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장성 "피폭자들이 죽어? 거짓이고 선동이다"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 은폐 (1)

미국인들은 히로시마 당시부터 오랫동안 원자탄의 비도덕성, 그에 의한 인간적 참상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 정부가 원자탄의 실상을 은폐, 왜곡, 통제했기 때문이다. 원자탄의 실상을 가장 잘 아는 과학자들의 이의 제기를 무시했고, 피폭자들의 증언을 억압했다. 또 원자탄 피폭의 참상에 관한 현장 기사와 사진, 기록들을 철저히 억압했다.

히로시마 직후부터 오로지 윌리엄 로렌스의 기사들로 도배된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통해 원자탄에 관한 소식을 접하게 된 미국인들은 '원자탄은 대단한 무기'이며 '원자탄 덕택에 전쟁을 일찍 끝냈고' 자신들의 자식이자 남편인 '미군 병사들의 소중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고 믿게 됐다.

한마디로 '원자탄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는 믿음'이 미국인을 지배했다. 히로시마 이후 30여 년이 지나도록 원자탄 사용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2대1의 비율로 찬성 쪽이 우세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피폭자의 백혈병 발병, 정상인의 50배

원자탄을 사용하면서 미국 정부와 군부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사항은 방사능 피폭 문제였다. 원자탄에 의한 살상은 폭발(blast)과 고온, 그리고 방사능에 의한다. 이중 방사능 피폭은 원자탄에서만 유래하는 현상이다. 방사능 피폭은 심한 경우 입과 귀와 코 등에 출혈이 생기면서 대략 3주일 후에 사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버체트가 말한 원자병이다. 약한 경우에도 그 후유증은 수 십 년 후 백혈병 등 각종 암으로 나타나며 기형아 출산 등 후대에까지 계속된다.

일본 측의 추적 조사에 따르면, 백혈병은 보통 10만 명당 2~3명이 발병하는데 히로시마 폭심에서 1킬로미터 이내에 있었던 생존자의 경우 125명, 1.5킬로미터 이내는 25명, 2킬로미터 이내 5명이었다고 한다. 각각 50배 이상, 10배 이상, 2배 이상 발병한 셈이다. 원자탄을 인간성과 양립할 수 없는 절대 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히로시마 원폭이 공중 폭발한 이유

트리니티 핵실험은 지상에서 시행된 반면 히로시마 원폭은 낙하산에 매달려 낙하하다가 지상 540미터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 이유는 방사능에 의한 살상을 최소화 하고 폭발과 화상에 의한 살상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원자탄이 재래식 폭탄과 별 차이가 없는 무기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보다 어떻게 죽이느냐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즉 방사능 피폭에 의한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려 했다.

9월 5일 '원자병'에 대한 버체트의 역사적인 기사는 미국이 한사코 은폐하려 했던 방사능 피폭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가 그 기사의 무료 전재를 모든 언론사에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대재앙이었다. 원자탄을 정당한 전쟁무기로 인식시켜 전후 외교의 핵심 수단으로 삼으려던 애초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로서는 시급히 대응해야 했다.

▲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지난 1945년 9월 5일 자 신문. 버체트의 히로시마 르포 기사가 헤드라인에 배치돼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버체트 기사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기에 앞서 히로시마 직후 원자탄의 실상에 대한 미국과 일본 국민의 인식의 격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가해자인 미국과 피해자인 일본 국민들 사이에는 커다란 인식의 격차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고통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는 기본적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신민이 식민지 조선의 민중이 당하는 고통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해자 측인 미국의 국민들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피폭자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 국민들은 핵 숭배로 가득 찬 윌리엄 로렌스의 기사들로 원자탄에 관한 첫 소식을 접했다. 로렌스는 원자탄 투하에서 인류의 도덕적 위기, 나아가 인류 생존 자체의 위기를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세기, 위대한 미국의 세기를 예감하고 있었다.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의 철저한 언론 검열이 더해졌다.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서는 언론에 대한 전시 검열이 해제됐다. 단 원자탄 관련 기사 및 사진에 대해서는 '엄격한 검토'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검열이 계속됐다. 한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8월 28일이었다. 따라서 이때까지 일본 언론은 자유롭게 원자탄 피해 상황을 보도할 수 있었다.

'유령들의 행진'

9월 5일 '원자병'에 대한 버체트의 기사가 나가기 이전부터 일본 언론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괴질에 대해 보도했다. "화상을 입은 사람 중 많은 수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100명꼴이었다.

또 피폭 직후 히로시마에 도착한 구조대원과 피폭자의 친척들도 원인 모를 질병을 앓기 시작했다. 도쿄 라디오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상황을 "유령들의 행진"이라고 표현했다. 일본 언론의 보도는 <뉴욕타임스> 등 미국 신문에도 전해졌다.

8월 24일 로스알라모스 연구진이 그로브스(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에 전문을 보내 히로시마에서 피폭자들이 뒤늦게 죽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자 그로브스는 "거짓말 아니면 선동이야"라고 일축했다. 닷새 후 오크리지에서는 기자들에게 "원자탄은 비인도적 무기가 아닙니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의사들에 따르면 원자병은 "별다른 고통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더군요"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로브스의 최측근 케네스 니콜스는 1987년 회고록에서 "우리는 당시 고열과 폭발뿐만 아니라 방사능에 의해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윌프레드 버체트의 히로시마 잠입 취재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단행된 것이다.

그런데 버체트가 원자탄 피폭의 잔해 위에서 타자기를 두드리며 기사를 작성하던 9월 3일 오후, 히로시마에는 미 군부 인솔 하에 일단의 미국 기자들이 비행기 편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뉴욕타임스>의 빌 로렌스(윌리엄 로렌스와 동명이인, 당시 29세)와 <뉴욕 헤럴드 트리뷴>, <에이피> 통신 기자들이었다.

버체트는 기자들에게 "진짜 기사는 병원에 있네"라고 알려주었다. 이들은 단체로 취재를 마치고 몇 시간 만에 도쿄로 돌아갔다. 하지만 버체트의 기사와 같은 날(9월 5일) 보도된 이들의 히로시마 방문 기사에 방사능 피폭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1972년 발간된 빌 로렌스의 회고록에는 "우리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피폭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가 피폭자에 관해 기사를 썼다 해도 미 군부의 검열에 의해 삭제된 것이 분명하다.

한편 버체트의 기사가 피해자의 관점에 서 있는 반면 로렌스의 기사에는 승자의 우월의식과 오만함이 짙게 배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쟁 기간 동안 항공기, 특히 B-29 폭격기와 원자탄 등을 발명해낸 미국인의 과학기술적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군사력의 효용성에 의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나 워싱턴, 또는 디트로이트나 뉴욕이 히로시마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더욱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와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대다수 미국인들은 원자탄의 파괴력에 도취된 반면 그 피해자의 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된 셈이다.

어쨌든 미국 정부로서는 버체트의 '원자병' 기사에 대응해야 했다. 일본 언론의 원자병 보도는 적대국의 선전선동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 있었지만 주요 동맹국이자 원자탄 제조에 힘을 보탠 영국의 언론 보도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응이 필요했다.

9월 5일 일본군의 학살행위 보고서 발표

첫 번째 대응은 일본의 만행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미 국무부는 9월 5일, 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이 저지른 200건 이상의 학살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와 병사 등을 참수하거나 생매장했고 심지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타임>은 "미국 기자들이 처음으로 히로시마에 들어가 원자탄이 초래한 잔혹한 참상을 미국 독자들에게 알린 바로 그 주에 국무부가 일본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발표했다. 눈치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 타이밍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9월 9일에는 대대적인 물타기 작전이 벌어졌다. 우선 <뉴욕타임스> 빌 로렌스 기자가 나가사키를 방문했다. 다음 날 보도된 기사에서 빌 로렌스는 이렇게 전했다.

"원자탄이 끔찍하기는 하지만, 방사능 피해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며 이는 전쟁 기간 자신들의 냉혹한 야만적 행위에 대한 미국인의 기억을 희석시켜 동정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같은 날, 윌리엄 로렌스 등 미국 기자 30여 명이 트리니티 실험 장소를 방문했다. 로렌스를 제외하고는 첫 방문이었다.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등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들도 동참했다. 이보다 2주 전 백악관은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프로파갠다에 비추어 봤을 때 트리니티 참관은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 피폭자들의 참상을 프로파갠다로 치부하면서 원자탄의 안전성을 입증하려 했다.

로렌스는 군부 검열을 거쳐 사흘 후 보도된 기사에서 트리니티 방문 목적은 "피폭 생존자의 뒤늦은 죽음이 방사능 때문"이라는 일본 측 프로파갠다가 "거짓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핵실험장의 "방사능은 최소 수준으로 줄었으며 인간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선언했다.

▲ 미국은 히로시마가 안전하다고 했지만 원자폭탄을 맞은 히로시마는 사실상 폐허나 다름 없었다. 사진은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의 모습 ⓒ위키피디아

이에 대해 제이 리프턴 박사는 "미국 최고의 과학 기자라는 사람이 당대 최대 과학적 발명의 위험성을 고의로 은폐했다"고 비판했다. 로렌스는 원자탄 제조의 전 과정은 물론 방사능의 공포를 알고 있는 유일한 기자였다. 트리니티 실험 직후 실험장 주변 마을에서 사지가 마비된 채 발견된 노새를 비롯해 과학자들의 방사능에 대한 우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의 기사가 나간 후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이제 안심할 수 있게 됐다"고 했고 <라이프>는 "극소수 일본인이" 피폭 직후 사망했겠지만 "이후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9월 9일 트리니티를 방문해 폭심 부근에 수 분 간 머물렀던 그로브스의 운전병 패트릭 스타우트(29세)는 22년 뒤 백혈병에 걸렸으며 2년 만에(1969년) 사망했다. 이때 치명적 방사능에 노출됐던 때문이다. 미군은 그에게 '복무 관련' 질병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했다. 발병 원인이 방사능 피폭임을 인정한 것이다.

"어제는 토끼, 오늘 일본 사람"

로렌스가 트리니티를 방문했던 9월 9일, 그로브스는 미국 언론에 히로시마 상황을 브리핑했다. 방사능 피폭으로 숨진 일본인이 있다 해도 "그 숫자는 극소수"이며 아마도 일본의 의료 수준이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아가 히로시마에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으며 방사능 수준이 매우 낮아 "그곳에서 영구히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브리핑은 전날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돌아온 토마스 패럴 장군의 예비 조사 결과 보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히로시마 피폭이 인체 등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한 조사 팀원에게 "우리 임무는 원자탄으로부터 방사능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조사단에는 방사능 전문가 스태포드 워런 박사를 비롯해 로스알라모스연구소의 저명한 물리학자 필립 모리슨, 로버트 서버 등 과학자 10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보다 며칠 전 필립 모리슨은 도쿄에서 일본 최고의 방사능 전문가인 스즈키 마사오 박사를 만났다. 그는 1926년 토끼에 대한 방사능 피폭 실험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모리슨에게 당시 논문을 주며 "아, 미국 사람들 참 대단해요. 인간에 대한 피폭 실험을 하다니 말이오"라며 감탄조로 말했다.

9월 8일 스즈키는 조사팀의 히로시마 병원 방문을 안내했다. 그는 한 여성 환자를 가리키며 "감마선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저 분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이면 돌아가실 겁니다. 원자탄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 또 사망한 환자에서 적출된 뇌를 들어 보이며 "어제는 토끼, 오늘은 일본 사람이네요"라고 말했다.

9월 12일 패럴 장군이 도쿄 데이고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버체트의 동료 기자들에 따르면 그의 '원자병' 기사를 부인하기 위해 특별히 열리는 것이었다. 당시 버체트는 도쿄에 막 도착한 상태였다. 그는 히로시마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오는 길에 교토 역에서 호주 전쟁포로들을 만났다. 그들의 간청으로 고베, 오사카, 쓰루가 등지의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다니며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알리고 돌아온 것이다. 옷은 땀에 절고, 목욕도 못하고, 수염도 깎지 못한 그는 동료 기자에 이끌려 회견장으로 향했다. 기자회견이 거의 끝나가던 때였다.

패럴 장군은 기자회견에서 히로시마에서 7만-10만 명이 사망했다는 보도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방사능 위험은 없다"고 주장했다. 원자탄이 어떠한 잔류 방사능의 위험도 피할 수 있는 고도에서 폭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독가스는 방출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사능에 대해 몰랐다. 따라서 독가스를 사망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고 버체트의 기사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독가스는 방출되지 않았다"는 패럴의 주장은 기술적으로는 맞지만 실질적으로 틀린 것이었다. 방사능 위험도 없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주장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일본 측 선전에 말려든 것 같소"

버체트는 말쑥한 차림의 공보 장교와 문답을 나눴다. 버체트의 첫 질문은 공보 장교가 히로시마를 갔다 온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장교는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에는 버체트가 목격한 환자들의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머리털이 빠지고 푸른 반점이 생기며 귀와 코, 입 등에서 출혈이 시작되는 등의 상태를 얘기하자 공보 장교는 이는 폭발과 화염에 의한 것이며, 이들의 사망은 일본인 의사가 치료할 능력이 없거나 열악한 의료 설비 때문일 것이라고 맞받았다.

마침내 버체트는 도심을 흐르는 강물의 물고기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예로 들며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버체트와 공보 장교의 문답 내용이다.

"그 물고기들은 폭발 때문이거나 강물이 뜨거워졌기 때문에 죽은 게 틀림 없소"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그렇단 말이오?"

"그 강은 간만의 차가 있는 강물이오. 물고기들이 쓸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오"

"하지만 내가 어떤 교외에 가보았는데 팔팔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다가 강물의 어떤 지점에 가면 그대로 배가 뒤집히는 것을 보았소. 그러고는 몇 초도 안 돼 죽고 말았소"

공보 장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일본 측 선전에 말려든 것 같소"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의례적인 맺음말과 함께 기자회견은 끝났다.

이후 버체트는 검사를 받는다는 이유로 한 미군병원에 강제 입원됐다가 퇴원 이후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일본에서 추방됐다. 히로시마에서 찍은 역사적 사진들이 담겨 있는 카메라도 미군에 압수됐다.

이후 수 개월간 미국 언론은 방사능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트루먼은 그로브스의 제안에 따라 "비밀리에" 미국 신문편집인 및 방송 앵커들에게 "최고의 안보 이익을 위해" 원자탄의 "사용" 등에 관한 사안은 "사전에 전쟁부와 반드시 상의할 것"을 요청했다.

1945년 11월, 패럴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스태포드 워런은 미 의회에서 히로시마 사망자 중 7-8%가 방사능 피폭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또한 46년 7월 발표된 미 전략폭격조사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히로시마 사망자 중 15-20%(2만 명 이상)가 방사능 피폭에 의한 것이었다. 부상자도 같은 숫자였다. 버체트의 원자병 보도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항의도 은폐

미국은 히로시마 직후, 원폭 투하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항의 사실도 수 십 년 간 은폐했다. 버체트의 기사가 보도된 9월 5일, 미국 정부는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대표로 이루어진 3부조정위원회를 열었다. 8월 11일 도쿄 주재 스위스 공사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일본 정부의 항의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스위스 공사관은 전시 중 일본에서의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항의문에서 일본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을 "인류가 경험한 어떤 무기보다도 잔인한 폭탄"이라고 지칭하면서 원자탄 투하에 따른 민간인 무차별 살상은 "국제법뿐만 아니라 제반 인도주의적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며 "인간성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범죄"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인류와 문명의 이름으로...미국 정부를 고발하는 한편 그 무기 사용의 중지를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밝혔다.

9월 5일 3부 조정위원회는 다음 세 가지 대응방침을 전했다. 첫째 스위스 정부의 외교각서를 접수했음을 인정한다, 둘째 일본 정부에는 회신하지 않는다, 셋째 일본의 항의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6주 후인 10월 24일, 국무부는 스위스 정부에 대해 "히로시마를 '폭격했다고 하는' 것과 관련한(중략) 1945년 8월 11일 자 외교각서를 접수했음을 인정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미 국민에게는 히로시마 원폭 공격을 자랑스럽게 발표했던 미국 정부가 일본의 항의문에 대해서는 "히로시마를 폭격했다고 하는"이란 이상한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윌프레드 버체트는 일본의 항의문이 미국의 의도와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은 원자탄의 막대한 파괴력만을 강조하고자 한 반면 일본의 항의문에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적시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항의 사실과 항의문 내용이 공개된 것은 25년이 지난 197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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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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