까운 49.6%가 '사용할 수 없는 직장분위기나 문화'를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 꼽았다. 직장갑질119 소속 최혜인 노무사는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한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불이익은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라며 "(노동청이 주도적으로)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에 대해 조사하고, 그 자료를 노동위원회에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법 개정의 필요성도 있다. 고평법 19조 3항은 '육아휴직을 이유로 한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금지하고 있으나, '불리한 처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시하고 있진 않아 실제 상황에선 유명무실해 질 때가 많다. A 씨의 경우도 '육아휴직으로 인한 불리한 처우'가 어디까지인가 차별 여부의 쟁점으로 작용했다. 현재 국회엔 서동용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일 발의한 '육아휴직 사용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고평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나경원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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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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