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의제 앞세운 '틸', 호주 총선서 주목 받는 까닭?

유권자 최대 관심사가 기후변화…양당은 석탄 산업 눈치 보며 소극 대응

총선을 앞둔 호주에서 거대 양당인 집권 자유·국민 연합과 노동당이 유권자들의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틈을 파고 들어 기후에 대한 적극 대응을 내걸고 나선 일군의 무소속 후보들이 등장해 이목을 끈다. '틸(청록색)'이라 불리는 이들은 주로 자유당 지역구에 출마해 약진 중이다. 틸이 의회에 진출할 경우 지지율을 높이고 있는 녹색당과 함께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에 시달리고 있는 호주의 기후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달 22일 호주 ABC 방송은 4월11일부터 17일까지 여론조사기구 보트콤파스를 통해 이번 총선에 대한 유권자 9만7159명의 견해를 조사한 결과, 오는 21일(현지시각) 치러질 선거에서 유권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의제가 기후변화(29%)임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치솟는 물가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생활비(13%), 경제 및 금융 문제(13%)는 기후변화보다 후순위를 차지했다. 

호주는 1인당 탄소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다. 전 세계 인구 0.3%를 차지하는 이 나라의 탄소 배출 비중은 1%로, 1인당 배출량이 연 17만톤이며 세계 평균의 3배 이상이다.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규모의 석탄 수출국이기도 하다.   

유권자들의 관심이 기후변화에 쏠린 것은 2019년~2020년에 걸쳐 1000만 헥타르(ha) 이상을 태우고 수억 마리의 동물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산불의 영향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호주 시민의 80%가 이 산불의 영향을 받았고 연기로 인해 445명이 숨지고 3000명이 호흡기 문제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봤다. 거대한 산불의 배후에는 기록적인 고온과 가뭄을 동반한 기후변화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고, 산불 이후에도 호주에는 기후변화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재해가 이어졌다. 올해 3월에도 브리즈번에서 3일만에 연간 강우량의 80%가 쏟아지는 등 호주 동부에 쏟아진 폭우와 이로 인한 홍수로 최소 21명이 숨졌다.

외신들은 그러나 유권자들의 관심이 높은데도 이번 총선에서 거대 양당이 관련 의제를 적극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기후변화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저술가 케탄 조시는 이번 선거 유세 첫 주에 하원의원의 3%, 상원의원의 4%만 소셜미디어(SNS) 트위터에 기후를 언급했다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조시는 대부분 의원들은 기후변화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양당은 기후변화에 대한 공약 면에서도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스콧 모리슨 현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유·국민 연합은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 26~28% 저감을 제시했고 앤서니 알바니즈 대표가 이끄는 중도 좌파 성향 노동당도 같은 해까지 43% 감축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해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기준인 45~60% 감축에 못 미친다. 모리슨은 지난해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긴 했지만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지 못하며 실현 의지가 없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오히려 자유당은 집권 기간 동안 새 광산 개발 및 기존 광산 확장을 승인했고 화석연료 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노동당도 기후변화에 대응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호주는 지난해 유엔(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한국 등 40여개국이 참여한 2040년까지 석탄발전을 폐지하겠다는 합의에 동참하지 않았는데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이 여당이 되더라도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알바니즈는 탄광 지역 표를 의식해 새로운 탄광 개발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호주 정치권이 기후변화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배경에는 호주의 거대한 석탄 산업이 자리하고 있다. 외신들은 석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산업이 호주 경제의 근간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광산 지역 표를 무시할 수 없는 데다 화석연료 업체들이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력도 상당하다고 전했다. <알자지라>는 정치인들이 기후문제에 소극적인 배경에 유권자들이 여론조사에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다가도 막상 투표장에서는 지역의 당면 과제를 우선시하는 경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더구나 기후변화 관련 정책을 시도한 전임 총리들이 지지율 하락으로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난 전력이 있어 호주 정치권에서 이 의제는 그야말로 말해서는 안 될 '뜨거운 감자'가 된 지 오래다. 가장 최근에는 2015년~2018년까지 재임한 맬컴 턴불 전 총리가 탄소배출 저감정책을 시도하다 총리 자리를 내려놔야 했다.

유권자 관심은 높은데 양당 후보들이 기후변화 정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틈을 타 새로운 정치세력도 등장했다. '틸'로 불리는 일군의 무소속 후보들은 대부분 여성으로 2030년까지 탄소 배출 50~70% 감축 등 기후변화에 대한 더 과감한 공약과 성평등 증진, 청렴성 등을 내세워 주로 자유당 우세 지역을 공략하고 있다고 미국 주간지 <타임>이 보도했다. 매체는 이 후보들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뜻이 맞는 현실 정치인을 지원하는 후원기금 '클라이밋(Climate) 200'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금은 호주 최초의 억만장자 로버즈 홈즈 아 코트의 아들인 청정 에너지 투자자 사이먼 홈즈 아 코트가 이끌고 있다. 외신들은 틸이 노동당엔 투표하고 싶지 않지만 기후변화에는 관심 있는 온건한 자유당 유권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틸 무소속 후보 중에는 2019년 호주 총선에서 전 총리 토니 애벗을 꺾고 와링가 지역구에서 무소속 당선된 잘리 스테걸도 포함돼 있다. 당시 스테걸은 기후행동에 초점을 맞춘 선거 유세를 진행했다. 애벗은 재임 중 탄소 배출 대기업에 세금을 부과하는 탄소세를 폐지하며 기후변화에 역행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북시드니 등을 포함해 자유당이 보유한 6개의 의석을 틸이 위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151석인 하원 전체와 상원 76석 중 40석의 주인이 가려진다. 자유당과 노동당 지지율이 박빙인 상황에서 틸의 존재감은 작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ABC 방송 선거 분석가인 안토니 그린은 틸의 도전을 받는 자유당이 기후위기를 정치적 좌우의 문제로 보는 우를 범했다고 <가디언>에 지적했다. 그린은 "개인의 자유, 인권, 기후변화와 같이 자유당 지지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일련의 의제들이 있다. 그들은 이 문제들을 노동조합 가입이나 임금 같은 좌파 영역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타임>은 현 상황에선 양당 중 어느 당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정부를 틸 무소속 후보들이 의회에 입성한다면 기후의제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도이치벨레>(DW)도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75% 감축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녹색당의 지지율도 지난 2019년 총선에 비해 오름세라며 두 세력이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7일(현지시각) 호주 시드니 와링가에 적극적 기후변화 대응을 내세운 '틸(청록색)' 무소속 후보 잘리 스테걸의 선거 포스터가 세워져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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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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