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의 진실이 봉쇄되다

[전쟁 국가 미국] 핵무기와 '동의의 조작'

1946년 가을, 처음으로 미국인들이 핵무기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핵 과학자들의 <함께 살 것인가, 모두 죽을 것인가(One World or None)>, 존 허시의 <히로시마>, 그리고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포드와 종교인 라인홀드 니버 등의 문제 제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47년 2월이 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미국의 최고 권력자, 일류 지식인들의 합작에 의한 치밀한 여론 조작의 결과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 헨리 스팀슨 전 전쟁부 장관, 칼 콤프턴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기획하고 연출한 이는 하버드대 총장 제임스 코난트다.

코난트의 지휘 아래 진행된 여론 조작에 의해 히로시마의 진실은 결국 봉쇄되고, 원자탄은 정당한 전쟁 무기라는 미국 정부의 공식 담론이 대중을 지배하게 된다. 핵무기의 비인도성에 대한 성찰의 기회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후 수 십 년간 이러한 거짓 현실이 미국은 물론 세계를 지배한다.

"역사의 왜곡"

존 허시의 <히로시마>로 미국 사회가 들끓고 있던 무렵, 2차 대전 참전 군인 윌리엄 홀시 제독도 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히로시마 직전 일본은 항복하려 했으나 미국 과학자들은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어냈고, 이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비판했다(<뉴욕타임스> 1946년 9월 11일). 원자탄 투하는 전쟁 종식에 필요한 조치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며 후에 원자탄의 국제적 관리에 관한 협상 책임을 맡게 되는 버나드 바루크는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세계인들이 보기에 미국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약화시키려는 소수파들에게 도움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1946년 9월 23일 하비 번디에게 보낸 코난트의 편지는 바로 이러한 정계와 군부, 학계 등 제도권 인사들의 우려와 불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코난트는 히로시마에 대한 비판은 "직업적 평화운동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면서, 예컨대 노먼 커즌스(언론인)와 윌리엄 홀시(군인) 같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히로시마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나아가 이러한 일련의 비판은 "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미국의 참전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던 "1차 대전 후의 과오"를 되풀이 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커즌스 등의 주장을 방치했다간 미국의 교육자, 지식인들이 '원자탄 사용은 잘못'이라는 인식을 미래 세대에게 전승할 것이라는 얘기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감상적이고 말하기만을 좋아하며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고 있는" 이들의 주장을 방치한다면 "역사의 왜곡"이 일어날 것이라는 게 코난트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리고 이를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게 그의 목표였다.

그는 하비 번디에게 헨리 스팀슨 씨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결정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를 제대로 해명하는" 짧은 글을 써줄 것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네바 부시도 같은 의견이라고 덧붙였다.

코난트는 특히 원자탄 제조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원폭 투하에 반대했다는 대중들의 인식이 문제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스팀슨의 글은 과학계 지도자들이 "(원자탄 사용에) 전혀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격 목표 선정 작업 등에 참여했음을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팀슨이 써야 할 반박 기사의 윤곽을 제시하면서 "서술은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원자탄의 군사적 필요성을 과도하게 주장하려 노력해서는 안 된다"며 집필의 기조까지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요컨대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원자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 사태의 추이를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서술'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는 자신은 원자탄 사용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이 문제는 "진정 중요하며 시급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편지의 끝을 맺었다.

(코난트는 1945년 7월 트리니티 핵실험을 참관했다. 실험 직후 물리학자 새뮤얼 앨리슨이 "맙소사, 우리 군이 저 물건으로 일본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튀겨 죽이겠구만!"이라고 외치자 코난트는 차분하게 "글쎄, 일본 상륙을 위해 우리 병사 100만 명이 죽는 것보다는 일본 아녀자들을 튀기는 게 낫지 않겠나?"라고 대꾸했다. 당시 코난트의 아들 둘은 태평양 전선에 복무했다.)

코난트는 스팀슨이 집필을 거부할 것에 대비해 원자탄 사용을 결정한 '임시위원회(스팀슨이 위원장)' 위원이었던 칼 콤프턴 MIT 총장에게도 같은 취지의 글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콤프턴은 곧바로 초고를 코난트에게 보냈다) 그리고 뉴욕 롱아일랜드의 스팀슨 자택을 방문해 집필을 설득했다. 당시 스팀슨의 자서전 집필을 돕고 있던 맥조지 번디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했다.

▲ 지난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인근에서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가 실시됐다. 사진은 기념비. ⓒ미 공군

코난트와 스팀슨

제임스 코난트(1893~1978년)는 1933년, 40세의 나이에 하버드대 총장이 됐고 이를 20년간 역임했다. 총장을 사임한 후에는 2대 독일 고등판무관과 초대 서독 대사를 지냈다(1953~1957년). 화학자인 그는 1941년부터 맨해튼 프로젝트 등 미국의 전쟁 수행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를 총괄한 국립국방연구위원회(NDRC : 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의 부위원장으로 일하며 미국의 핵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위원장은 바네바 부시였다.

원자탄 사용을 결정한 '임시위원회'의 8인 멤버 중 과학계는 세 명이었는데 바네바 부시와 제임스 코난트, 칼 콤프턴이 그들이다. 코난트는 임시위원회가 첫 원자탄의 공격 목표를 "노동자들의 숙소로 둘러싸인 핵심 군수 공장"으로 정하게 한 장본인이다. 경력에서 드러나듯 코난트는 미국 최고의 지식인이자 권력자였다.

코난트가 하비 번디(1888~1963년)를 통해 스팀슨에게 반박 글을 요청한 것은 우선 번디가 전쟁 기간 중 스팀슨 전쟁부 장관과 부시 NDRC 위원장 간의 연락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비는 미국의 기득권 세력(Establishment)을 대표하는 동부의 명문 중 명문 출신이었다. 이미 17세기 초반에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유서 깊은 집안이다. 그의 둘째 아들 윌리엄 번디(1917-2000년)는 케네디 행정부에서 국무부 국제안보 담당 부차관보를 거쳐 존슨 행정부에서 동아태 차관보를 맡았고 베트남전쟁 수행에 깊이 개입했다.

셋째 아들 맥조지 번디(1919~1996년)는 33살에 하버드대 문리대 학장을 맡은 전설적 인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1946년 당시에는 스팀슨의 자서전() 집필을 돕고 있었다.

헨리 스팀슨(1867~1950년)은 50년의 공직 생활을 거치면서 '미국 최후의 신사'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거의 모든 미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공화당 정부에서 전쟁부 장관(1911~1913년)과 국무부 장관(1929~1933년)을 역임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0년 5월 스팀슨을 전쟁부 장관으로 발탁한 것은 오직 그만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정계, 관계, 과학계, 산업계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스팀슨은 두 번째 전쟁부 장관을 맡은 직후 존 매클로이, 로버트 로벳, 딘 애치슨 등 쟁쟁한 공화당 인사들을 정부에 끌어들인다. 이들은 이후 냉전 시대의 현인들(Wise men)로 불리며 미국의 전후 대외정책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 코난트는 스팀슨이 원자탄 사용에 관한 반박 기사를 쓸 최고의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1차 대전을 화학자들의 전쟁, 2차 대전을 물리학자들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1차 대전에서는 화학무기가, 2차 대전에서는 원자탄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코난트는 1차 대전 당시 화학무기(독가스) 개발에 참여했다. 그 때문에 전쟁 후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비인도적 무기를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원자탄 개발 과학자들에 대한 전면적 비난이 제기될 것을 우려했다(사실 핵무기는 화학무기보다 훨씬 더 잔인무도한 무기다). 이러한 비난은 자신과 같은 과학자들은 물론이고 미국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향후 미국의 원자탄 사용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원자탄 사용이 왜 필요했던가에 대한 이해 없이" 원자탄에 대해 "겁먹고" "분노하며" 원자탄을 만든 사람들을 공격할 것을 우려했다.

코난트는 원자탄 사용을 비판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 국민이 원자탄 사용에 대해 독한 마음을 품는다면" 세계 평화 유지와 원자탄에 대한 국제적 통제가 잘 될 것이지만 "원자탄 사용을 비판하는 프로파갠다를" 방치할 경우 미국의 원자탄 보유가 갖는 강점은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스팀슨은 친구에게 자신은 히로시마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을 위해 코난트에 의해 선발된 "희생양(victim)"이라고 불평했다. 사실 스팀슨은 트루먼 정부 관리 중 원자탄 사용이 인류 사회에 가져올 부정적 결과를 일찍부터 걱정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존 매클로이는 스팀슨에 대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망설임이 있었다. 그는 원폭 투하를 결정하기 전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민간인들에 대한 원폭 공격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전한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스팀슨이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즉 원자탄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글의 적임자로 선택됐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스팀슨의 이름을 빌린 사실상의 정부 문서

결국 원자탄 사용을 옹호하는 글은 스팀슨의 이름으로 발표됐지만 실상은 정부 공식 문서나 다름없었다. 애초의 발상에서 원고 완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코난트가 지휘했고, 원고에 들어갈 내용은 그로브스를 비롯한 정부 관리들이 제시했으며, 실제 집필은 맥조지 번디가 했기 때문이다.

스팀슨의 조수 맥조지 번디는 하비 번디, 레슬리 그로브스, 스팀슨의 보좌관이었던 조지 해리슨, 임시위원회의 서기였던 고든 아네슨 등으로부터 각자의 초고를 수집했다. 하비 번디의 초고가 가장 먼저 제출됐고, 그로브스의 초고는 11월 6일 전달됐다. 나중에 스팀슨은 자신의 글이 "많은 손을 거쳤다"는 점을 인정했다.

맥조지 번디는 이 초고들을 바탕으로 6천 단어에 이르는 초고를 작성했다. 임시위원회는 원자탄 사용이 아닌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장시간 논의"했으나 "오랜 시간 숙고" 끝에 결국 원자탄 사용을 결정했다는 것, 이는 궁극적으로 미국인의 인명을 구하기 위한 인도적 결정이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특기할 것은 코난트와는 별도로 트루먼도 스팀슨에게 원자탄 사용을 정당화하는 글의 집필을 권유했다는 점이다. 트루먼의 권유는 코난트의 제안 이후였는데, 트루먼과 코난트가 거의 동시에 원자탄 사용의 정당화 필요성을 느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히로시마 직후 82%였던 트루먼의 지지율은 1946년 가을 48%로 떨어져 있었다)

1946년 11월 말, 스팀슨과 번디는 초고를 코난트에게 보내 그의 논평을 청했다. 코난트는 8장의 메모와 함께 답장을 보냈다. 그는 "단순히 사실만을 제시할 것"이며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거나 결정을 정당화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사실에 입각한 접근만이 원자탄 사용에 회의적 독자를 설득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 기사에 대한 반박을 매우 어렵게 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내용과 관련해서는 우선 항복 조건 변경에 대한 부분은 모두 뺄 것을 제안했다. 스팀슨 등은 무조건 항복에서 천황제 유지로 바꿔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시도를 했었는데, 이를 아예 언급하지 말라는 얘기다. 코난트는 맥조지 번디에게 "천황제 문제는 전체적 논점을 흐릴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대신 과학자들이 제안한 사전 시험 폭발을 미국 정부가 거부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자탄에 의한 대규모 인명 희생을 우려한 맨해튼 과학자들은 일본 측 참관 하에 사람이 없는 지역에서 원자탄 폭발을 시연함으로써 항복을 유도하자고 제안했었다)

코난트는 일본에 대해 원자탄을 사용할 것이라는 사전 경고가 없었다는 점 때문에 "이 기사의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한 코난트는 그 자신이 원고를 써서 보냈다. 이 내용은 스팀슨의 글에 거의 그대로 수록됐다.

(이와 관련해 한 역사학자는 "미국의 인문 교육 기관 중 최고라는 대학의 총장이 특정 사실을 대중이 알아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자신의 판단을 관철시키기 위해 검열을 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며칠 후, 맥조지 번디는 코난트에게 "기쁜 마음으로"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고 2주일 후 코난트의 지적대로 수정된 원고를 그에게 보냈다. 코난트는 현재 원자탄 사용에 관해 "매우 잘못된 정보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으므로" 스팀슨의 글을 하루바삐 발표하라고 촉구했다.

당초 펠릭스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과거 스팀슨의 보좌관이었다) 이 글을 발행 부수가 많은 <라이프>에 기고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코난트는 <하퍼스>를 고집했다. 이 잡지가 높은 지적 권위를 지닌 데다 교육자, 지식인들이 많이 보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하퍼스>는 존 허시의 '히로시마'가 실린 <뉴요커>, 그리고 칼 콤프턴의 원자탄 옹호 글을 게재한 <애틀란틱>과 함께 미국의 3대 잡지로 꼽힌다.

마침내 스팀슨의 글은 1947년 1월 말, <하퍼스> 2월호에 커버스토리로 게재됐다. 전재를 원하는 다른 언론에 무료로 제공한다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스팀슨은 자신의 글이 <하퍼스>에 발표된 직후, 자신에게 부과된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에 젖었다.

그는 자신에 앞서 <애틀랜틱>에 글을 발표한 칼 콤프턴에게 편지를 보내 두 사람의 글이 히로시마 결정에 대한 "무식하고 위험한 비판"이 불러일으킨 "동일한 유령"을 무찔렀다면서 "우리 둘이 쓴 글이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원자탄 사용 결정: 우리는 왜 원자탄을 사용했는가? 헨리 스팀슨이 설명하다(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 Henry L. Stimson Explains Why We Used the Atomic Bomb)"라는 제목이 달린 스팀슨의 글은 전 해 가을 발표된 존 허시의 <히로시마>에 필적하는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고 담담한 서사가 오히려 설득력을 높인 것이다.

게다가 이 글에는 원자탄 결정 과정에 이르는 주요 모임과 날짜, 참여 인물의 면면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대통령에게 보낸 스팀슨의 메모 두 장이 원본 모습 그대로 공개됐다. 이른바 '친밀한 역사'다. 평론가들은 이 글을 원자탄 사용을 옹호하는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의 진술로 받아들였다. 원자탄 사용의 전모라고 판단한 것이다. 바로 코난트가 노렸던 바다.

라디오 방송은 그의 글을 크게,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많은 신문들은 스팀슨의 글 전문을 전재했다. 주요 부분을 발췌해 1면 기사로 게재한 신문도 많았다. UP통신은 <하퍼스> 기사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스팀슨의 글을 "역사적 기사"라고 격찬했다. 나아가 원자탄 사용으로 100만 명 이상 미국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스팀슨의 주장을 강조했다.

(100만은 당시까지 나온 최대 수치이다. 이후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공직자들은 원자탄 사용으로 100만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해 왔다. 사실 스팀슨은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100만의 '사상자(casualties)'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썼는데 이것이 일반에게는 100만 '사망자(deaths)' 로 알려졌다.

이후로는 이 수치가 진실인 양 통용된다. 1980년대까지 이 신화는 깨지지 않는다. 1995년 역사학자 바튼 번스타인는 일본 상륙으로 인한 미군 사망자는 2만 5000~4만 6000명 이라고 추산했다.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됐던 규슈 상륙에서 2만 5000, 1946년 3월 1일 혼슈 상륙에서 최대 2만 1000명의 사망자가 예상됐다는 것이다.)

히로시마 이후 18개월간 원자탄 사용에 대해 유감을 표명해 왔던 <뉴욕타임스>도 이제 모든 의심을 풀었다. 논설위원들은 트루먼과 스팀슨의 설명은 "반박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의 논리에 대해 "도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원자탄은 "수천 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수백 만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언론의 반응을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다. "이제 과거에 대한 논쟁은 끝(So much for the past)"

트루먼은 스팀슨이 원자탄 문제를 "아주 잘" 해명했다고 말했다. 콤프턴은 스팀슨의 글이야말로 원자탄 사용에 대한 더 이상의 비판을 막기 위해 "매우 필요했던 최후의 일격"이라고 평가했다.

스팀슨의 집에는 그의 글을 지지하는 편지가 연일 쇄도했다. 그 중에는 임시위원회의 원폭 사용 결정 당시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랠프 바드 전 해군부 차관의 편지도 있었다. 딘 애치슨 국무 차관은 스팀슨에게 "(이 글은) 매우 필요했던 것이었고...아주 훌륭하게 해내셨습니다"라고 치하했다. 제임스 번스 국무 장관은 이제 "공허한 논쟁은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스팀슨의 글을 제안하고, 감수했으며, 일부는 직접 쓰기까지 했던 코난트는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공개 석상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중들에게 스팀슨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칼 콤프턴과 해리 트루먼

스팀슨의 <하퍼스> 기사만 원자탄 사용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잠재우는 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앞서 칼 콤프턴은 역시 제임스 코난트의 의뢰에 따라 <애틀랜틱> 12월호에 '만일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이란 글을 기고했다.

그는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 일본은 조기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 해 10월 오키나와를 강타한 태풍으로 미군 상륙 부대가 "진주만 피습에 맞먹는 군사적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물리학자 칼 콤프턴(1887~1954년)은 MIT 총장을 18년간(1930~1948년) 역임한 학계 거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아서 콤프턴이 그의 동생이다.

하지만 칼 콤프턴의 명망은 스팀슨에 한참 못 미쳤다. 코난트는 스팀슨에게 비판자들을 설득력 있게 잠재울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은" 스팀슨뿐이라며 원고 발표를 닦달했다. 대법관 펠릭스 프랑크푸르터도 스팀슨에게 적극 나설 것을 주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판론이 무성해질 것이고, 그러면 이를 제어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스팀슨의 후임 전쟁부 장관 로버트 패터슨은 스팀슨의 글이 미래의 역사가를 위한 "사료(source material)"가 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사실 스팀슨은 1946년 12월 원고를 완성해 놓고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당시 스팀슨은 "이번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던 글은 없다"면서 "이 글을 읽고 나서 비극에 이르게 된 모든 과정을 알고 나면, 그로 인한 공포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나를 품위 있는 기독교 신사로 알고 있던 많은 친구들이 나에 대해 냉혈한에 잔혹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망설이는 스팀슨이 행동에 나서도록 최후의 힘을 보탠 이는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트루먼은 1946년 12월 31일, 이번에는 스팀슨에 편지를 보내 "귀관은 (원폭 투하의) 전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에 관한 사실 관계를 바로잡아 주길 기대합니다"라고 촉구했다.

이에 앞서 <애틀랜틱>은 콤프턴의 '만일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에 대한 대통령의 독후감을 기사화했다. 트루먼은 콤프턴의 글이 "이제까지 내가 본 이 문제(원자탄)에 관한 최초의 양식 있는 글"이라면서 대통령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최종 결정은 내가 내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트루먼은 "원폭 투하 훨씬 이전에 일본 정부는 상당한 정도의 사전 경고를 받았고 항복 조건도 통고 받았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일본이 항복을 수락한 것은 원자탄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사실상 거짓말(作話)이었다. '훨씬 이전에' 일본에 통고된 항복 조건은 '천황제 유지'가 아니라 '무조건 항복'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트루먼의 글은 큰 주목을 받았다. 히로시마 이후 대통령이 원자탄 문제에 이처럼 정면 대응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루먼의 글은 원래 <애틀랜틱>에 기고한 것이 아니었다. 46년 12월 16일 칼 콤프턴에게 보내는 개인적 서한이었다. 개인 서한이 기사화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콤프턴, 트루먼, 스팀슨 등 거물급 인사들의 원자탄 옹호 기사가 비슷한 시기에 잇따라 발표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배경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언론은 없었다.

▲ 지난 1948년 5월 27일 해리 트루먼(가운데) 대통령이 코넌트(오른쪽) 박사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트루먼 도서관‧박물관

미국, 핵무기 증강에 나서다

스팀슨 기사가 발표된 지 며칠 후, 새 원자력위원회의 첫 회의가 열렸다. 당시 미국은 원자탄 13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 주 간의 조립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향후 원자력 정책의 우선순위를 무기 제조와 원자로 건설 중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회의 의사록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전한다.

"핵무기와 원자로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토론 결과, 최종적으로 핵무기가 우선돼야 한다는 데 대체적 합의를 이뤘다"

이에 따라 미국은 수소탄을 비롯한 새로운 핵무기 개발, 로스알라모스연구소의 재건, 플루토늄 등 핵물질의 증산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당시까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해 왔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결국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에 순응한다. 그는 맨해튼 과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원자력에 관한)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고 그 결론이 내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핵무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원자탄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잠재우다

오펜하이머는 "양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원자력 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논의가 놀라울 정도로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루이스 멈포드는 원자탄의 위험성에 대한 과학자들의 호소를 무시하는 미국 국민의 "도덕적 나태"를 비판했다.

원자탄 개발을 최초 제안한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지금 또는 가까운 장래에 이 나라 국민들이 무엇이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할 텐데...하나님의 기적을 기도하는 수밖에"라고 개탄했다.

아인슈타인은 "대중들은 핵전쟁의 끔찍한 실상을 경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그 경고를 자신의 의식에서 지워버렸다"며 절망감을 표시했다.

1947년 2월 한 평화운동가는 "예견된 핵 군비 경쟁이 시작됐다"면서 많은 비판적 과학자들이 핵무기 생산 현장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1947년 중반이 되면서 원자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시들었고 언론 보도도 잦아들었다. 그동안의 여론 추이를 주시해온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대체로 "원자탄의 위협이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히로시마 직후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 국민의 85%가 원자탄 사용에 찬성했다. 반대는 10%였다. 1971년 해리스 여론조사에서 찬성과 반대의 비율은 64 대 21이었으며 82년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다.

미국에서 반핵 여론이 급증한 것은 그 직후다. 80년대 초 서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에 대한 대규모 반핵운동이 벌어진 것, 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가 기밀 해제되면서 학자들의 연구로 핵 정책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 등이 영향을 미쳤다. 히로시마 50주년인 95년의 여론조사에서 찬성과 반대는 45 대 49였다. 미국 정부는 적어도 40년간 '원자탄은 정당한 전쟁 무기'라는 신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팀슨은 1948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때때로 역사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렇게 일어났다고 기록된 것"이라고 썼다. 작가 조지 오웰은 <1984>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자,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지배계층이다. 미국의 지배계층은 2차 대전 후 핵무기를 세계 지배의 핵심 수단으로 삼기 위해 원자탄이 인간성과 양립할 수 없는 절대 악이며 결코 정당한 전쟁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한사코 부정해 왔다. 대중의 인식을 왜곡시켜 동의를 조작해내는 방식을 통해서 원자탄을 정당한 전쟁 무기로 각인시켰다.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은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을 위해서는 '대중의 동의를 만들어내야(Manufacturing Consent)' 한다고 설파했다. 코난트가 기획한 스팀슨 기사는 바로 이러한 '동의의 조작'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이후 '동의의 조작'은 미국의 대외 정책, 특히 전쟁 수행을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1950년 미국의 국방비를 일거에 3~4배 늘린 NSC-68의 관철, 1964년 베트남전쟁 확전을 위한 통킹만 사건, 1976년 미소 데탕트를 무산시킨 소련 군사력 평가의 변경, 1991년 걸프전쟁, 2003년 이라크전쟁 등 주요 국면마다 미국 정부는 정보 조작을 통해 전쟁 수행을 위한 미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미국 핵무기의 역사, 미국 전쟁의 역사는 곧 정보 통제와 왜곡의 역사이기도 하다. 다음 회에는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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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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