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난 7년간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중단, 그리고 비핵화 의지 표명을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았었다. 미국이 외교를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사이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래서 틸러슨의 발언은 분명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가 12월 12일 워싱턴 D.C에서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과 국제교류재단이 공동 주최한 '환태평양 시대의 한·미 파트너십 재구상' 토론회의 기조연설을 마치고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밝힌 내용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는 북한이 대화할 준비가 되면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냥 만나자"며 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한 것이다. 셋째는 조건 없는 탐색적 대화 "이후에 우리는 어디로 나갈지를 다루는 로드맵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북한은 북한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며 상호 관심사를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다. 끝으로 "만약 대화 도중에 (북한이) 추가적인 도발을 한다면 대화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대화를 하려면 일정 기간 (도발) 휴지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틸러슨의 전향적인 발언에 어떻게 반응할까? 일단 틸러슨의 발언과 북한의 기존 입장 사이에는 '교집합'이 비교적 크다. 북한은 6월말 주인도 대사를 통해 미국에 '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한 바 있다. 이후엔 공개적으로 '조건 없는 대화'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러시아를 통해 북미 대화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또한 북한은 전통적으로 "조미 고위급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겠다고 약속했고 대체로 이 약속도 지켰다.
특히 북한은 미국의 "최대의 압박"에 굴복해 대화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는데, 틸러슨이 먼저 대화를 제의함으로써 명분과 체면을 살리면서 대화에 임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울러 북한은 11월 29일 "국가 핵무력 건설 완성"을 선언한 직후 유엔 2인자를 초청했고 IOC 위원장의 방북도 검토하고 있다. 북한의 호응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까닭들이다. 아니 북한은 반드시 호응해야 한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 틸러슨의 발언이 파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무게감이 별로 실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발언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사전 조율과 그의 재가를 거쳐 나온 것인지부터 불분명하다. 틸러슨은 "북한과 대화 채널이 2~3개 열려 있다"고 말했다가 트럼프로부터 "시간 낭비 하지 말라"고 면박을 당한 바 있다.
또한 국무부는 북한이 두 달 정도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지 않으면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트럼프는 북한의 '도발 휴지기' 70여 일 만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국무부가 대화를 모색할 때마다 미국 대통령이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이에 따라 관건은 트럼프가 틸러슨의 발언에 어떤 반응을 내놓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럼프가 또다시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거나 심지어 그를 해임하면 상황은 더 꼬이게 된다. 반면 트럼프가 승인해주면 모처럼 반전(反轉)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북한도 이 점을 주목하면서 당분간 관망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가장 큰 궁금증은 '미국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틸러슨 발언에 대한 북한의 호응 여부는 트럼프의 입과 손가락(트위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입과 손가락을 예의주시하면서도 전향적인 입장 표명을 간절히 희망하는 까닭이다. 또한 북한의 호응도 트럼프의 반응 이전에 나오길 바란다. 그래야 트럼프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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