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을 바탕으로 전후 세계 질서를 미국의 계획대로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핵무기가 미국 일방주의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앞세워 뒤늦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 소련을 배제하고 일본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또한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을 분단했으며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거부했다. 핵무기가 가져다준 미 일방주의의 승리였다.
하지만 핵무기가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 목표를 실현시켜 줄 만능의 보검은 아니었다. 예컨대 소련은 미국의 핵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가 중국의 공산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소련의 핵 개발도 저지할 수 없었다. 나아가 미 대외정책의 핵심 목표인 서유럽의 경제 재건도 핵무기로 이룰 수는 없었다.
요컨대 핵무기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 목표의 일부를 실현시켰지만 모두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특히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지고 10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전후 미국이 누려왔던 전략적, 지정학적 우위는 중대한 위협에 직면한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핵 및 재래식 군사력의 대대적 증강이었다.
핵무기는 미소 냉전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또한 미소 대결의 양상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였다. 1945년 8월부터 4년간 미국은 핵 독점에 바탕을 둔 일방주의를 추구했다. 그 결과가 냉전을 낳았다. 1949년 8월 소련의 핵 실험으로 핵 독점이 무너진 후에는 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했다(1950-52년). 이후 1965년까지 미국은 압도적 핵 우위를 바탕으로 절대적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그 결과는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이다. 그러나 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가 미국의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이번 회에는 2차 대전 동안 지속됐던 미국과 소련의 협력 관계가 전쟁 직후 대립으로 변화하는 데 핵무기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핵무기가 없었다면
'가상의 역사(plausible history)'란 말이 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또는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예컨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센티미터만 낮았다면 로마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를 유추해볼 수 있다.
전후 국제 상황에 대해서도 만일 미국에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소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당시 미국 고위 당국자 두 사람의 말을 옮겨 본다.
1945년 4월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와 미국은 지난 150년간 언제나 잘 지내왔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호적이었으며 협력적이었다. 양국의 세력권은 지리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대체로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8월 일본이 항복한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4개월 전의 스팀슨과는 달리 전후 미소 관계에 대해 회의적 전망을 내놓았다.
"원자탄이 사용되기 전이었다면 나는 미소 관계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중략) 사람들은 겁먹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다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원자탄 사용으로 미국을 포함한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미소 관계의 앞날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는 얘기다.
만일 1945년 7월 최초의 핵 실험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우선 미국과 소련의 필사적 핵 군비 경쟁이 일어났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는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 핵전쟁의 공포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 안보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이 핵무기 개발에 쓰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지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은 1945년 3월에야 필사적 전투 끝에 오키나와에 상륙할 수 있었다. 미군 전사자는 1만 3000명, 일본 측은 군인 7만 명이 전사하고 오키나와 주민 10만여 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1945년 11월 규슈 상륙, 3월에는 혼슈 상륙을 계획하고 있었다. 예상되는 미군 전사자는 4만 5000여 명.
결국 원자탄이 없었다면 미국은 소련군의 참전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그 경우 미국은 소련과 함께 일본을 점령해야 했을 것이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일본을 공동 점령했다면 한반도의 분단은 피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소련의 참전 예정일인 8월 8일에 앞서 8월 6일 서둘러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일본의 단독 점령을 위한 것이었다.
원자탄이 없었다면 전후 처리의 핵심 사안인 독일 문제 처리에서도 미국은 또 다른 승전국인 소련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전후 급속한 군대 감축을 단행했다. 1945년 6월 1200만이었던 병력은 2년 후 8분의 1(150만)로 줄었다. 반면 유럽 전쟁의 80%를 감당했던 소련 육군은 1945년 5월 1136만에서 1947년 6월 287만으로 4분의 1 규모가 됐다. 미군 병력의 약 2배다. 즉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은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탄이 없었다면 미국은 얄타회담에서의 합의대로 소련에 대한 전쟁 보상을 완수하고 독일에 대한 4대국 공동관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경우 독일은 분단되지 않고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하게 될 터였다. 전후 독일에 대한 소련의 방침은 '통일 독일, 중립 독일'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공동 관리로 통일 독일의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약 100억 달러의 전쟁 배상을 받아내 소련 경제를 재건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원자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에 대한 군사 개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후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 목표는 세계 경제의 핵심 산업 지역인 서유럽을 미국 경제권에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한 소련이 무력으로 서유럽 국가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950년 1월 미국은 남한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애치슨 선언)을 밝혔다. 그랬던 미국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즉각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자탄으로 소련의 유럽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자탄이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원자탄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당시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의 표현대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을 상대로 벌이는 잘못된 전쟁"이 됐을 것이다.
핵무기를 등에 업은 미국의 일방주의
물론 이상은 '2차 대전 말기 미국이 원자탄을 갖지 못했다면'이라는 가정적 상황에 기초한 일종의 사고(思考) 실험이다. 실상은 이와는 다르게 전개됐다. 7월 16일 트리니티 핵 실험 성공 소식에 "전혀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된 트루먼은 일방주의로 치달았다. 반면 스탈린은 미국의 원자탄 개발로 세계의 전략적 균형이 무너졌다면서 핵 개발 추진에 본격 나섰다. 이후 그는 미국의 핵 공격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의 원자탄 사용은 소련의 핵개발을 초래했고 이후 두 나라는 40여년 간 피 말리는 핵 군비 경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민생 안보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자원이 핵무기 개발에 탕진됐다. 미국의 경우 1995년까지 50년간 약 5조 달러를 핵무기 개발에 사용했다. 그 결과 미국 경제는 군사 수요에 의해 움직이는 전쟁 경제(War Economy), 미국 정부는 전쟁을 일삼는 전쟁 국가(Warfare State)가 됐다.
소련은 핵 군비 경쟁의 여파로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 학자 유르겐 브룬은 냉전에 대해 "소련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한 고의적 군비 경쟁'이라고 말한다.
원자탄을 독점한 미국은 전후 일본 처리에 대한 소련의 참여를 원천 봉쇄하고 일본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확보한다. 1945년 6월 스탈린은 대일본전 참전에 앞서 홋카이도 점령 계획을 세웠다.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거쳐 홋카이도에 상륙하는 계획이었다. 러일전쟁 때 일본에 빼앗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수복하는 것은 물론 홋카이도를 점령함으로써 전후 일본 문제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원자탄의 위세에 눌린 스탈린은 38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스탈린은 일본 항복 나흘 후인 8월 19일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 영토 일부를 점령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러시아 군이 일본 본토 어딘가에 점령 지역을 갖지 못한다면" 러시아 여론은 "심각하게 나빠질 것"이라며 홋카이도 점령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이 소련의 요청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22일 스탈린은 홋카이도 상륙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10월 하순 소련을 방문한 미국 특사 애버럴 해리먼에게 스탈린은 홋카이도 진주가 불허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나아가 소련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위성국 역할을 맡지 않을 것이라면서 일본에도 독일과 비슷한 '연합국 통제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 문제 처리에 소련의 참여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통제는 미국의 핵 독점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게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핵 독점으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한 미국이 소련의 요청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미국의 합의 위반
미국의 핵 독점은 미국의 대독일 정책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거부했고,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분단했으며 서독의 재무장과 경제 재건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의 핵심 의제는 독일 문제였다. 루스벨트는 두 가지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유럽에 대한 안보 위협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차례 세계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전쟁 역량을 뿌리 뽑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의 산업 역량도 약화시켜야 했다. 근대 전쟁에서 산업 역량은 곧 전쟁 수행 능력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여론이 전후 미군의 장기 유럽 주둔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상비군을 가져본 역사적 경험이 없다. 1차 대전 이후에도 대규모 소집 해제를 통해 상징적 숫자의 군대를 유지했을 뿐이다. 따라서 전후 대규모 미 지상군의 유럽 주둔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군이 철수한 후 유럽은 소련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소련과의 협력뿐이었다.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 영국은 독일에 대한 4대 강국 관리, 소련에 대한 대규모 전쟁 배상 등에 합의했다. 미국은 사실상 독일의 중립화에 합의했다. 독일을 단일한 국가로 4대 승전국이 공동 관리한다면 그 결과는 중립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동유럽을 통해 독일의 침략을 받은 소련의 역사적 경험을 고려해서, 나아가 유럽 안보를 위한 소련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독일로부터의 전쟁 배상 규모를 200억 달러로 정하고 이중 절반인 100억 달러를 소련 몫으로 배정했다. 소련의 실제 전쟁 피해는 1280억 달러에 달했지만 현실적 사정으로 고려한 결과였다. 독일군 격퇴의 약 80%를 소련군이 담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억울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약속들은 미국의 원자탄 확보 이후 거의 모두 물거품이 됐다. 원자탄이 초래한 미국 일방주의 때문이다. 우선 미국은 1946년 5월 미국 등이 관리하는 서독 지역으로부터의 대소련 전쟁 배상을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그 조짐은 이미 트리니티 핵 실험(7월 16일)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소 미국 대사 조셉 데이비스는 1945년 7월 28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국무장관) 번스는 배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핵실험 성공의 전모가 알려진 이후 배상 문제에 관해 소련을 찍어 누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번스는 "뉴멕시코(트리니티 핵실험)의 성공은 우리에게 막강한 힘을 안겨주었다. 결국 우리가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명했다.
결국 소련은 서독 지역에서 겨우 6억 달러의 전쟁 배상을 챙길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관리하던 동독 지역에서 45억 달러를 회수해 모두 51억 달러를 챙겼다. 동독은 인구, 영토, 경제 규모가 서독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즉 동독은 경제 규모에 비해 서독보다 20배 이상의 배상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동독 경제는 피폐해졌으며 약속된 규모의 전쟁 배상을 받지 못한 소련의 경제 재건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번스의 핵외교
미국은 얄타회담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소련의 동유럽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핵무기의 위력을 앞세워 동유럽마저 미국의 경제적 세력권에 포함시키려 한 것이다.
1945년 9월 11일 시작된, 전후 처리를 위한 런던 외상 회담에서 번스 국무장관은 몰로토프 소련 외상에게 동유럽 국가들에 대해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몰로토프는 미국도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에서 배타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느냐며 소련은 동유럽에 대해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항변했다.
번스의 공격적 언사에 심사가 뒤틀린 몰로토프는 마침내 "당신은 코트 주머니에 원자탄을 가지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번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 남부 사람들 기질을 몰라요. 우리는 주머니에 대포를 넣어가지고 다닙니다. 이런 식으로 차일피일하는 것을 당장 집어치우지 않는다면 (중략) 원자탄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바로 당신에게 안겨줄 거요."
하지만 이러한 번스의 핵외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은 소련 안보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번스의 핵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의 분단과 서독의 서방 편입
핵 독점은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소련의 협력 없이도 독일의 안보 위협을 잠재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미국에게 핵무기가 없었다면 소련의 침공도, 독일의 군사적 재기도 막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독점함으로써 소련의 침공을 저지하는 것과 함께 독일의 군사적 재기도 억누를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자신감은 1945년 8월 22일 트루먼, 번스와 프랑스 지도자 드골 장군과의 회담에서 잘 드러난다. 이 회담에서 드골은 1차 대전 이후와 같은 독일의 재기를 우려하면서 독일의 핵심 산업지역인 루르 지역을 국제 관리 하에 둘 것, 라인강 서쪽 지역을 독일 영토에서 제외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독일의 위협을 너무 과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자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어떤 나라도 감히 침략을 꿈꾸지는 못할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다.
미국은 또한 1946년 6월 태평양 비키니 환초에서 트리니티 이후 최초의 핵실험을 단행했다. 미국은 한 달 전인 5월 3일 서독의 대소 전쟁 배상을 중단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원자탄을 대외 전략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했다.
비키니 핵실험의 작전 명칭은 '교차로(Operation Crossroads)'. 시기는 번스와 몰로토프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치열한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미국은 핵실험을 통해 강압적, 일방적으로 독일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소련 관영 신문 <프라브다>는 비키니 환초 상의 거대한 버섯구름 사진을 보여주며 미국이 핵전쟁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련은 독일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요구에 명시적으로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를 앞세운 미국의 일방주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단일한 독일, 중립화된 독일'을 원했다. 그래야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제거하고 전쟁 배상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적이며 통일된 독일을 원했다. 그것이 소련의 국익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에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했을 뿐, 독일 등 세계에 대한 공산 혁명을 꿈꾸지도 않았다. 독일의 공산화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독일에게 공산주의란 암퇘지에게 안장을 올리는 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미국은 독일의 분단을 원했다.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복원을 위해서는 독일의 선진적 경제를 미국 영향권 아래 통합해야 했는데, 통일 독일이 그 길을 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전후 미국은 영국이든 프랑스든 독일이든 유럽 국가들이 독자 노선을 택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독자 노선은 중립, 사회주의, 또는 소련과의 경제 교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주도에 의한 세계 경제 통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9년 5월 8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을 공식 출범시켰다. 서독은 1954년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소련은 1953년 말까지 단일한 중립 독일을 원한다며 이를 위해 동독을 해체할 용의가 있다고 촉구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결국 냉전은 핵무기를 앞세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이로 인해 2차 대전의 공식 종결은 냉전 이후로 미뤄져야 했다. 독일과 연합국 간의 평화협정은 독일 통일 후인 1990년에야 체결될 수 있었다. 일본과 소련은 아직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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